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05월 28일 (목) 

> 학술 > 철학 > 성경신학으로 보는 니체 평설 〈9〉
기사공유 작성일 : 20-03-01 08:48  글자크기 크게글자크기 작게 기사 출력하기글쓴이에게 메일보내기
플라톤 저서의 체계화와 성경 권위에 대한 도전
이데아론은 매우 경이로운 것이어서 칸트의 관념론을 위한 매우 값진 준비가 됩니다. 이데아론에서는 신화를 비롯한 모든 수단이 동원되어 물자체와 현상의 올바른 대립에 대한 가르침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이와 함께 좀 더 심오한 모든 철학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더욱 심오한 철학에서는 육체와 정신의 통상적 대립이 먼저 극복되어야 합니다.

스위스 바젤대학 고전문학 교수 니체(Friedrich Nietzsche, 1844〜1900)의 말이다. 플라톤(Platon, 주전 428〜338)과  칸트(Immanuel Kant, 1724-1804)를 관통하면서 니체가 강조한 핵심은 이데아론의 경이로움이다. 세계와 인간을 이해하는 전형적 틀이 이원론(二元論)이다. 이원론은 사물을 서로 대립하여 이해하는 방식으로, 가령, 감각 기관(안이비설신, 眼耳鼻舌身)을 통해 인식하는 대상인 ‘현상’과 감각 기관을 넘어서 존재하는 대상인 ‘본질’로 양분한다. 정신과 물질을 서로 대립시키기도 하며, 창조물과 피조물, 이승과 저승, 선과 악, 진과 위, 미와 추 등등으로 분리하기도 한다. 이원론은 세계와 인간을 이해할 때 필연적으로 경험할 수밖에 없는 인간 인식의 근본 조건이다.

니체는 2천 년 이상의 시간적 간극이 있는 두 철학자를 이원론 전통 속에서 연결하고 있다. 그의 말대로 철학에서 경이로움이라면 플라톤이 이데아론의 체계로 수립한 이원론을 2천 년 훨씬 지나 칸트가 ‘사물 그 자체’(본질)와 현상이라는 이원론적 관념론으로 완성한 사건이다. 그런데 젊은 문헌학자 니체는 플라톤과 칸트를 중심으로 하는 이원론 중심의 서양 철학 전체를 문제 삼고 있다. 두 철학자는 니체가 보기에 ‘심오한 철학’을 방해한 자들이다. 니체의 말대로 심오한 철학은 육체와 정신의 대립을 극복하는 데서 출발한다. 니체의 이러한 문제의식은 개별 철학자들에 대한 단순 비판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의 철학적 생애 전체를 육체와 정신 이원론을 극복하는 싸움에 몰두하게 한다. 이러한 작업을 니체는 우선 플라톤 저서에 대한 체계화 작업을 시도했던 사례들을 비판적으로 검토하는 데서 시작한다.

니체가 보기에 저술가로서 플라톤은 미학자나 예술가가 아닌 ‘산문의 거장’(앞의 책, 32)이다. 막힘 없이 모든 지식을 자신 있게 저술한 소크라테스의 으뜸 제자로서 당대 최고로 완성된 교양인이었다. 그러면서 플라톤은 자신의 산문적 글쓰기를 통해 아테네 시민을 선동하는 정치가의 면도 보인 철학자라는 것이 니체의 평가다. 그리고 그가 세운 교육 기관인 아카데미아에서 플라톤은 자신의 동지들이 말싸움에서 강해지기 위함이 글쓰기의 목적이라고 강조했다. 여기서 니체의 관심은 플라톤의 많은 저작의 ‘상호연관성’에 주목한다. 플라톤이 주장한  ‘이데아론’이 진리라고 한다면, 우선 그의 모든 저술이 내적으로 상호 연관성을 지녀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 이에 대한 관심을 보인 철학자로 니체는 ‘슐라이어마허(Friedrich [Ernst Daniel] Schleiermacher, 1768〜1834)’를 주목한다. 근대자유주의 신학의 아버지로도 알려진 슐라이어마허는 나름대로 플라톤 저작의 논리적 연관성인 ‘유기적 구조’를 기획한다. 마치 성경 66권을 논리적 일관성을 띤 하나님의 말씀으로 확증하여 단일한 진리 체계를 수립하고 나아가 하나의 통일된 의미를 만들어내야 하듯이(www.ibt.or.kr 참조), 플라톤의 이원론 완결이 가능하다면 무엇보다 플라톤 저작의 내적 통일성 기획은 필수이며 반드시 명확한 답을 내놓아야 하는 최우선 작업이다.

니체는 슐라이어마허에 대해 ‘헤겔과 마찬가지로 실패한 문장가’(앞의 책, 34)로 평가하면서 슐라이어마허가 강조한 것에 주목한다. 즉 글쓰기가 의미 있지만 동시에 한계를 지니고 있다는 지적이다. 말로 지식을 전달하는 과정은 ‘진지한’ 반면 글을 써서 전달하는 것은 고상하고 훌륭하지만 ‘유희(遊戲)’이며 건망증을 대비한 기억의 수단이며 저장 장치에 불과하다고 한다. 이러한 문제의식을 가지고 슐라이어마허는 플라톤의 저서를 ‘주저(主著)’와 ‘부저(附著)’로 크게 양분한다. 플라톤의 저술 목적에 대해 슐라이어마허는 “이미 교육된 자와 가르침을 받은 자들의 기억을 불러일으키는 데 있을 뿐이다.”(앞의 책, 38)고 평가한다. 이로써 보면 플라톤의 저서는 현상 세계를 초월한 관념적인 ‘이데아’에 도달하도록 하기 위한 사다리와 같은 체계라고 할 수 있다.

잠시 우리는 니체의 기록을 통해 18세기 중엽부터 19세기 중엽까지 전개되는 독일 문헌학의 분위기를 살펴보았다. 플라톤이 본래 의도한 바를 아는 것은 쉽지 않다. 왜냐하면 슐라이어마허 당대에 여러 학자들이 플라톤 저서의 목록을 나름대로 분류하는 작업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어떤 체계가 진짜 플라톤 사상을 대변하는지 결정하기란 결코 쉽지 않다. 그런데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확인하고 믿고 살아가려는 성도들에게 그 당시 독일 문헌학과 철학의 상황은 중요하게 시사하는 바가 있다. 칸트의 이원론적 인식론은 이후 하나님의 존재 증명과  성경계시의 절대성을 문제 삼게 한다. 그리고 하나님의 존재의 유일한 안내서인 성경의 권위도 인간의 합리적 이성에 의해 검사를 받아야 하는 지경에 이른다. 그래서 성경에 대한 고등비평을 열어주는 결정적 계기가 된다. 슐라이어마허는 플라톤의 저서를 임의로 배열한 방식을 성경에도 그대로 적용하여 성경이 신적 권위의 말씀을 가진 절대 진리가 아니라 인간의 ‘의식’에서 임의로 만들어낸 창작물이라고 보았다. 그리고 기독교라는 종교는 인간의 의식에서 비롯한 ‘절대에 대한 의존 감정’에 지나지 않는다고 결론 내린다.

니체를 통해 잠시 살펴본 플라톤, 칸트, 슐라이어마허 그리고 니체 자신도 포함하는 서양 철학의 전통은 처음부터 ‘성경 권위’와의 대결을 준비하고 있었다는 암시도 받게 된다. 하나님의 아들로 인간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신 주 예수 그리스도의 다음과 같은 구약성경에 대한 간명한 요약을 보면서 성경 권위에 대한 확신과 수호 전파의 소망을 다시 한번 자극 받게 된다. 이보다 더 간명한 영원한 진리에 대한 요약이 있을 수 있을까!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연구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니라(요 5:39) 

그가 언어의 천재인 이유는 서양 문법을 근본적으로 문제 삼고 서양 문법으로 수천 년 진행되었던 서양 중심적 진리론을 토대부터 흔들어 놓았기 때문이다. 니체 사상 초기 과목은 고전학이었으나 그 작업은 헬라어 전통으로 수립된 서양사상의 전달 수단인 문법을 새롭게 보았기 때문이라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문법이 먼저인지 인간의 사유가 먼저인지 적어도 니체 이전에는 큰 문제로 삼지 않았다. 청년 니체는 인간이 사용하는 인위적 문법이 인간의  사유를 뿌리부터 지배하고 있다는 가히 혁명적이며 충격적인 발상을 전개한 것이다.

우선 앞서 인용한 니체의 명제를 살펴보도록 하자. 인도유럽어족에서 가장 중요한 특징은 반드시 ‘주어(subject)’가 있어야 한다. 그래서 ‘비인칭주어’ 혹은 ‘가주어(假主語)’라는 주어도 있다. ‘가주어’는 주어의 효력은 없지만, 형태로는 주어인 그야말로 ‘가짜 주어’라는 말이다. 그런데 이러한 주어는 모두 이미 서술어(predicate)를 전제한다. 중학교에서 영어를 처음 배울 때 ‘문장의 5형식’으로 시작했던 기억을 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5형식 문장에서는 ‘주어-동사’의 구조가 기본이었다. 필자의 기억으로는 ‘be’가 왜 동사인지 이해하기 어려웠던 기억이 난다. 자동사로는 ‘존재하다’는 뜻이라고 하고 불완전동사로는 ‘~이다’라는 설명을 들었을 때 난감했던 기억도 있다. ‘존재하다’는 뜻과 ‘~이다’는 전혀 다른 뜻인데 어떻게 같은 단어에서 이렇게 다른 뜻이 나올 수 있는지 궁금했지만 더 이상 문제 삼지 않고 성적을 위한(?) 영어 공부에 최선을 다했던 기억도 난다. 대학에 들어가 ‘언어철학’ 수업을 들으면서 인도유럽어족의 문법 구조와 인간의 의식 구조와 활동의 관련성을 들을 때 의문이 해소되기 시작했다. ‘동사’라는 말보다 주어에 대해서는 ‘서술어’가 더 타당함이 분명하다. 서술어는 주어를 전제하며 주어의 동작이나 특성 혹은 상황을 풀어주는 기능을 한다. 이러한 내용이 우리가 배우는 서양 문법의 핵심이다.

니체의 모국어 독일어도 앞의 문법을 그대로 따른다. 그런데 앞의 인용에서 보았듯이 니체는 ‘주어-서술어’ 관계가 ‘주체-속성’의 범주(範疇, category)보다 앞선다고 한다. 그 이전까지는 후자가 분명하기 때문에 전자의 문법을 사용하게 되었다고 했다. 주체와 속성의 관계에서도, 주어와 서술어의 관계처럼, ‘속성(屬性, 사물의 본질을 이루는 특징이나 성질)’은 우선 ‘주체(主體)’를 전제한다. 그런데 주어(主語)가 아니라 ‘주체(主體, subject)’가 되면 뜻이 완전히 달라진다. 주어라고 하면 그 지칭하는 바의 실재(實在)가 있는지 없는지 문제가 되지 않는다. 하지만 ‘주체’라고 하면 문법적 주어(subject)는 이제 ‘실재하는 그 무엇’ 즉 현상 이면에 있는 시간을 초월해서 존재하는 ‘본질(本質, essence)’이라는 뜻이 된다. 이러한 구도를 만들면 문법의 주어(subject)는 단지 본질(essence)을 담는 수단이 된다. 다르게 말하면 문법적 주어가 가능하기 위해서는 그 이전에 알 수는 없지만, 신과 같은 그 어떤 ‘본질’이 있어야 한다. 가령 ‘I am a pastor.’라고 할 때, 문법적 주어로는 단지 ‘I’만 있으면 아무런 문제가 없다. 하지만 ‘I’를 ‘주체’라고 하면 ‘I’라는 ‘본질’이 있느냐 하는 문제가 생긴다. 가령 이러한 문제가 발생한다. 문법적 주어로서 ‘I’는 분명히 있지만, 본질로서 불변의 ‘I’가 과연 있느냐 하는 문제가 그것이다. 다른 예를 들어보자 ‘God is love.’라고 할 때, 문법적으로 보면 완전한 문장이다. 하지만 주체와 본질의 문제로 접근하면 주어 자리에 위치한 ‘God’이 과연 있느냐 하는 문제가 발생한다. 그런데 만약 ‘God’이 ‘없다면’ 문장의 주어 자리에 ‘God’을 사용하는 것은 난센스(nonsense), 언어도단(言語道斷)이 된다.

젊은 고전학 교수 니체는 바로 이러한 문제를 염두에 두고 기존의 발상을 뒤집어 버린 것이다. 신과 같은 불변의 본질이 있기 ‘때문에’ 문법상 주어가 자리 잡는 것이 아니라, 문법 구조를 주어-서술어 구조로 관습적으로 사용한 결과 마치 항상 주어(subject/ 독일어는 Subjekt)가 있듯이 ‘불변하는 그 무엇(essence/독일어는 Substanz)’이 있는 것처럼 착각하고 그 착각이 고착화 되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주어가 항상 있어야 언어 활동이 가능하듯이, 주어와 같이 영원한 본질이 항상 있어야 인간의 ‘생각’이 가능하다는 가설(假說)과 억측(臆測)이 진실처럼 굳어져 버렸다는 것이다. 그래서 주어가 항상 있으므로 인간 내면에는 변하지 않는 영원한 실재-서양 사상에서는 대표적으로 그것은 ‘신(神)’이었다-도 항상 있다는 확신을 하게 되었다. 이러한 사상을 ‘본질주의’ 혹은 ‘실체주의’라고 한다. 니체는 바로 이러한 주장을 착각이며 조작이며 허구라고 비판한다. 

니체에게 인간의 문법이란 자기 생존을 유지하기 위한 표현상의 인위적 규칙인 것처럼 인간이 사용하는 모든 언어도 단지 인간의 생존 본능을 충족시키는 표현 수단일 뿐이다. 주어 자리에 ‘신’이라고 하든, ‘불변의 실체’라고 하든, ‘영원한 존재’라고 하든 그 모든 것은 단지 자기 생존을 위해 만들어낸 허구일 뿐이며 수사학적 기법의 결과이다. 종교에서는 ‘신’, 도덕에서는 ‘양심’, 정치에는 ‘정의(正義)’, 경제에서는 ‘가치(價値)’라는 말들이 핵심으로 자리 잡고 있는 듯 강조하지만, 니체에 따르면, 그것은 모두 존재하지 않는 허구이며 표현 기법상 조작된 허구이며 은유적 표현일 뿐이다. 때로는 정확하게 말하려고 하고, 때로는 화려하게 또 때로는 격한 논쟁을 한다고 하더라도 달라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으며 어차피 그러한 다양한 표현 방식들은 자기 생각을 타인에게 설득하여 강요하며 자기 생존을 보장받기 위한 도구 이상 이하도 아니다. 이렇게 고전학으로 자신의 학문 여정을 시작하면서 처음부터 철학적 문제에 몰입했던 젊은 교수 니체는 스스로 말했듯이 서양 사상을 뒤집는 ‘다이너마이트’가 되고 있었다.


<189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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