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방문제란 무엇인가? 〈上〉
17세기에 힘을 비축한 유럽은 18세기로 넘어가면서 몇번의 ‘잽’을 날리며 탐색전을 펼치다가 본격적으로 오스만 터키 사냥에 나섰다. 초기에는 오스트리아와 러시아가 선봉에 섰고, 우습게도 열강들의 상호견제와 눈치작전은 오스만 터키를 보호하는 방패막이 되어 주었다. 사냥감 하나를 놓고 여러 사냥꾼이 경쟁하는 꼴이었다. 하지만 후기로 넘어가면서 러시아의 급속한 남하 정책으로 이러한 방패에 균열조짐을 보이더니 1798년 프랑스가 오스만 터키령인 이집트를 정복함으로써 방패막은 사실상 무용지물이 되었다.
18세기에 오스트리아와 러시아만 상대하던 오스만 터키는 19세기로 넘어가면서 영국과 프랑스라고 하는 새로운 ‘절대강자’를 만나게 되고, 이쯤되면 언제 멸망한다 해도 전혀 이상할게 없는 상황에 처한다. 그럼에도 오스만 터키 제국이 1세기를 더 연명할 수 있었던 것은 4대 강대국들로 인해 새로운 역학관계가 형성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당장의 급속한 멸망만 면했을뿐 열강들에 의해 야금야금 뜯어먹히면서 서서히 멸망하는 쪽으로 전환된 것에 불과했다.
거대한 제국 오스만 터키의 쇠퇴는 19세기 ‘동방문제’라는 새로운 외교적 용어를 탄생시켰다. ‘동방문제’란 무엇일까? 동양인들이 무슨 골치 아픈 문제라도 일으켰다는 말인가? 동방문제는 서유럽 입장에서의 ‘동방’ 특히 오스만 터키 제국의 문제로써 터키 제국 내 피지배 민족의 독립운동과 이를 둘러싼 서구 열강들의 피튀기는 이해관계를 가리키는 말이다.
1798년 나폴레옹이 이끄는 프랑스 군이 오스만의 종주국으로 있던 이집트를 정복함으로써 간신히 버텨오던 오스만 신화가 무참히 깨졌다. 변화된 현실을 직시하지 못하고 유럽의 기독교 세계를 여전히 열등한 세계로 터부시 하던 오스만 터키는 이때부터 ‘우리와 적들’이란 용어를 사용하며 연이은 참패의 원인을 분석하기 시작했다. 이전에도 분석과 토론은 있었지만 ‘적들’에 대한 관심은 빠졌고 그저 ‘우리’ 즉 자체내의 문제만 분석하는 수준이었다. 하지만 이것도 윗선에 있는 정치 지도자 수준에서만 일어난 현상이고 대다수 국민들은 변화된 세계의 상황을 모르고 알라의 은총 속에 무슬림의 자부심을 유지하며 살아 갔다.
하지만 이런 환상도 몇세기 동안 자신들이 유럽에 수출해 오던 커피, 설탕, 면화 등이 오히려 유럽에서 중동으로 역수출되는 상황이 발생해 깨지기 시작했다. 중동산 작물은 먼저 국외시장에서 찬밥대우를 받더니 결국 국내 시장에서도 값싼 서구 제품에 밀려나기 시작했다. 이런 현상은 ‘한잔의 커피’속에 상징적으로 잘 나타나 있다. 커피와 설탕은 원래 중동에서 유럽으로 소개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