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예수교장로회연합회 교회동역자협회  

신학

 
작성일 : 17-07-30 20:06  기사 출력하기 글쓴이에게 메일보내기
 

고경태의 박사 논문 읽기-01


필자는 2007년에 총신대학교 일반대학원에서 서철원 박사의 지도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논문 제목은 “칼 발트와 존 칼빈의 예수 그리스도 이해 연구”였다. 10년이 지난 지금에 ‘칼 발트’는 ‘칼 바르트’ 연구자들이 검색할 때 검색되지 않기 때문에, ‘칼 바르트’로 전환해서 사용하려고 한다.
박사학위 논문 진행은 짧은 인생에 새로운 경험이었다. 가장 몰입했던 1년이라고 말하고 싶다. 논문을 심사하신 이상원 교수님께서 “후반부에 에너지가 고갈되었다”고 나의 지친 심정을 간파하셨다. 그 말씀이 아직도 귀에서 떠나지 않는데, 그것은 ‘필력(筆力)’의 부족이라고 느꼈기 때문이다. 지금도 글쓰기 능력, 필력이 부족해서, 글 쓴 뒤에 퇴고(推敲)를 잘하지 못한다. 필력을 향상시키는 것이 쉽지 않다. 그럼에도 꾸준한 독서, 사색, 글쓰기를 통해서 조금씩 진보한다고 생각한다. 칼 바르트에 대해서 연재를 <한국크리스천신문>에 기고하면서, 좀 더 체계적으로 바르트를 정리하는 계기를 갖겠다고 생각했다. 현재 필자는 칼 바르트의 『교회교의학, I/1』(박순경 역)을 간략하게 읽는 동영상을 소개하고 있기도 하다. 그러나 글을 쓰는 것과 말하는 것은 차이가 있다. 
10년 전 총신대학교 일반대학원에서 공부할 때, 바르트 신학에 대한 다른 의견이 있었다. 설득력 있는 주장은 “알고 비판하자”는 것이었다. 기차 안에서 만난 바르트주의자도 나에게 알지 못하고 싫어한다고 비판했다. 그 질문에 답변하지 못하고 기차에 내리고, 집에 들어가고 나서야 스스로 답했다. 그렇다면 “바르트주의자는 알고서 찬성하는가?” 모르고 비판하는 것과 모르고 맹종하는 것 어떤 것이 더 위험하고 바보스러울까? 바르트는 자신은 바르티안이 아니라고 했다고 한다.

과연 바르트는 누구일까? 바르트가 거목(巨木)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바르트를 정확하게 이해한 연구자가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연구자는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알지 못하고 수용할 것인가? 알지 못하고 거부할 것인가? 나는 알지 못하기 때문에 거부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알지 못하는 사상을 그냥 수용하지 말라고 경고한다. 그리고 알지 못하는 사상에 쉽게 덤비지 말라고 한다.
“나는 왜 바르트를 공부했는가?” 나는 성경에 대해서 관심을 가졌다. 석사 논문은 총신대학교 일반대학원에서 “칼빈의 성경 해석 연구”(2002년)였다. 성경 해석을 공부하면서, 우리나라에 번역된 많은 도서들이 바르트주의자의 것이라는 것을 알았다. 한국 신학자들이 긍정적으로 보는 유럽 신학자들이 바르티안이라는 것도 알았다. 해석학이란 분야가 매우 철학적이고 미로(迷路)로 들어간다는 것을 알았다. 그럼에도 성경 해석과 해석학에 도전하려고 마음을 먹었다. 박사과정에서 서철원 교수님과 동료들과 방학에도 꾸준하게 칼 바르트의 <교회교의학> 강독을 진행했다. 그리고 박사과정을 마쳤고, 논문을 쓸 주제를 잡지 못했다. 그러던 중에 나의 관심이 성경에서 ‘예수 그리스도’라는 주제로 전환되었다. 내가 “예수를 믿는 다는 것”이 매우 신비로웠고, 이것을 전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칼 바르트가 주장하는 예수 이해가 ‘인간 예수’라는 것을 강의 시간에 수 없이 들었다. 그런데 명료한 증명 과정이 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칼 바르트의 <교회교의학>에서 예수 이해에 대해서 탐구하기로 결정했다. 칼 바르트가 제시한 예수 그리스도 이해에 분명히 문제가 있을 것으로 생각했고,  <교회교의학>을 읽으면서 확인했고, 칼빈과 비교해서 논문으로 발표했다.
칼 바르트의 글을 일 년 넘게 혼자 독서를 했다. 혼자 독서할 때 교수님의 강독으로 독서할 때에 느낄 수 없는 망막함이 덮쳤다. 그럼에도 천천히 읽어가며 정리해 갔다. 그러면서 바르트가 정통 교리를 정면으로 거부, 해체하고 새로운 자기 체계를 세운 과정이라고 이해했다. 그래서 바르트의 신학은 신정통주의 Neo-Orthodoxy라고 하는데, 정통주의 Orthodoxy를 파괴하고 세운 체계이다. 그래서 필자는 반(反)-정통주의, Anti-Orthodoxy라고 규정했다. 바르트는 매우 조직적이고 세밀하게 정통신학을 거부하고 새로운 구조를 제안했다. 정통신학은 공교회의 신학이고, 신정통신학은 개인의 신학이다. 공교회의 가르침을 거부하고 개인의 가르침을 따르는 것은 자유이겠지만, 자유에 대한 책임도 당연하다.
필자는 예정 교리(이중예정)를 믿는 자로 택자에 주어지는 구원과 구원의 확증과 영생을 확신한다. 그런 확실한 체계에서 바르트를 비판하는 것이 어떤 유익이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바르트 연구가 성경 이해 증진이나 말씀 강단에 큰 유익이 없다고 생각했다. 학위를 취득한 뒤에 성경 읽기로 전환하려고 했다. 그런데 일 년에 한 번씩 바르트 비판에 대한 강연 섭외가 들어왔다. 가물에 콩 나듯 한 바르트 비평에 대한 이야기에서 관객들은 좋은 반응이 없다. 미력한 실력 때문일 것이다. 그럼에도 바르트에 대해서 비평을 진행하려고 하는 것은 피할 수 없는 나의 몫(분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던 중 또 <한국크리스천신문>의 제의를 받고 더 큰 의무를 느끼며 임하고 있다. 독자들이 바르트 신학의 위험성과 현대신학의 위험성을 인지하고, 성경 66권에 근거한 신학과 신앙생활이 이루어지길 바란다. 
칼 바르트 신학이 유럽에서 매우 보수적이라고 한다. 유럽에서 매우 보수적이면 대한민국이 매우 정당하게 수용해야 하겠는가? 우리 신학이 유럽과 미국에 빚진 것이 있는가? 우리는 피선교 국가로 성장해서 선교 강국인 유일한 지역이다. 한국 교회에 있는 빚은 오직 십자가의 은혜뿐이다. 영생의 복음을 소유하고, 그 진리를 세우고 정진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존재 이유이다. ‘복음’을 선포할 뿐만 아니라, ‘유사 복음’에 대해서 교회에 경고하는 일도 무게가 동등한 임무이다. 그래서 바르트에 대해서 박사 논문을 썼고, 매우 독특하게(?) 적극적으로 비평한 연구자로(희귀성) 소수자의 목소리를 발한다. 바르트를 비평하는 소수자로 보호받을지 의문이지만, 나에게 주어진 사명의 길을 묵묵히 걷고 있다.

다음부터는 미진한 박사 논문에 대해 간략하게 정리 요약을 몇 주간 전개하려고 한다. 그래서 먼저 필자의 박사학위 논문을 소개하고 이해 기반을 가지려고 한다. 그리고 다른 방면으로 칼 바르트 이해를 추구할 것이다.

글쓴이 프로필
글쓴이 : 고경태 목사 (주님의교회 / 형람서원)
이메일 : ktyhbg@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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