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예수교장로회연합회 교회동역자협회  

학술

 
작성일 : 18-07-25 20:46  기사 출력하기 글쓴이에게 메일보내기
 

철학자 니체에게 ‘선한’ 신 : 삶에 기여하는 신!


“신을 매장하는 자들의 시끄러운 소리가 들리지 않는가? 신의 시체가 부패하는 냄새가 나지 않는가? 신들도 부패한다! 신은 죽었다! 신은 죽어버렸다! 우리가 신을 죽인 것이다! 살인자 중의 살인자인 우리는 이제 어디서 위로를 얻을 것인가? 지금까지 세계에 존재한 가장 성스럽고 강력한 자가 지금 우리의 칼을 맞고 피를 흘리고 있다. 누가 우리에게 이 피를 씻어줄 것인가? 어떤 물로 우리를 정화시킬 것인가? 어떤 속죄의 제의(祭儀)와 성스러운 제전(祭典)을 고안해내야 할 것인가? 이 행위의 위대성이 우리가 감당하기에는 너무 컸던 것이 아닐까? 그런 행위를 할 자격이 있으려면 우리 스스로가 신이 되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이보다 더 위대한 행위는 없었다. 우리 이후에 태어난 자는 이 행위 때문에 지금까지의 역사보다도 더 높은 역사에 속하게 될 것이다!”(Friedrich  Nietzsche, 『즐거운 학문』, 니체전집12(KGW V 2), 안성찬·홍사현 옮김, 서울: 책세상, 2005, 200~201쪽) 

위의 내용은 책 제목과 잘 어울리는 내용이 아니다. 신이 썩고 있는 냄새가 나고 있다는 사실을 폭로하는 학문이 즐거울 수만은 없을 터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신을 죽이고자 했던 자들에게는 신이 죽어서 썩고 있는 현장은 얼마나 즐겁겠는가. 썩는 신은 애초부터 신이 아니었다는 말이다. 무한히 지속하는 존재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유한한 존재였다. 그런 존재를 절대적인 존재로 착각하며 신봉(信奉)해 왔다는 어리석음을 한탄하지만 동시에 어디서 위로를 얻어야 할지 모르는 상황이다.
서양 기독교의 신은 조작된 신으로 보는 니체는 인간을 ‘살인자 중의 살인자’라고 한다. 인간들끼리 서로 죽고 죽이는 것에 멈춘 것이 아니라 최고의 존재 신까지 죽인 괴수 중의 괴수, 강도 중의 강도, 살인자 중의 살인자가 바로 인간이다. 그런데 이제까지 가장 거룩하고 전지전능한 자라고 믿었던 존재를 살해한 인간은 다른 인간을 죽였을 때보다 더 심한 죄책감에 사로잡힌다. 왜냐하면 신을 죽였으니 더 이상 자신의 죄를 씻어줄 존재가 없기 때문이다. 죽여서 무덤까지 만들고 그 무덤에 십자가까지 꽂았으며 그 썩는 냄새까지 진동할 정도의 살인에 완벽하게 성공했는데, 문제는 그러한 인간 자신의 살해를 씻어주고 용서해 줄 신이 없다는 사실에 살해자 인간은 다시 놀라고 있다.     
그리고 고민에 빠진다. 신의 이름으로 온 나사렛 예수를 잔인하고 처참하게 죽인 유대인들처럼 신을 죽인 자들은 자신의 극악무도함을 어떻게 변명할지 자기 위로의 장치를 만들고자 고민에 빠진다. 어떤 속죄의 제사를 드려야 신을 죽인 양심의 가책을 면할 수 있을지 신을 죽이고자 계획할 때보다 더 정교한 장치가 필요함을 느낀다. 어떻게 그렇게 위대한 신을 죽일 수 있었는지 자신의 위대함에 자신도 놀라며 동시에 다음과 같은 질문으로 결론에 이른다. ‘우리 스스로가 신이 되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신을 죽인 인간이야말로 진짜 신이었다는 사실에 자신도 놀란다. 진짜 신이 인간이고 죽인 신이 가짜인데 마치 진짜처럼 행세하는 가짜 신을 죽여버린 셈이다. 그러면서 니체는 이렇게 예감한다. ‘우리 이후에 태어나는 자들은 우리가 가짜 신을 죽인 진짜 신임을 확인하면서 지금까지 지나온 어떤 역사보다 더 높은 위대한 역사를 맞이할 것이다!’
이 글이 발표된 1882년 무렵 독일을 비롯한 유럽 전역에서 종교개혁 전통의 신학은 그야말로 무덤으로 향하고 있었다. 성경권위는 추락하여 성경은 어떤 근거도 없는 잡다한 문서들이라는 판정이 내려지고, 천 년 이상 신의 존재에 대한 증거물처럼 보였던 교회의 십자가는 신의 무덤 표시가 되어 버렸다. 사회적 혼돈상황에서 민중을 올바르게 이끌어준다고 믿었던 종교지도자들은 어떤 인간들보다 더 무능하고 부패하고 교활하게 행동하는 것에 ‘속았다’는 분노가 유럽을 휩쓸고 있었다. 유럽인들의 결론은 누군가 ‘절대진리와 절대자인 신은 애초부터 조작된 것이다’라고 공식적으로 선언해 주기를 하나같이 목 놓아 기다리고 있을 무렵이었다. 그 선언을 화려한 언어 구사력으로 확증해준 인물이 바로 루터교 목사의 아들 천재적 통찰의 프리드리히 니체였다.
그런데 이 중대한 선언이 앞으로 확증되어 유럽 전역으로 확산할 상황을 내다보면서 니체는 자신이 너무 일찍 왔다고 한다. 스스로 예언자임을 자청하고 있으며 그의 말대로 1900년 니체의 죽음 이후, 제1차와 제2차 세계대전에서 인간의 인간에 대한 수천만 명의 학살을 겪으면서 신학은 인간 삶에 별 소용이 없는 무용지물이 된다. 신이 존재한다면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는지를 물으며 신의 존재를 니체의 예언처럼 철저하게 부정하게 되었다. 수천만 명의 인간을 죽인 것이 아니라 별 소용없는 신의 존재를 수천만 번 죽이고 또 죽인 것이 니체가 예언한 참혹했던 역사가 20세기를 시작하는 유럽과 인류의 역사였다. 이러한 신의 무용론이 확산되는 역사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니체의 말처럼. 그는 이 상황에 대해 이렇게 예견했다. “나는 너무 일찍 세상에 나왔다. 나의 때는 아직 오지 않았다. 이 엄청난 사건은 아직도 진행 중이며 방황 중이다. 이 사건은 아직 사람들의 귀에 들어가지 못했다.”(앞의 책, 201쪽)
하지만 니체의 죽음 백 년을 훨씬 지난 이제는 수천만 번 신을 살해하고 또 살해한 증거와 증언은 차고 넘친다. 절대진리도 없고 절대자도 없다는 증거가 인류에 의한 인류의 대학살이 되어 버린 셈이다. 결코 즐겁지 않은 이러한 통찰을 예견한 니체는 역시 인간을 사랑할 수밖에 없는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철학자다. 그래서 ‘우리 스스로가 신이 되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하고 권한다. 우리가 믿었던 신도 우리가 만들어서 섬긴 우상이었다. 그렇다면 우리가 우리에게 필요한 신을 조심해서(?) 다시 만들어보라고 조심스럽게 권한다. 신을 잘못 만들어서 인간만 손해를 보기 때문에 만들지 않을 수는 없으나 신을 만들되 신중하게(?) 만들라고 권한다.
인간의 종교적 심리에 묻어 있는 헛된 종교적 열망에 대한 니체의 통찰은 가히 천재적이다. 인간이 조작한 신을 더 이상 신뢰하지 못하고 이 교회 저 교회 떠돌거나 아예 더 이상 교회를 찾지 않는 한국 교회 성도들의 처지를 생각하면 우리는 니체가 예언한 범주에 들어간다. 삶에 기여하는 신을 니체가 만들어보라고 제안했지만 아마 니체는 그것이 어떤 일보다 불가능하다는 것도 아마 직감했을 것이다. 니체의 예리한 통찰이 더 깊어지면 질수록 우리 스스로는 어떤 신이 삶에 기여하는 존재일지 그 고민만 깊어진다. 니체의 말을 따르면, 분명한 사실은 또다시 신을 죽여야 또다시 신을 창조할 수 있다. 살인자 중의 살인자의 운명을 벗어날 수 없다는 것, 이것만은 분명하다. 왜냐하면 인류 시조는 생길 때부터 신이 되고자 했기 때문이다.

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보라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 같이 되었으니 그가 그의 손을 들어 생명 나무 열매도 따먹고 영생할까 하노라(창 3:22~24).

글쓴이 프로필
글쓴이 : 박홍기 박사 (주필 철학박사)
이메일 : jayouda@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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