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예수교장로회연합회 교회동역자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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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6-02-11 09:00  기사 출력하기 글쓴이에게 메일보내기
 

종교 건축과 기독교 건축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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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본즉 그 숫양이 서와 북과 남을 향하여 받으나 그것을 당할 짐승이 하나도 없고 그 손에서 능히 구할 이가 절대로 없으므로 그것이 임의로 행하고 스스로 강대하더라 내가 생각할 때에 한 숫염소가 서편에서부터 와서 온 지면에 두루 다니되 땅에 닿지 아니하며 그 염소 두 눈 사이에는 현저한 뿔이 있더라 그것이 두 뿔 가진 숫양 곧 내가 본 바 강가에 섰던 양에게로 나아가되 분노한 힘으로 그것에게로 달려가더니 내가 본즉 그것이 숫양에게로 가까이 나아가서는 더욱 성내어 그 숫양을 땅에 엎드러뜨리고 짓밟았으나 능히 숫양을 그 손에서 벗어나게 할 이가 없더라 숫염소가 스스로 심히 강대하여 가더니 강성할 때에 그 큰 뿔이 꺾이고 그 대신에 현저한 뿔 넷이 하늘 사방을 향하여 났더라 (다니엘 8:4~8, 개역성경)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의 둘레는 약 4만 킬로미터이다. 이에 가까운 약 3만 5천 킬로미터를 진군하며 유럽·아프리카·아시아의 세 대륙을 정복한 인물이 있다. 그가 바로 다니엘서에 예언된 알렉산드로스 3세, 곧 알렉산더 대왕이다. 그는 스무 살의 젊은 나이에 왕의 자리에 올라 단 13년 만에 패배 없이 광대한 지역을 정복하며 수많은 도시를 손에 넣었다. 훗날 전쟁의 영웅으로 평가받는 나폴레옹, 율리우스 카이사르, 한니발 등은 알렉산드로스 3세를 자신의 롤모델로 삼을 정도였다.
그가 전쟁사에 남긴 상징은 오늘날에도 다양한 방식으로 재현되고 있다. 요격이 극히 어려운 러시아의 최신 전술 탄도미사일 체계 ‘이스칸데르(Iskander)’가 그 예이다. 이 명칭은 알렉산드로스(Alexandros)의 동방식 음역인 ‘이스칸다르(Iskandar)’에서 유래한다. 이슬람 전통의 한 해석에서는 꾸란에 등장하는 ‘둘 카르나인(نينرقلا وذ)’, 곧 ‘두 뿔을 가진 자’를 알렉산드로스 3세와 동일시해 왔다. 러시아는 이 명칭에 번개처럼 빠른 정복, 압도적 군사력, 그리고 막을 수 없는 일격이라는 상징을 담아 현대 무기 체계의 이름으로 명명하였다.
계속해서 알렉산드로스 3세의 최후와 그의 사후에 본격적으로 전개된 헬레니즘(Hellenism) 시대의 문화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페르시아 다레이오스 3세 최후

BC 330년 초 페르시아의 왕 다레이오스 3세는 마케도니아 군의 추격을 피해 고대 페르시아 수도의 하나인 엑바타나(Ecbatana)로 피신해 있었다. 그는 흩어진 군대를 재집결시켜 무너진 제국의 위신을 회복하고자 했으나, 이미 전세는 기울어 있었다. 마케도니아 군의 집요한 추격 속에서 다레이오스 3세는 만 명도 채 되지 않는 병력을 이끌고 도주할 수밖에 없었다. 이 소식을 접한 알렉산드로스 3세는 다레이오스 3세를 계속 추격하였다. 엑바타나에 도착한 그는 더 이상의 대규모 전투 가능성이 낮다고 판단하고, 아시아 원정 약 4년 만에 그리스 동맹군을 해산시켜 후한 보상과 함께 각자의 고향으로 돌려보냈다. 이후 그는 마케도니아 본군과 용병, 아시아 지역 병력을 재편성하여 다레이오스 3세를 추적하였다. 그리고 그는 다시 마케도니아, 그리스 본토, 아시아, 용병 등에 속한 군사들을 재편하여 다레이오스 3세를 찾아 나섰다. 그러나 다레이오스 3세는 반란을 일으킨 고대 중앙아시아 중심지 박트리아(Bactria)의 사트라프(satrap, 총독) 베소스에 의해 체포되어 살해당하고 말았다. 스스로 왕이 되려 했던 베소스는 곧 부하들에게 붙잡혀 알렉산드로스 3세에게 넘겨졌고, 엑바타나에서 페르시아 전통의 형벌에 따라 처형되었다. 알렉산드로스 3세가 이와 같은 방식의 처형을 택한 것은 자신을 다레이오스 3세의 복수자이자 페르시아 제국의 정통 계승자로 연출하기 위한 정치적 행위였다. 이는 페르시아 왕족과 귀족들에게 그가 새로운 지배자임을 각인시키는 상징적 장면이었다.

헬레니즘 세계와 인도 불교 간다라 미술 탄생, 신라 경주 불국사 석굴암까지 영향을 끼치다

알렉산드로스 3세의 군대는 계속해서 소그디아나(Sogdiana), 오늘날 우즈베키스탄 동부 사마르칸트(Samarkand))와 타지키스탄 일대 그리고 박트리아(Bactria) 즉 오늘날 아프가니스탄 북부 지역으로 원정을 이어갔다. 그런데 이 지역에서는 문화와 종교적인 모욕 그리고 경제적 착취로 반란이 일어났다. 이 반란을 알렉산드로스 3세는 즉각 강경하게 진압하였으나, 진압 과정에서 큰 부상으로 약 두 달 동안 치료받았다는 기록도 전해진다. 그는 저항하는 세력에 대해서는 끝까지 추격하여 처형하거나 항복을 받아냈으며, 동시에 정치적 안정화를 위해 박트리아 귀족의 딸 록사네(Roxane)와 결혼도 하였다. 파괴된 도시들은 재건되었고, 행정 질서와 군사 체계 역시 정비되었다.
BC 327년, 알렉산드로스 3세는 북방과 중앙아시아 일대의 반란을 진압하면서 미지의 세계 북방 원정을 멈추고 동쪽의 인더스강 유역 인도로 방향을 돌렸다. 그는 아시아 땅의 끝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확신 속에 진군했다. BC 326년, 그는 인도 북서부 히다스페스강(Hydaspes River, 오늘날 젤룸강)에서 포루스(Porus) 왕과의 치열한 전투에서 승리하였으나, 이 과정에서 수많은 병사를 잃었고 어린 시절 아버지 필립포스 2세에게 선물 받았던 애마 부케팔로스 역시 이 전투 이후 죽음을 맞이했다. 이후 알렉산드로스 3세는 히파시스강(Hyphasis River, 오늘날 비아스강)에 도달하였다. 이곳은 아시아 원정의 마지막 전투 장소가 아니라, 장기간 원정에 지친 병사들이 우기와 전투 코끼리에 대한 공포 속에서 집단적으로 진군을 거부한 지점이었다. 결국 그는 더 이상의 동진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알렉산드로스 3세는 자신의 원정이 이곳까지 왔음을 신들에게 공식적으로 선언하는 상징적인 행위로 거대한 석조 구조의 종교 건축물, 올림포스 12신에게 봉헌하는 12개의 제단(dodeka bomoi)을 세웠다. 이는 이곳이 인간의 발자취가 남긴 헬라 세계의 끝이라고 선포하는 종교 건축 행위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그가 마침내 아시아 원정을 마무리했음을 알리는 표식이었다.
알렉산드로스 3세가 인도 원정에서 그들에게 남긴 유산 가운데 하나는 간다라(Gandhara) 불교 미술이다. 초기 불교는 부처의 형상을 직접적으로 표현하지 않는 무 불상 전통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헬레니즘 문화가 지나간 인도 북서부 지역에서는 그리스 조각 양식의 영향 아래 인체 비례의 정확성, 사실적인 신체 표현, 옷 주름을 통한 입체감이 강조된 인간 형상의 불상이 제작되기 시작하였다. 이로써 무형주의가 상징의 중심이었던 불교는 헬레니즘적 인체 조각이라는 시각적 언어를 획득하며 더 넓은 세계 종교로 확장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하였다. 이러한 미술 전통은 간다라를 거점으로 중앙아시아와 중국을 거쳐 한국과 일본 등 동아시아 전반으로 전파되었고, 그 장기적 미학적 영향은 통일신라 시대 경주 불국사 석굴암에서도 간접적으로 읽어낼 수 있다.

마케도니아 군대 귀환 길에 오르다

이후 마케도니아 군대는 인더스강을 따라 남하하며 귀환 길에 오르게 된다. 이들의 귀환 길을 세 갈래로 병력을 나누었다. 알렉산드로스 3세가 가장 신뢰하던 보수적·전통적 성향의 장군 크라테로스(Craterus)에게는 병자, 부상자, 제대를 앞둔 노장들과 무거운 보급품들을 맡겨 비교적 안전한 내륙 경로로 이동하게 했다. 알렉산드로스 3세 자신은 험난한 사막로를 택하였고, 해군 사령관 네아르코스(Nearchus)는 인도양을 따라 해안을 탐사하며 항해하도록 하였다. 이들은 수개월 뒤 카르마니아(Carmania, 오늘날 이란 남동부 지역)에서 합류하기로 하였다. 알렉산드로스 3세가 이끈 본대는 게드로시아 사막(Gedrosian Desert, 오늘날 파키스탄–이란 국경 지대의 사막)을 통과하였다. 이 과정에서 군대는 극심한 물 부족, 폭염, 보급 실패에 시달렸으며, 고대 사료에 따르면 전체 병력의 상당 부분, 일부 전승에서는 약 1/3에 달하는 희생이 발생하였다고 한다.
BC 325년 말경, 알렉산드로스 3세는 큰 희생 끝에 카르마니아에 도착하였고, 그곳에서 비교적 풍부한 물자를 유지하고 있던 크라테로스의 군대와 합류하였다. 이들은 신들에게 감사의 제사와 축제를 열었다. 한편 해안을 따라 항해하던 네아르코스 역시 오랜 기간 연락이 두절된 상태였다가 카르마니아 연안에 도착하여 알렉산드로스와 합류하였고, 이후 일행은 바빌론으로 귀환하였다. 병사들은 전쟁이 마침내 끝났다고 생각하며 고향으로 돌아갈 날을 기대하였다. 바빌론에 도착한 뒤 잠시 내부 갈등과 긴장이 있었으나, 표면적으로는 화해가 이루어지며 질서가 회복되는 듯 보였다.

알렉산드로스 3세, 32세에 생을 마감하다

바빌론에 머물고 있던 알렉산드로스 3세는 자신이 행정과 통치보다는 전쟁에 익숙해 있다고 자각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새로운 원정 계획을 구상하며 지도 위에 다음 목표지를 그렸는데, 그것은 아라비아반도였다. 더 나아가 그는 서방, 곧 지중해 서부와 유럽 원정까지도 염두에 두고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아라비아 원정을 앞두고 바빌론에서는 축제 형식의 대규모 제사와 연회가 연이어 열렸다. 이때 어린 시절 아리스토텔레스에게 함께 학문을 배웠던 알렉산드로스 3세의 가장 가까운 친구이자 전우였던 헤파이스티온(Hephaestion)은 연회 도중 과도한 음주 이후 열병에 걸려 BC 324년 엑바타나(Ecbatana)에서 사망하였다. 그의 죽음은 알렉산드로스 3세에게 극심한 정신적 충격을 주었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알렉산드로스 3세 자신도 고열과 심한 복부 통증을 동반한 병에 시달리게 되었고, 결국 BC 323년 6월, 만 32세의 나이로 바빌론 궁에서 생을 마감하였다. 그의 사망 원인에 대해서는 말라리아, 장티푸스, 급성 췌장염, 혹은 기타 복합 질환 등 여러 가설이 제기되어 왔으나, 정확한 원인은 오늘날까지 밝혀지지 않았다. 이들의 연이은 죽음은 단순한 개인적 비극을 넘어, 10년 이상 지속된 장기 원정이 남긴 극도의 신체적·정신적 소진과 무관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끝없는 전투와 이동, 통치의 압박 속에서 연회를 통한 음주가 일종의 긴장 해소 방식으로 반복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이러한 상태를 현대적 개념으로 설명하자면, 만성 전투 스트레스, 복합 트라우마, 극심한 번아웃과 같은 현상을 상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알렉산드로스 3세는 죽음을 앞두고 제국의 후계자가 누구냐는 질문에 “가장 강한 자에게(To the strongest)”라고 답하였다. 결국 다니엘서를 통해 예언된 “강성할 때에 그 큰 뿔이 꺾이고”(단 8:8)라는 말씀이 역사 속에서 성취되었고, 알렉산드로스 제국은 해체되며 헬레니즘의 새로운 시대가 열리게 되었다.
<다음 호에 계속>

글쓴이 프로필
글쓴이 : 이오현 편집국장 ((주)한국크리스천신문, 장안중앙교회 장로)
이메일 : donald257@nat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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