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예수교장로회연합회 교회동역자협회  

학술

 
작성일 : 25-02-25 20:50  기사 출력하기 글쓴이에게 메일보내기
 

역사 서술의 동력, 예술적 충동


인간은 과거의 거미줄을 짜고 과거를 제어하며, 그렇게 그의 예술적 충동이-그의 진리 충동이나 정의 충동이 아니라-표출된다.

니체에 의하면 역사 탐구가 진리를 향한 충동(Wahrheitstrieb)이나 정의감을 실현하려는 충동(Gerechtigkeitstrieb)이 아니라 예술 충동(Kunsttrieb)이다. 이유는 다음과 같다. 인간은 역사를, 사실을 그대로 전달할 수 없다. 만약 역사적 탐구가 진리 충동에 의해 이루어졌다면, 역사는 완전히 객관적인 방식으로 기록할 수 있다. 하지만 역사 서술은 단순한 사실 나열이 아니라 특정한 서사(敍事)를 만드는 창작이므로 객관적 진리와 거리가 멀다. 역사가는 반드시 선택적 해석을 하며 어떤 사건은 강조하고 어떤 사건은 배제한다. 이처럼 역사는 무질서한 과거의 사건들을 인위적 창조를 통해 체계화한 결과다. 이런 점에서 과거 해석에는 예술가의 창작 방식이 적용된다. 니체는 과거 해석은 단순 기록이 아니라 의미를 부여하고 이를 미학적으로 구조화하는 행위가 된다. 마치 예술가가 재료를 가지고 새로운 작품을 창조하듯이, 역사가는 과거의 사건들을 조합하여 삶의 존속을 위한 창작을 시도한다.
또한 역사 기술이 정의감을 실현하려는 충동일 수 없는 이유가 있다. 정의감은 통상 사건을 공정하게 판단하려는 태도다. 하지만 역사 기술은 특정한 규범을 기준으로 법적 판결을 내리는 것이 아니라 이야기의 의미를 일관성 있게 서술하는 시도다. 정의(正義)는 사건을 평가하고 규범적 판단을 내리는 것과 관련되지만, 역사 기술은 규범적 판단을 뛰어넘어 과거를 새로운 방식으로 창작하는 행위다. 이처럼 니체는 역사 기술은 단지 사실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기록자에 의해 예술적 창작을 통해 재구성된다고 본다. 그러므로 역사 서술은 진리 추구나 정의 실현이 아니라 예술적 충동의 발현에 속한다. 이런 맥락에서 니체는 “역사란 인간의 정신이 자신에게 침투할 수 없는 사건을 받아들이는 방식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338. *강조는 원전에 따름)라고 오스트리아 극작가이자 시인인 프란츠 그릴파르처(Franz Grillparzer, 1791-1872)를 인용한다.
그리고 니체는 당시 역사 기록 방식이 객관적 진리 충동에 사로잡힌 풍조를 비판하기 위해 유럽의 작가와 풍자가 혹은 과학자 등 다양하게 인용한다. 니체는 역사가이며 철학자인 쉴러(Friedrich Schiller, 1759-1805)와 문학가와 과학자, 철학자와 정치가인 괴테(Johann Wolfgang von Goethe, 1749-1832), 정치논객이며 풍자 작가인 스위프트(Jonathan Swift, 1667-1745)와 천문학자 쵤너(Johann Karl Friedrich Zollner, 1834-1882)를 통해 역사 서술의 객관성(objectivity)을 강하게 비판한다. 니체는 쉴러를 이렇게 인용한다. “현상은 차례차례로 맹목적인 우연, 무법의 자유를 벗어나서 조화를 이루는 전체에-그것은 물론 그의 관념 속에서만 존재한다-적합한 부분으로 편입하기 시작한다.”(339) 역사 해석의 근본 한계를 지적하는 쉴러의 말에서 보듯이 역사적 사건을 지배하는 원리는 무질서와 우연성이며 어떠한 필연성도 목적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데 복잡하고 무질서한 역사적 사건에 대해 역사 해석자는 자기 기준의 인과적 질서와 의미를 부여하고 그 결과 마치 역사는 조화로운 전체(체계, 패턴, 질서)가 있는 것처럼 제시한다. 하지만 이는 역사적 사건을 지배하는 일정한 논리나 법칙이 있는 것이 아니라 직면한 경험들을 이해 가능하게 만들고자 하는 욕망의 산물이다. 역사 자체에 내재하는 법칙이란 존재하지 않으며 이른바 ‘전체’란 해석하는 인간의 관념 속에서만 존재할 뿐 이 또한 충동과 욕망의 산물이다. 객관적 역사성을 부정하면서 역사 해석의 상대성을 강조하는 니체는 당시 19세기 역사주의적 태도를 환상이라고 지적하면서 쉴러를 다시 인용한다. “모든 인간적인 행위와 활동은 소견에서는 벗어나 조용하지만, 강력하고 멈출 수 없는 사물의 진행 과정에 예속되어 있다.”(339) 즉 개별 인간의 삶이 안정 가운데 자율성과 독립성을 실현하는 듯하지만 사실은 매우 거대한 힘의 소용돌이에 갇혀 있다. 그래서 어떤 특정한 역사관으로 삶을 해석한다는 것은 삶의 질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매우 위험하다. 19세기의 성급한 역사적 결정론(Historischer Determinismus)으로 치닫는 유럽 정신문화에 대해 20대 후반(*‘반시대적 고찰’ 출간 1873년 당시 29세)의 문헌학자 니체는 이미 유럽 역사를 새롭게 규정하려는 시도를 보여준다. [니체의 후기 철학을 지배하는 사상은 허무주의(Nihilismus)이며, 이 사상은 유럽 정신사를 규정하는 개념이기도 하다. 니체는 10여 년 후에 허무주의에 바탕을 둔 역사철학을 본격적으로 전개한다.]
진리와 정의라는 이름으로 역사를 해석하려는 시도를 니체는 “다 알려진 거짓”(339)이라고 하며 이러한 지식의 체계화에 대한 동력을 ‘예술적 충동’으로 규정한다. 이에 대해 니체는 괴테의 궁정 정원사의 말을 인용한다. “자연은 [힘으로써] 강제할 수 있지만, [의지에 반하도록] 강요할 수 없다.”(339) 강제할 수는 있지만(forcieren) 강요할 수는(zwingen) 없다는 말은 자연에 대해 정원사가 성장을 촉진하거나 약간의 장소 이동을 조정할 수 있지만 자연의 본성과 법칙을 무시하거나 거스르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뜻이다. 니체는 이 정원사의 말을 통해 역사적 탐구의 진실은 사실 기록이 아니라 창조 과정임을 강조한다. 왜냐하면 자연의 흐름을 억지로 바꾸는 것이 아니라 자연과 함께 새로운 의미를 창조하는 것은 ‘예술적 충동(Kunsttrieb)’이 동력이 되기 때문이다. 역사에 대해 새로운 가치를 부여하고 의미를 창출하는 창조적 행위를 가능하게 하는 관점에 대해 니체는 ‘비판적 역사관’이라고 한다.
예술적 충동에서 동력을 얻는 비판적 역사관은 전제가 있다. 역사 서술에는 언제나 언어가 초래하는 혼란과 논리적 모순이 발생한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지적 충동이나 정의감에서 객관적 사실을 확보하겠다는 의도는 결국 절망을 낳는다. 니체는 이러한 생각을 조나단 스위프트의 『통이야기(A Tale of a Tub, 1704)』를 인용해 설명한다. 이야기에는 대목장 노점에 ‘여기에서는 자신을 제외하고는 세상에서 가장 큰 코끼리를 볼 수 있다’는 광고가 나온다. ‘자기 자신을 제외한 가장 큰 코끼리’는 어리석은 모순을 드러낸다. 이른바 역사적 서술의 객관성 주장은 필연적으로 자기모순에 빠진다. 모든 역사 기술은 자기 시대의 특정한 가치관이나 선입견 혹은 문화에 필연적으로 영향을 받는다. 니체가 볼 때 역사 서술의 자기모순은 과학에서 “이미 오래전에 법칙을 끌어낼 수 있었는데도 실험에 실험을 거듭하는 (……) 무의미한 과잉 실험”(340)과 같은 것이다. 자기모순의 역사 서술의 답답함 앞에서 유일한 대안을 고대한다.

내가 땅의 기초를 놓을 때에 네가 어디 있었느냐 네가 깨달아 알았거든 말할지니라 누가 그것의 도량을 정하였었는고 누가 그 줄을 그것 위에 띄웠었는고 그것의 주초는 무엇 위에 세웠으며 그 모퉁잇돌은 누가 놓았었느냐 그때에 새벽별들이 함께 노래하며 하나님의 아들들이 다 기쁘게 소리하였었느니라(욥 38:4-7); 그[하나님-필자 주]는 때와 기한을 변하시며 왕을 폐하시고 왕을 세우시며 지혜자에게 지혜를 주시고 총명자에게 지식을 주시는도다(단 2:21);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또 사람들에게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이 하시는 일의 시종을 사람으로 측량할 수 없게 하셨도다(전 3:11)
<271호에서 계속>

글쓴이 프로필
글쓴이 : 박홍기 박사 (주필 철학박사 미국 오이코스대학교 교수)
이메일 : jayouda@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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