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술
하나를 들으면 열을 알 수 있어야
子謂子貢曰 女與回也 孰愈.
자위자공왈 여여회야 숙유.
對曰賜也 何敢望回. 回也 聞一以知十 賜也 聞一以知二.
대왈사야 하감망회. 회야 문일이지십 사야 문일이지이.
子曰弗如也 吾與女弗如也
자왈불여야 오여여불여야.
논어 공야장의 계속이다. 해석하면 다음과 같다.
공자가 자공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너와 안회 중에 누가 더 뛰어나느냐?”라고 하였다.
(자공이) 대답하여 말하기를 “어찌 감히 안회를 바라볼 수 있겠습니까? 안회는 하나를 들으면 열(가지)을 알고, 저(사, 자공)는 하나를 들으면 (겨우) 둘을 아는 정도입니다.”
공자가 말했다. “너는 안회만 못하다. 나는 네가 안회만 같지 못한 것을 인정(허락)한다.”
자공(520~456 B.C.)은 중국 춘추시대 위(衛)나라 출신의 학자로서 성은 ‘단목’(端木)이고 이름은 ‘사’(賜)다. 그는 공자의 십철(十哲) 중에 한 사람으로 웅변력이 있었으며 이재에 밝은 사람이었다. 안회(521~481 B.C.) 역시 공자의 십철 중의 한 사람이었다. 안회(顔回)는 안연(顔然)으로도 불렸는데 공자가 가장 사랑한 제자였다. 공자가 노나라의 애공과 대화하던 도중이나 노나라의 실권자였던 계강자와 대화하던 중에 안회라는 자신의 제자가 ‘호학’(배움을 좋아함)하는 사람이라고 자랑할 정도였다.
일(一)은 수의 시작(數之始)이다. 열(十)은 수의 끝(數之終)으로 이해된다. 안회가 하나를 알면 열을 안다는 것은 결국 무엇을 배우든지 그 시작만 되면 끝까지 꿰뚫어 안다는 의미였다. 자공은 안회를 칭찬하였다. 하지만 자신에 대해서는 하나를 알면 둘, 다시 말하면 어느 하나를 알아야 그것을 통해서 그 다른 것(둘)을 아는 수준의 사람으로 평가하였다.
공자가 자공에게 안회와 비교하여 물은 것은 자공이 스스로를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알아보기 위함이었다. 공자의 이 물음에 대하여 자공은 지체 없이 자신은 안회와는 견줄 수 없는 미비한 존재라는 것을 인정하였다. 자공은 솔직하고 용기 있는 사람이었다. 공자가 자공의 그러한 자세를 인정한다고 한 것은 실은 자공의 자세에 대한 칭찬이기도 하였다.
공자는 생이지지(生而知之), 학이지지(學而知之), 곤이지지(困而知之)를 말하였다. 태어나서 안다는 것은 공자와 같은 성인의 수준이다. 그다음은 문일지십의 수준이다. 비록 생이지지만은 못하지만, 문일지십(聞一知十)은 학이지지(배워서 앎에 이르게 됨)나 그 이하의 배움보다는 나은 배움의 단계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안회라 하더라도 단번에 문일지십의 수준으로 성장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분명히 안회 역시 생이지지의 자질이 아니라면 그 시작은 문일지이(聞一知二)나 학이지지 또는 곤이지지(고생해서 앎에 이르게 됨)의 수준에서 시작했을 것이다. 보통의 배움 수준으로는 하나를 알게 되면 그것을 바탕으로 그와 관련되는 다른 또 하나를 배우는 단계를 거쳐 가기 마련이다. 자공은 분명히 자신의 자질이 안회만 못함을 인정하였다. 하지만 그는 안회를 질투하지 않았고, 그렇다고 자신을 비하하지도 않았다. 자공이 안회를 인정했다는 것은 그가 타인의 훌륭함을 본받아 언젠가는 그 훌륭함을 따라갈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지고 있었음을 말해 준다. 그는 자신의 수준에 맞게 문일지이의 수준에서 시작해서 문일지십의 수준으로 나아가려 했던 것이다. 자공과 안회의 배움의 과정은 사실 오늘날도 모든 배움의 세계에서 일어나야 하는 일이다.
그리스도인들이 본받아야 할 것도 이것이다.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의 말씀을 실천하는 과정에서 각자에 따라 천차만별일 수 있다. 서로 간에 얼마든지 차이가 날 수 있다. 이때 중요한 것이 상대의 뛰어남을 인정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실천하고 매사에 열정을 가지고 사는 사람, 어떤 일을 당해도 실망하지 않고 끝까지 밀고 나가는 사람을 인정해야 한다. 동시에 자신의 삶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 하나하나를 통해서 그 의미를 깨닫고 그다음에 일어날 일들을 배워가려 해야 한다. 철저하게 하나하나를 거치면서 또 다른 하나하나를 배워가야 한다. 그리스도인이 한 번에 성령의 은혜를 통해 갑자기 변화되려고 해서는 안 된다. 대신에 일상의 삶 속에서 마주하는 일들을 경험하며 마침내 모든 만물의 끝을 깨우치는 단계로 거쳐 가야 한다. 아마도 선한 그리스도인에게 그 종국은 결국 성스러운 죽음일 것이다. 그렇다면 오늘 하루의 일을 통하여 겸손히 배우고 비워가는 삶도 함께 익혀가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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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프로필 글쓴이 : 문태순 (교육학 박사 백석대 전임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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