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예수교장로회연합회 교회동역자협회  

신학

 
작성일 : 12-08-21 11:07  기사 출력하기 글쓴이에게 메일보내기
 

동방문제와 이집트


1517년 셀림1세는 맘루크(터키계 노예용병) 배신자의 도움으로 손쉽게 맘루크 조 이집트를 정복할 수 있었다. 배신에 대한 대가는 상당했는데, 그 배신자는 오스만 터키의 속주로 떨어진 이집트의 초대 총독이 되었고, 기존의 맘루크 체제도 그대로 존속했기 때문이다. 결국 술탄에서 총독으로 격하된 것을 빼면 이집트의 맘루크 지배 계층은 그대로 권력을 유지했다. 이집트의 토착민들은 고위관료층에 발탁되지 못했고 여전히 세금을 착취 당하는 다수의 서민에 불과했다. 이스탄불의 중앙권력이 약화되자 17세기 중엽부터 맘루크들은 다시 득세하기 시작했고, 18세기부터는 맘루크 군부의 파당끼리 심각한 전쟁이 진행됐다.

19세기부터 겪게될 오스만 터키의 잔혹사는 1798년 프랑스의 이집트 침공에서 시작된다. 식민지 쟁탈전에서 영국에 늘 밀리기만 하던 프랑스는 단번에 판세를 바굴 수 있는 히든카드로써 이집트 침략을 강행한다. 이집트의 원정은 나폴레옹이 맡았는데, 당시 탈리랑 수상은 새롭게 부상하는 나폴레옹을 중앙 정치무대에서 떼어내려는 의도로 이를 맡긴 것이다. 나풀레옹이 불과 1주일만에 이집트를 장악해버림으로써 오스만 터키의 실체와 유럽의 우월성이 만천하에 드러났다.

오스만 터키가 종주권을 갖고 있던 이집트를 프랑스가 도발적으로 정복해버리자 그동안 오스만 터키에 대한 침략의 구실만 찾고 있던 영국도 본격적으로 개입하기 시작했다. 1801년 영국은 프랑스를 쫓아내고 오스만 이집트를 해방시켰다. 비록 3년뿐인 짧은 통치였지만 이것은 단순한 ‘해프닝’으로 넘길 사건이 아니었다. 프랑스의 도발은 서구의 작은 원정도 중동의 심장부를 가뿐히 정복할 수 있고 그들의 철수도 또다른 서구세력에 의해서만 실현될 수 있다는 뼈저린 현실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1798년 프랑스의 이집트 침공은 이후 오스만 영토 내에서 영국, 프랑스 간의 불꽃 튀는 경쟁을 초래했다. 이 경쟁은 후발주자로서 강력한 경쟁자가 된 독일의 등장으로 1904년 영-프 협정이 맺어질 때까지 계속됐다.

1801년 프랑스를 쫓아낸 영국이 자국 문제로 미련없이 철수하자 이집트의 지배권을 놓고 터키 중앙정부군과 이집트 맘루크 군 간에 격돌이 시작됐다. 하지만 프랑스의 통치는 3년의 짧은 시간이었지만 이 기간 동안 나폴레옹의 혁명사상을 맛본 이집트 민중들이 들고 일어났다. 이집트 민중들은 터키의 중앙정부군과 암루크 군 모두를 거부하며 1804년 거국적인 봉기를 일으킨다. 1250년부터 이집트를 무자비하게 통치해온 맘루크 지배층과 멀리 떨어져 있어 현지 사정을 전혀 모르는 터키 정부에 더 이상 이집트의 운명을 맡길 수 없다는 자각이 민중들 가운데 싹튼 것이다.

1805년 민중들에 의해 총독에 선임된 무함마드 알리는 ‘근대 이집트의 아버지’로 불리기에 부족함이 없는 인물이다. 그는 오스만 터키의 종주권을 형식적으로나마 인정하고 영국-프랑스 등 열강의 신경을 건드리지 않는 ‘줄타기’ 외교술을 펼치며 조국 근대화를 이루어야 하는 쉽지 않은 임무를 성공적으로 완수했다. 서구문물을 과감히 도입해 유럽화를 추구한 알리로 인해 이집트는 유럽 문물이 중근동으로 흘러 들어오는 통로가 되었다.
 
오스만 술탄의 명을 받고 1812년 아라비아 반도의 와하비 반란군을 성공적으로 진압한 무함마드 알리는 1840년까지 아라비아 반도의 실질적 통치자가 된다. 1820년 수단, 1831년 시리아를 정복한 알리는 1839년 자신의 주군인 오스만 술탄의 군대를 패퇴시키고 그를 화병으로 죽게 만든다. 오스만 터키의 해군마저 이집트 해군에 의해 괴멸되자 오스만 터키 제국은 그야말로 붕괴직전에 처한다. 알리의 눈부시고 경이적인 성공은 영국과 프랑스를 당혹하게 만들었고, 자칫 알리를 통해 이슬람 세계가 통일될 것을 염려한 영-프는 1841년 본격적인 개입에 나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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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의 팔레스타인 위임통치(1)
동방문제란 무엇인가?〈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