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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

 
작성일 : 12-09-18 15:06  기사 출력하기 글쓴이에게 메일보내기
 

영국의 팔레스타인 위임통치(2)


팔레스타인 지역에 남게 된 아랍인들과 유럽에서 이주해 온 유대인들이 한반도의 1/9밖에 되지 않는 좁은 땅에서 서로 주도권을 차지하고자 불꽃 튀는 경쟁을 벌이게 되는 것이 소위 ‘팔레스타인 문제’이다. 현재 1천만명 정도의 인구가 살고 있는 팔레스타인 땅을 영국의 위임통치가 본격화 된 1922년 당시만해도 ‘사람이 살지 않는 황무지’에 가까웠다. 전체 인구는 75만명에 불과했고, 이중 아랍인들이 68만명을 차지하며 다수를 이루었다. 초기 시온주의자들도 압도적 다수를 차지하고 있던 아랍인의 존재를 잘 인식하고 있었다. 다수의 아랍인들 틈에 유대국가를 세우는 방식을 놓고 시온주의 지도자들은 크게 3가지의 입장 차이를 보였다.

첫째, 절대 다수를 차지하는 중도파다. 헤르첼을 비롯한 시온주의자들 대부분은 아랍인을 과소평가했다. 이들은 낙후된 팔레스타인 지역에 유럽에서 이주해온 유대인들이 주변 아랍국보다 월등히 앞선 현대 국가와 문명을 이루어간다면 팔레스타인에 남은 아랍인들도 자연히 그 흐름 속에 동화될 것으로 믿었다. 물론 이런 생각 속에는 유럽 문명이 아랍 문명보다 뛰어나다는 우월감과 당시 아시아와 아프리카의 땅은 주인없는 땅이고 힘으로 차지하면 된다는 제국주의적 견해가 어느 정도 녹아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요르단의 압둘라 국왕 역시 아랍인의 삶의 수준을 향상시켜 줄 것을 기대하며 팔레스타인에 유대인들이 이주해 오는 것에 무척 우호적이었다.

둘째, 소수의 과격파다. 자보틴스키를 비롯한 소수의 과격파는 다수를 차지한 팔레스타인 아랍인들이 결코 유대인들의 이주와 정착을 좌시하지 않을 것을 예측했다. 아울러 1920년대 중동에 광범위하게 불어온 아랍 민족주의가 팔레스타인에 갓 피어나려고 하는 유대국가의 숨통을 끊어버리려 할 것을 알았다. 이들을 중심으로 시온당나귀부대, 38대대, 39대대, 40대대 등 유대인 방위군들이 만들어지고 유대인 정착지를 향한 아랍인의 테러 공격을 막을 만반의 준비가 갖추어진다.

셋째, 소수의 이상주의자다. 아이슈타인을 비롯한 소수의 이상주의자들은 유대국가의 창설보다 좁은 땅에서 두 민족이 평화롭게 공존할 수 있는 틀 위에서 협정이 이루어지는 것을 원했다. 이들은 두 민족이 평화적 공존을 위해서라면 이미 다수를 차지한 아랍인 국가 속에 유대인들이 묻혀서 사는 것도 감수할 수 있다고 했다.

유대인 사회는 풍부한 자금력으로 아랍인들로부터 해안 늪지의 황무지를 사들였고, 그곳에 현대 이스라엘의 수도인 텔아비브와 같은 현대적 도시를 만들었다. 1920-1935년 사이에 투입된 유대 자본이 영국 위임통치 정부 지출총액의 3배에 달한 것을 볼 때 유대인들이 얼마나 의욕적으로 유대국가 창설에 매진했는가를 알 수 있다. 흔히 팔레스타인 땅에 오랫동안 평화롭게 살고 있던 아랍인들을 20세기에 유럽에서 몰려온 유대인들에 의해 강제로 쫓겨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유대인들의 초기 이주 과정을 볼 때 이는 사실과 많이 다르다.

유대인들의 이주와 투자로 인해 지중해 해변의 쓸모없는 늪지는 4배 이상 폭등했고, 당시 땅을 갖고 있던 지주들을 중심으로 신흥 부르조아 계층이 형성됐다. 유대 자본의 투자로 1935년 팔레스타인은 전 국토의 5%, 경작가능토지의 12%를 유대인들이 소유하게 되었다. 이것은 모두 합법적으로 구입된 것이고 많은 경우 땅의 원 가치보다 더 많은 가격이 지불되었다.

시온주의자들은 유럽의 은행가로 천문학적인 부를 축적한 유대인 부호 로스차일드 가문의 도움을 받았다. 로스차일드 가문이 제공한 ‘유대민족기금’의 도움을 받아 대규모 토지구매에 나섰고, 1500년간 버려진 불모의 황무지 땅 이스라엘은 순식간에 금싸라기 땅으로 둔갑했다. 이런 현상은 소위 서울 강남이 개발붐이 일어 땅 부자, 졸부들이 탄생한 것처럼 아랍 지주들 가운데도 부르주아들이 많이 탄생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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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슬로 협정과 팔레스타인 자치정부의 수립(1)
영국의 팔레스타인 위임통치(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