오스만 터키는 어떻게 탄생했을까?〈下〉
초기의 오스만 터키가 어떻게 눈부신 속도로 제국으로 도약할 수 있었는가? 첫째, 오스만 터키를 용병으로 고용한 룸 셀주크조가 이들을 서방 기독교 세력의 상징인 콘스탄티노플 방어선의 최전방에 배치됐던 까닭이다. 오스만 터키는 단순한 방패막이의 차원을 넘어서 주변의 작은 이슬람 공국들의 기대와 지원을 한 몸에 받고 지하드(성전)를 거행할 수 있었던 것이다. 비록 이빨 빠진 호랑이 였지만 비잔틴 제국의 수도인 콘스탄티노플은 무슬림 입장에서는 불구대천의 원수요 타도해야 할 이교도였다. 콘스탄티노플 공략은 잠자는 무슬림의 전사 스피릿을 고무시키고 이를 한데 모을 수 있는 최고의 화두였고 오스만 터키는 이를 십분 활용했던 것이다.
둘째, 같은 기독교 세력인 제노바의 도움(기독교도 입장에서는 배신) 때문이다. 이탈리아가 통일된 것은 1870년 근대의 사건인데 당시 제노바와 베네치아는 지중해 해상권을 놓고 치열한 경쟁을 하고 때로는 전쟁도 불사했던 앙숙이었다. 경쟁에서 밀린 제노바는 베네치아의 배후세력인 오스만 터키와 1352년 무역협정을 맺는다. 이는 중동 역사의 근본적인 관심사가 곁으로 드러난 이슈인 ‘종교’보다는 ‘경제’, 즉 동서교역을 통한 부의 창출에 있었음을 보여준다. 스페인을 부추겨 동방으로 향하는 신항로 개발에 앞장선 크리스토퍼 콜롬부스도 베네치아를 끔찍하게 싫어한 제노바 출신이었다. 베네치아에게 밀린 제노바인의 자존심이 신항로 개발에 나서게 만든 무시 못할 동기가 된 것이다.
멸망을 앞둔 비잔틴을 구원한 백기사는 전혀 의외인 동방에서 나타났다. 자칭 칭기스칸의 손자라고 주장하는 절름발이 티무르가 그였다. 중동의 이슬람 심장부에 훌라구가 세운 일 한국이 1353년 멸망하면서 같은 몽골족 출신의 독실한 무슬림인 티무르가 그 자리를 매운 것이다. 그는 ‘인간 백정’이라 불릴 정도로 무자비한 군주였지만 몽골족의 전통에 이슬람 윤리가 결합된 강력한 군대를 만든 천재적인 사령관이었다. 그의 잔인성은 당시에 유행하던 문구가 잘 보여준다.
티무르는 1365년 차카타이 한국을 멸망시키고 사마르칸트를 수도로 삼아 본격적인 정복전쟁을 시작했다. 훌라구의 몽골 군대를 두 번이나 격퇴했던 맘루크 군도 티무르에게는 적수가 되지 못했다. 1401년 맘루크 조가 다스리던 시리아를 유린하고 곧바로 소아시아로 진격한 티무르는 이슬람의 새로운 강자로 떠오른 오스만 터키와의 일전을 남기고 있었다.
1402년 오늘날 터키의 수도인 앙카라에서 바예지드1세(1389-1402년)와 티무르가 격돌했다. 수도인 에디르네를 출발한 술탄의 10만 군대가 자기의 앞을 지나갔기 때문에 콘스탄티노플은 목표가 자기인 줄 알고 한동안 심장이 멎었을 것이다. 술탄의 대군이 무사 통과하는 것을 확인하고 깊은 한숨을 내쉰 콘스탄티노플은 숨을 죽이고 두 이교도들의 싸움을 관전했다. 팽팽할 것으로 예상된 싸움은 싱겁게 티무르의 승리로 끝났다. 어디 그뿐인가? 바예지드1세는 포로로 잡혔고 자결함으로 최후를 맞았다. 비잔틴에게 무적으로만 보였던 오스만 터키군도 티무르 앞에서는 적수가 아님이 드러난 것이다. 이로써 콘스탄티노플은 질긴 운명을 반세기 연장할 수 있었다.
티무르는 앙카라 전투 승리가 있은지 3년 후인 1405년, 대망의 꿈인 중국 원정을 준비하다가 허무하게 죽고 만다. 그는 짧은 기간에 방대한 대륙을 정복했지만 그의 죽음과 함께 모든게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티무르는 분명 위대한 정복자였지만 제국의 창건자는 아니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