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예수교장로회연합회 교회동역자협회  

학술

 
작성일 : 17-11-07 21:59  기사 출력하기 글쓴이에게 메일보내기
 

니체의 비극: 쓸쓸한 여우와 고독한 백호(白虎) 사이에서


“강력한 사회, 정부, 종교, 여론이 있는 곳에서, 즉 전제 정치가 지배하는 곳에서, 고독한 철학자는 증오의 대상이었다. 왜냐하면 철학은 인간에게 어떤 전제 정치가 침입할 수 없는 피난처, 내면의 동굴, 가슴의 미로를 열어주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이 독재자들을 격분시킨다. 고독한 사람들은 거기에 숨는다.” (프리드리히 니체, 니체전집 KGW III 1, 『비극의 탄생·반시대적 고찰』, 이진우 옮김, 『반시대적 고찰 III: 교육자로서의 쇼펜하우어』, 서울: 책세상, 2005, 410쪽.)

시대의 역류문(逆流文) 『반시대적 고찰』(1874년) III장에 나오는 니체의 말이다. 19세기 말 전체주의가 점점 유럽 사회를 지배해 갈 때 니체는 정치적 저항을 독특한 방식으로 전개하고 있다. 전제군주의 칼끝이 맥없고 고독한 철학자에게 향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일반적 독재자라면 그냥 그 힘없는 철학자를 내버려둬도 아무 상관이 없을 것이다. 그런데 니체는 독재자에게 가장 거슬리는 자가 고독한 철학자라고 한다. 그 이유를 위 본문에서 밝혀준다. 철학자는 전제 정치가 침범할 수 없는 내면의 힘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무엇이 철학자의 내면적 힘일까?

시대를 거역하는 ‘반시대적 고찰’을 하는 니체에게 무엇도 예외는 없다. 그렇기 때문에 전통 철학자를 거역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래서 니체가 말하는 철학자는 일반적으로 말하는 의미와 다른 뜻을 담고 있다. 니체가 1886년에 발간한 『선악의 저편』에는 부제로 ‘미래철학의 서곡’이라고 씌어 있다. 이 제목으로 연상해 보면 철학자는 선과 악을 넘어서는 사상가다. 고정된 절대적 선악을 인정하지 않고 고정불변의 진리도 거부하는 자가 철학자다. 이는 시대를 거부하는 반(反)시대적 사유를 한다는 말과도 통한다. 전제군주가 조작한 통치 이데올로기를 이용하여 독재정치를 강화하고자 할 때, 어떤 종류의 시민이 그를 가장 분노하게 할 것인가? 이에 대해 니체는 ‘고독한 철학자’라고 답한다.

니체가 원하는 철학자는 고정된 선과 악을 정면에서 맞서는 자다. 그리고 그것을 실현하되 그 역시 자기 방식의 선과 악을 포기해야 하는 자다. 한마디로 니체가 바라는 고독한 철학자는 자기모순적이며 비극적인 인간이다. 고정된 선과 악을 파괴하기 위해 무수한 희생의 대가를 치르고 목표에 도달했지만, 자신이 성취한 그것 또한 가능한 빨리 파괴되기를 원하는 자이어야 한다. 또한 자기모순을 자처할 수밖에 없으며 그 손아귀에는 획득한 것 없이 항상 비워놓아야 하는 비극적 결말을 준비하는 자이어야 한다. 모든 시민의 몸과 영혼을 자기 손아귀에 거머쥐고자 하는 독재자와는 정반대의 삶을 살아가는 그 시대의 반항아가 바로 고독한 철학자다. 극한의 상황에서 혹은 최후의 종말을 맞이하면서도 고독한 철학자는 자기생명을 보존하고자 하는 것도 사치로 여기는 비극의 아이콘이고자 한다.

니체가 추천하는 이러한 고독한 철학자 이미지에 니체 철학의 핵심 개념인 ‘권력의지’를 함께 생각해 보면 고독한 철학자는 더 무서운(?) 철학자 괴물이 된다. 왜냐하면 권력의지의 특징은 끝없는 상승욕구이기 때문에 자기 비극을 자처하면서 기존의 모든 권력체계를 전면적으로 거부하기 때문이다. 동시에 어떠한 비극적 종말 앞에서도 쾌활함을 잃지 않고 친절을 유지하고자 하는 미덕을 지키려고 하기 때문이다. 독재자가 비록 그 명줄을 끊는다고 해도 결코 독재자가 이겼다고 할 수 없는 상황을 만드는 자가 비극의 철학자, 고독한 철학자이기 때문이다. 자기 내면에서 모든 것을 긍정함으로써 주어진 운명을 극복하고자 한다. 단칼에 소멸하는 운명이지만 그 순간 새롭게 만들어진 자아 창조의 힘을 ‘잠시’ 경험하면서 자기 운명을 수용하는 자가 고독한 철학자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고도의 정치행위(?)를 자처해서 자기 길을 가려는 고독한 철학자를 독재자는 얼마나 증오하겠으며 엄벌에 처하고 싶을 것인지 충분히 이해하고도 남는다. 죽였지만 결코 끝나지 않은 상황, 오히려 독재자가 이겼지만 자기 패배감에 휩싸이게 하는 자가 바로 설산일수록 더 위용 있는 백호(白狐)와 같은 고독한 철학자다.

니체의 생각을 어느 정도 따라가 보았다고 하자. 니체는 이렇게 확신을 가지고 주장했을지 모르지만 그것이 무엇으로 구체화할지 여전히 무책임하다. 책임을 묻는 것은 권세를 손에 쥔 독재자와 같은 야비한 전략적 측면이 있다고 하지만, 이왕 고독을 미덕으로 생각한 자가 니체이며 쓸쓸하게 쥐구멍이나 뒤지는 여우와 같은 자가 니체가 아닌지라, 시대를 거슬러 니체가 가고자 했던 유한한 한 피조물의 몸부림의 진정성이 무엇인지 머물러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참으로 혁명적인 발상이다. 처절한 비극으로 생을 마감하면서도 그것이 어떤 독재자의 힘보다 강하고 숭고하기까지 한 발상을 하니 말이다.

그런데 니체의 이러한 천재적 통찰과 상상력은 니체의 죽음 한 세기 이후 그렇게 선명하지도 않고 그의 요구에 그렇게 열광하지도 않는다. 왜냐하면 이러한 니체의 생각이 짐작했던 것과는 다른 방향으로 문화의 매우 다양한 발산이 일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니체의 고독한 철학자 이미지는 그 의미를 더 깊이 이해하는 만큼 비극은 자처할는지 몰라도 비극의 답은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고민 끝에서 우리는 잠시 주 예수 그리스도의 ‘고독’ 속에 빠져보자. 처참하게 당할 십자가의 고문과 죽음을 준비하면서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 아버지가 정하신 불변의 뜻과 핏방울 같은 땀에 젖는 신체에서 고독의 의미가 무엇인지 그 해답과 정답을 주고 계셨다.

42 가라사대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어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시니 43 사자가 하늘로부터 예수께 나타나 힘을 돕더라 44 예수께서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피방울같이 되더라(눅 22:42~44).

글쓴이 프로필
글쓴이 : 박홍기 박사 (주필 철학박사)
이메일 : jayouda@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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