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예수교장로회연합회 교회동역자협회  

신학

 
작성일 : 12-07-22 23:30  기사 출력하기 글쓴이에게 메일보내기
 

동방문제란 무엇인가?〈下〉


네델란드인들은 인도네시아의 자바 식민지에서 커피를, 프랑스는 서인도제도 식민지에서 설탕을 재배해 중동에 역수출하기 시작했다. 유럽인들이 식민지에서 대규모 플랜테이션 농법으로 생산한 작물은 가격도 저렴하고 품질도 우수했다. 결국 중동의 오스만 터키인들이 마시는 커피는 오직 ‘뜨거운 물’만 국산이고, 커피와 설탕이 모두 유럽산이 되는 웃지못할 해프닝이 현실이 된 것이다.

계몽주의로 알려진 셀림3세(1789∼1807년)는 비록 늦은 감은 있지만 유럽의 우월성을 인정하고 부분적으로나마 유럽을 배우는 과감한 개혁을 실시한다. 한 명의 재상에게 집중된 권력을 12부처 내각으로 분산하고, 인쇄소를 도입해 유럽서적을 번역, 출간해 보급했다. 특히 아무도 손댈 수 없는 군 조직에까지 메스를 가하며 유럽식 군대로 개편하다가 전통적 군 조직인 ‘예니체리’ 군단의 반발을 초래한다. 이미 술탄의 노예가 아니라 술탄의 머리 위에서 놀던 예니체리 군단은 셀림 3세에 대항해 반란을 일으켜 술탄을 폐위하고 처형하는 하극상의 극치를 이룬다.
 
결국 오스만 터키를 강하게 했던 예니체리 군단이 말기에는 오스만 터키의 근대화와 개혁의 발목을 잡는 ‘수구꼴통’ 세력이 된 것이다.

예니체리 군단이 세운 허수아비 술탄인 무스타파4세의 1년 통치가 끝나고 마흐무드 2세(1808∼1839)가 술탄에 즉위했다. 마흐무드는 천천히 힘을 길러 1826년 예니체리 병영을 공격해 이들을 완전히 소탕하고 제국의 근대화에 박차를 가했다 그가 추진한 개혁의 압권은 무슬림 남자들이 머리에 착용하는 터번을 터키식 모자로 바꾼 것이다. 그의 통치기간은 프랑스 혁명의 여파로 발칸반도에 민족주의 열풍이 거세게 밀어닥칠 때였다.

1822∼1827년에 일어난 그리스의 독립전쟁은 영국과 러시아의 지원을 받은 그리스 독립군이 승리하고, 1829년 그리스는 오스만 터키로부터 독립을 승인받게 된다. 유럽문명의 모태인 그리스가 이슬람의 속국이 된 오랜 역사는 유럽인의 자존심에 큰 상처를 안겼고, 그리스 독리전쟁은 많은 유럽인들을 의용군으로 지원하게 만들었다. 그 가운데 영국의 낭만파 시인 바이런도 있었다.

압드 알 마지드 1세(1839∼1861)도 즉위와 함께 대대적인 개혁을 지속했다. 이런 가운데 열강들의 찬탈도 이어졌다. 러시아의 도발적인 남하정책은 1853∼1856년에 발생한 크림전쟁에서 노골화되었고, 이 전쟁은 러시아 남하를 경계한 영국, 프랑스가 오스만 터키를 지원함으로 오스만 터키측의 승리로 돌아간다. 하지만 세상에 공짜란 없다. 이후 오스만 터키는 영국과 프랑스의 영향력 아래 놓이게 된다.

압드 알 하미드 2세(1876∼1909)는 1876년 서구식 헌법을 만들어 입헌군주국 터키를 만들었지만 이듬해 러시아와의 전쟁을 빌미로 의회를 해산한다. 그는 언론의 자유를 보장하고 이스탄불 대학을 여성에게도 개방했다. 하지만 국내외의 자유주의 물결이 오히려 술탄제 폐지 요구로 이어지자 위협을 느끼고 강력한 독재로 돌아선다. 이에 반발한 젊은 장교들을 중심으로 ‘청년터키당’이 만들어지고 이들은 1908년 혁명을 승리로 이끈다. 술탄을 폐위하고 동생 메흐메드 5세(1909∼1918)를 그 자리에 앉혔지만 터키는 헌법에 기초한 입헌군주국으로 새롭게 태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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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방문제와 이집트
동방문제란 무엇인가? 〈上〉