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01월 19일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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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공유 작성일 : 21-11-09 19:48  글자크기 크게글자크기 작게 기사 출력하기글쓴이에게 메일보내기
종교 계급주의 타파하기
13 성 밖 쓰스 신당의 제사장이 소와 화관들을 가지고 대문 앞에 와서 무리와 함께 제사하고자 하니 14 두 사도 바나바와 바울이 듣고 옷을 찢고 무리 가운데 뛰어 들어가서 소리질러 15 가로되 여러분이여 어찌하여 이러한 일을 하느냐 우리도 너희와 같은 성정을 가진 사람이라 너희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은 이 헛된 일을 버리고 천지와 바다와 그 가운데 만유를 지으시고 살아 계신 하나님께로 돌아오라 함이라(행 14:13-15)

위의 본문에 기록한 사건은 바울 사도의 첫 번째 선교 일정 중 루스드라 성에서 일어난 일이다. 루스드라는 갈라디아 지방과 경계를 같이 하는 소아시아 남부 지방인 루가오니아에 있는 성이다. 사도 바울과 그 동역자 바나바는 루스드라 성에서 나면서 앉은뱅이였던 자를 일어서게 하는 표적을 보여준다. 이러한 소문이 그 성에 퍼지자 그리스의 대표적 우상 제우스(쓰스) 신당 제사장이 사람들과 몰려와 우상에게 바치는 소와 화관(花冠)을 사도 일행의 대문에 놓고 우상에게 하듯 사도들에게 제사하려고 했다. 이에 두 사도는 그냥 말리는 정도가 아니라 당황과 통탄을 감추지 못하고 옷을 찢으며 그 제사장의 행위를 중지시킨다. 그러면서 사도 일행도 그들과 같은 본성과 성향을 가진 인간임을 부르짖으며 그러한 제사 행위를 쓸데없는 무가치한 행위라고 일깨우며 오직 유일하신 창조주, 만물의 운행자 여호와 하나님께 돌아오라고 한다.

일견 창조주 하나님에 대해 무지한 종족에게 하듯 보이는 이 내용은 시대를 뛰어넘는 경고와 경계의 뜻을 담고 있는 내용이기도 하다. 인간을 신처럼 떠받드는 행위가 우리의 교회에도 횡행하고 있는 현실을 생각하면 오늘날에도 더욱더 의미심장하게 다가온다. 종교적 행위가 곧 신에게 보이는 행위와 등치시키는 로마 가톨릭에서 교황에 대한 숭배는 곧 하나님을 섬기는 것과 일치한다. 그런데 이러한 인간 숭배 행위는 개신교에도 일어난다는 사실이 고통스러운 개탄스러움이다. 하나님에 대한 지식에 무지한 자들을 속이는 사이비 이단들의 교주들이 신적 존재처럼 숭배받는 것은 그렇다고 하더라고 개신교 그것도 명칭은 진리를 깨달은 장로들의 합력과 합심으로 모였다는 ‘장로교’ 내에서도 이러한 종교적 계급주의가 지배하고 있다. 성경 진리를 정확하게 잘 가르쳐 주는 목사이기 때문에 존경하고 따르는 것이 아니라 성도 자신과는 뭔가 다른 존재로 생각하기 때문에 특정 계급으로 숭배하는 일은 비성경적이고 반기독교적이다. 목사에게 잘하는 것이 하나님께 잘하는 것과 동일하다는 거짓을 살포하는 자가 있는가 하면, 제도적으로 교인에게 절대 불리한 법과 제도를 만들어 목사의 말에 무조건 굴종해야 하는 경우도 있다. 또한 교인의 자기 존재를 하나님 앞에서 자유로운 자녀임을 분명하게 가르쳐 주지 않으므로 수십 년 교회 생활은 곧 종교적 계급주의의 희생양 처지에 놓이기도 한다.
계급주의의 간악(奸惡)함은 모든 것들을 자기 자신이 속한 계급들의 이해관계를 위한 수단과 방법으로 삼아 그러한 특정 계급들의 욕구에 반하는 모든 대상들은 철저히 배타적인 적대 세력을 간주한다는 데 있다. 이 계급주의의 특징이 오직 타락한 세속의 얘기이기만 한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하지만 결코 그렇지 않다. 사회에서도 매우 경계하는 이러한 계급주의를 그에 편승하여 그것을 매우 자랑스럽고도 뻔뻔하게 자행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를 농락하고 있는 것이 처절한 우리 교회의 현실이다. 그래서 두 사도가 옷을 찢으며 자신들도 하나님의 한 피조물에 불과하다는 부르짖음은 어느 때보다 어느 곳보다 지금의 한국 교회에 매우 큰 고함으로 들린다. 성경 진리를 함께 지키고 전하는 우리는 단지 하나님의 자녀이며 진리 전파와 수호의 동역자 그 이상 이하도 아니어야 할 성도 관계가 계급주의가 지배하는 상황으로 전락한 것은 슬픈 너무도 슬픈 현실이다. 지키고자 하는 대상이 세상이라는 밭 속에 감추어진 진리의 보화 절대 진리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세상이 더 끌어모으고자 하는 밭의 값이다. 참으로 아슬아슬한 시간을 보내고 있다.

로마 가톨릭의 중세 천년의 암흑기처럼 하나님은 현대 기독교의 발전 역사를 선도해 온 한국 교회를 진노 아래 두고 수만 개의 교회가 신적 권위의 성경 진리를 점점 부정하는 심판 아래 두고 계신 상황이 심화된다. 교회를 사적 이익의 수단으로 삼고자 하는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어버려(롬 1:24) 낯 뜨거운 부끄러운 욕심(롬 1:26)을 자행하고 상실한 마음대로 버려두어(롬 1:28) 불의와 추악, 탐욕과 악의, 시기와 살인, 분쟁과 사기 그리고 악독과 비방, 능욕과 교만, 진리의 선배인 부모 거역과 배반, 무정과 무자비(롬 1:29-31 참조)의 심판의 나날을 보내고 있는 것은 아닌가? 기독교에서 종교적 특권 계급이 존재한다는 것은 하나님 심판의 분명한 증거가 되었다. 주전 6세기 말 남유다가 망할 당시 종교 계급들 선지자, 왕, 제사장의 부패, 주전 5세기 중엽 말라기 선지자 당시 제사장과 왕 그리고 그들을 따르는 부패한 종교 권력들이 그러했다. 또한 예수님 당시 산헤드린 공회를 중심으로 종교 권력을 마음껏 행사했던 대제사장과 바리새인, 유대 장로들과 사두개인의 특정한 종교 계급들의 단합이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의 대상이었다. 종교적 계급주의의 횡행이 너무도 구체적 행태로 드러나는 우리 한국 교회의 참담함은 역사적인 어떤 국난보다 더 심한 서글픔으로 몰아가고 있다.

성경 진리의 절대적 권위를 회복할 수 없는 이상 어떤 기독교의 본질과 사명은 그 정당성을 가질 수 없다. 이는 곧장 자신보다 더 큰 권력을 가진 사람에게 복종할 수밖에 없는 결과를 낳는다. 같은 성도라고 하며 성도를 위협하고 그리스도의 지체라면서 종속과 굴종을 강요하는 것은 이천 년 전 사도 바울과 바나바가 찢은 옷을 다시 찢어야 하는 상황이다. 하나님의 자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지체는 막대한 부가 뒷받침하는 경제적 능력, 고위직 신분과 명성, 정치적 권력과 지배력이 결코 침범할 수 없는 절대 자유가 지배한다. 이는 오직 보혜사 성령에 의한 절대 진리 성경을 바르게 깨닫게 하는 무한한 은총의 사역으로만 가능하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로 자유케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세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갈 5:1);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함이 있느니라(고후 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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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박홍기 박사 (주필 철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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