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07월 10일 (금) 

> 학술 > 철학 > 기독인의 동양사상 맛보기
기사공유 작성일 : 20-05-21 19:58  글자크기 크게글자크기 작게 기사 출력하기글쓴이에게 메일보내기
자로, 실천의 대명사
子路有聞 未之能行 唯恐有聞.
자로유문 미지능행 유공유문.

子貢問曰 孔文子 何以謂之文也.
자공문왈 공문자 하이위지문야
子曰 敏而好學 不恥下問 是以謂之文也.
자왈 민이호학 불치하문 시이위지문야.
논어 제5장 공야장의 계속이다. 해석은 다음과 같다.

“자로는 이전에 (선을) 들은 것을 아직 행하지 못하면 다른 도를 듣는 것을 두려워하였다.”

자공이 (공자에게) 물었다. “공문자는 어찌해서 시호를 문이라 했습니까?”
공자가 말했다. “영민하고 배우기를 좋아하여 아랫사람에게 묻기를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그래서 시호를 문이라 하였다.”

이 두 구절은 모두 선의 실천과 관계가 있다. 자로는 선을 들으면 바로 실행하려 하였다. 제대로 실천하지 못하면 그다음의 선함에 대하여 듣는 것을 두려워할 정도였다. 이전에 배운 선을 실천하지 못했는데 또다시 선을 듣게 되면 더욱 실천할 수 없을 것을 두려워해서다.
자공은 위나라의 대부(大夫)인 공문자가 왜 시호를 ‘문’으로 받을 수 있는지를 궁금해했다. 대체로 영민한 사람은 배우기를 좋아하지 않고 지위가 높은 사람은 아랫사람에게 묻는 것을 부끄러워한다. 그래서 덕스러움을 상징하는 ‘문(文)’이라는 시호를 받기 어렵다. 공문자가 문이라는 시호를 받은 것이 자공에게는 선하지 못한 일로 보였다.
사실 공문자(이름은 공어, 孔圉)는 태숙질(太叔疾)이라는 사람에게 그의 본처를 내보내고 대신에 그의 딸 공길(孔姞)을 시집보냈던 인물이다. 그 후에 태숙질이 자신의 처의 동생과 정을 통하자 공문자는 태숙질을 공격하였다. 태숙질은 공문자의 보복이 두려워서 송나라로 도망하였다. 이러한 전후 사정에 비추어보면 공문자가 ‘문’이라는 시호를 받을 만한 일을 한 것은 없어 보인다. 자공이 본문에서 의문을 제기한 것도 이 때문이다.

자로가 선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이를 바로 실천하지 못하면 괴로워했다는 것은 자로의 강직함과 정직함을 보여준다. 자로는 행함에 있어서 공자의 십철(十哲, 열 손가락 안에 드는 공자의 제자들) 중의 한 사람이었다. 자로가 선을 행했다는 데 대해서는 이의가 없었다. 다른 모든 제자들도 자로의 실천력을 인정하였다. 하지만 공문자의 경우는 다르다. 공자는 공문자가 비록 여러 부분에서 잘못된 일들이 있지만 학문의 영역에서 영민하고 배우기를 좋아했으며 그 배움을 위해 아랫사람에게도 묻기를 주저하지 않은 선한 행동의 측면을 인정해 주었다. 공자는 공문자의 경우를 예로 삼아서 제자들에게 사람을 평가할 때 그 사람의 나쁜 점 때문에 그 사람 전체를 나쁘다 하거나 그 사람의 좋은 점 때문에 그 사람 전체가 좋다고 하는 일방적인 평가를 경계하려 한 것이었다.

자로와 자공은 행함의 중요성, 또는 실천에 근거한 평가의 중요성을 보여주고 있다. 말만으로는 결코 안 된다. 말을 뒷받침하는 행함이 있어야 한다. 선을 행하지 못함을 근심할 정도가 되어야 한다. 다만 너무 지나치게 행함을 요구해서 어떤 사람의 선한 부분까지 사라지게 하는 것은 경계할 필요가 있다. 진정한 선을 기준으로 하여 선한 부분은 선하다고 인정하는 것을 배워야 한다.

그리스도인에게 자로의 선 실행의 결단은 가르치는 바가 크다. 오늘날 우리나라 그리스도인들은 선의 실천에 있어서 핑계 대기를 좋아한다. 자신이 선을 행하지 못하는 것에 대하여 갖은 구실을 만들어 변명하는 것이다. 그냥 실천하면 그만이다. 형제가 오 리를 가자 하면 십 리를 가라고 한 것은, 가지 않으려고 구차하게 핑계하거나 변명하는 것이 십 리를 가는 것보다 더 초라하기 때문이다. 지저분하게 핑계 대지 말고 호쾌하게 받아들여 형제 사랑의 실천을 보이라는 말이다. 자공의 의문은 그리스도인에게 어떤 상대가 밉다고 그 사람이 실제로 선한 일을 한 것에 대해서도 옹졸하게 모두 나쁜 일로 치부하는 것에 대해 경계할 것을 가르친다. 아무리 상대가 미워도 그 사람이 행한 선한 일이 진실로 모든 이에게 선한 일일 때는 기꺼이 그의 선함을 인정해야 한다. 인간은 모두 죄인이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합당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러나 오직 하나 그 사람이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를 믿는 것 그것 하나만 보시고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선하다 인정하신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을 진심으로 믿는 자, 하나님을 참 사랑하는 자를 선하다 인정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을 믿는 선함을 실제로 증명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그것이 그리스도인의 갈 길이다.

대한의 그리스도인이여! 선행을 결단하고 실천하자.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로 믿는 선한 마음으로 공부하고 선한 경제행위를 실천하자. 상대방의 참믿음을 선으로 인정하고 받아들이자. 자신의 선하지 못함을 솔직히 고백하고 고쳐나가자.
글쓴이 프로필
글쓴이 : 문태순 (교육학 박사 백석대 전임교수)
ⓒ (주)한국크리스천신문(http://www.kcnnews.net)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플라톤 이데아론의 한계와 허구
스물 여섯. 『기독교강요』와 『그리스도의 선택』
 
 
헤드라인
총회,교계뉴스
신학
성경바로알기
과학
철학
역사
사설
시론
칼럼
많이 본 기사
사무엘하 7장 1∼17절 여호와께
한국기독교교육학회 온라인 콜로
온 세상의 주인
현실성으로 나사렛 예수와 하나
전북극동방송 개국 1주년 기념
신문사소개    |    찾아오시는길    |    광고안내    |    광고신청    |    구독신청    |    기사투고    |    후원안내    |    후원자명단
등록번호 : 경기다01155   /   등록연월일 : 2009년 4월 14일   /   제호 : (주)한국크리스천신문
발행인 : 김혜영   /   편집인 : 이오현   /   청소년 보호책임자 : 김혜영
주소 : 461-370, 경기도 성남시 수정구 설개로 40 호크마하우스 4층 (주)한국크리스천신문
대표전화 : (031) 777-8092, 010-8385-0366   /   팩스번호 : (031) 777-8094   /   E-Mail : donald257@nate.com
Copyright ⓒ 2009 (주)한국크리스천신문.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