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예수교장로회연합회 교회동역자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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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1-10-20 10:42  기사 출력하기 글쓴이에게 메일보내기
 

명령 없는 교회문화 정립하기


다만 네 승낙이 없이는 내가 아무 것도 하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이는 너의 선한 일이 억지 같이 되지 아니하고 자의로 되게 하려 함이라(몬 1:14); 2 너희 중에 있는 하나님의 양 무리를 치되 억지로 하지 말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자원함으로 하며 더러운 이득을 위하여 하지 말고 기꺼이 하며 3 맡은 자들에게 주장하는 자세를 하지 말고 양 무리의 본이 되라(벧전 5:2-3)


위의 두 본문을 보면 교회 생활이 이 세상의 인간이 모여 살아가는 사회 구조와는 다른 방식의 원리가 지배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세상은 법과 질서를 잘 지키면 건전하고 수준 높은 사회가 된다고 한다. 그래서 법 조항과 제도를 견고히 만들어 누구든 그 사회 규칙에 복종하게 한다. 법을 만드는 입법 기관이 있고 법을 집행하는 행정부가 있는가 하면 그것을 제대로 지키지 않을 때 형벌을 내리는 사법부가 있다. 이처럼 법에 근거한 타인에 대한 타인의 지배 방식이 이 세상을 이끌어가는 일반적 규칙이다.

그런데 이러한 세상 지배 방식을 교회에도 그대로 적용한다는 것이 매우 큰 문제이다. 하나님의 말씀 성경을 마치 세상의 법처럼 사용하여 명령하는 계급인 지배층이 중심이 되어 그 명령에 복종해야만 하는 피지배층을 만들어 낸다. 목사를 중심으로 한 극소수의 지배 계급이 대다수의 일반 성도들을 단 몇 마디의 명령으로 제압할 수 있는 악법이 교회 내에 횡행하고 있다. 여기에 물질적 이해관계와 사리사욕의 늪에 빠지면서 하나님이든 성경이든 욕구충족의 도구로 전략해 버린 한국 교회의 상황은 참다움과 역겨움이 온몸을 혼절하게 만들 지경이다. 모든 성도는 교회의 머리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의 지체이며 하나님의 말씀 성경진리로 양육 받는 지체라면 어느 누구라도 사람의 명령에 굴종할 수 없는 천국 백성의 권리를 갖는다.

앞에서 소개한 성경 본문으로 돌아가 보자. 빌레몬서는 바울 사도가 로마의 감옥에 있을 때 복음 진리를 양육한 오네시모라는 성도와 관련된 기록이다. 오네시모의 주인은 골로새에 있는 바울 사도의 제자 빌레몬이었다. 오네시모는 주인의 재물을 도둑질한 범죄자로 붙잡혀 로마에서 감옥살이를 하고 있었다. 그 와중에 바울 사도를 만났으며 수감 중에 바울이 진리로 낳은 ‘아들’(몬 1:10)이 된다. 그런데 바울은 골로새에 있는 신앙의 후배이자 동역자 빌레몬에게 오네시모의 일을 상의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바울은 선생님, 빌레몬은 제자라는 관계가 상하 지배 관계가 될 수는 없다. 바울은 빌레몬을 동역자로 하나님의 복음 사역자로 존경하며 그에게 정중하게 문의한다. 빌레몬의 허락 없이는 ‘아무것도 바울 마음대로 하지 않겠다’고 한다. 그리고 이렇게 알려주는 목적은 바로 하나님 앞에서 하는 빌레몬의 선한 일이 억지가 아닌 ‘자의로’ 한다는 데 있다고 한다. 하나님이 주시는 마음에 따라 자발적으로 선택하고 오직 하나님께 받은 은사를 따라 진리의 자유 안에서 행위하게 하려는 것이 그 목적이다. 본문의 내용을 따라가 보면 바울 사도는 얼마든지 빌레몬에게 명령할 수 있는 위치에 있다. 하지만 하나님은 바울로 하여금 그 지위가 다른 성도의 자유를 해치지 못하게 하신다.

두 번째 인용 본문 베드로전서 5장 2절을 보면 더욱 분명하다. 보혜사 성령 하나님은 사도이면서 나이가 든 그야말로 ‘원로장로님’ 신분인 베드로 사도가 후배이자 동역자인 교회의 어른인 장로들에게 유언과 같은 말씀을 전하게 한다. ‘하나님의 양 무리를 치되 억지로 하지 말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자원함으로 하며 더러운 이득을 위하여 하지 말라’라고 한다. 명쾌하다. 성도는 하나님의 양들이지 당회나 목사의 희생양이 될 수 없다. 교회의 어떤 법도 성도를 희생시켜 이득을 취하려는 법과 제도와 의식이라면 이는 분명 반교회적이며 적그리스도적이다. 장로이든 권사이든 목사이든 지도자로서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말로는 하나님의 양 무리인 성도를 위한다고 하면서 상하 지배 관계의 법률과 제도를 만든다면 이는 베드로 사도의 지적처럼 ‘더러운 이득’을 얻고자 하는 악한 생각이 드러난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자원(自願)’은 무질서를 유발하는 자기 멋대로 하겠다는 뜻의 자원이 결코 아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분명히 깨닫고 하나님의 양 무리에게 진리의 말씀을 전할 수 있는 은사를 받은 자이어야 한다. 입술로 성경 말씀만 그럴듯하게 외친다고 하나님의 양 무리를 보호하는 목자가 저절로 되는 것은 또한 결코 아니다. 모든 성도가 신뢰하지 않는 자원하는 지도자가 된다고 한들 그에게 신앙의 어떤 유익이 있겠는가.
주 예수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의 모든 성도에게 하나님 중심의 신앙과 성도 사랑의 경건은 오직 하나님께 각자 받은 은사대로 어떤 경우에 처하든 감사하며 살게 된다는 데 그 신비함과 엄중함이 있다. 이는 보혜사 성령 하나님이 오직 하나님의 말씀 성경진리를 깨닫게 한 결과로만 가능하다. 진리 안에서 알고 믿는 것이 같은 그리스도의 지체인 성도에게 교인이 먼저 되었다는 이유로 지시하고 명령하고 책임을 지우는 것은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라는 진리를 부정하는 심각한 범죄 행위다. 모든 성도에게 칭찬을 받고 모든 교인들의 인정을 받는 지도자라고 하더라도, 비록 그의 말이 모든 성도들을 설득시키는 은사가 있다고 하더라도, 명령을 내릴 수는 없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종으로서 올바른 지도자는 바른 진리만 전달하는 것에 사력을 다할 뿐이지 지체에게 명령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성도인 지체는 모두 하나님 앞에서 같은 형제이며 진리를 지키고 전파하는 은혜의 동반자, 은사의 동역자이기 때문이다. 보혜사 성령 하나님은 바울 사도를 통해 제자로 만난 디도를 복음 전파의 ‘동행자’로 섬기도록 했기 때문이다.

16 너희를 위하여 같은 간절함을 디도의 마음에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17 그가 권함을 받고 더욱 간절함으로 자원하여 너희에게 나아갔고 18 또 그와 함께 그 형제를 보내었으니 이 사람은 복음으로써 모든 교회에서 칭찬을 받는 자요 19 이뿐 아니라 그는 동일한 주의 영광과 우리의 원을 나타내기 위하여 여러 교회의 택함을 받아 우리가 맡은 은혜의 일로 우리와 동행하는 자라(고후 8:16-19)

글쓴이 프로필
글쓴이 : 박홍기 박사 (주필 철학박사)
이메일 : jayouda@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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