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술
역사 서술의 동력, 예술적 충동
“역사의 가치는 잘 알려진, 그래서 아마 평범한 주제, 즉 일상의 선율을 재치 있게 편곡하고 고양시키고 포괄적인 상징으로 만들어서 원-주제(Original-Thema) 속에서 심오한 의미, 권력과 아름다움을 지닌 전체 세계를 예감하게 하는 데 있다.” 앞의 니체 말은 존재하지도 않는 객관적 역사 서술의 미몽에서 깨어나 인간 역사의 진실이 무엇인지를 역설하는 내용이다. ‘원-주제’란 말은 어떤 사건을 단지 사실이 아니라 인간 경험과 문명의 흐름 속에서 ‘경험한 것’이 원천이 된다는 뜻이다. 객관적 사건은 곧 ‘가치 창조’의 결과로 환원하려는 니체는 일상을 ‘예술가적 창작의 상징화’로 보고자 한다.
그런데 니체는 전체로서 세계에 대한 예감에는 ‘힘(Kraft)’과 ‘미’가 반드시 상호 연관성을 맺고 있다고 강조한다. 니체 후기 철학의 핵심 개념인 ‘힘(Macht)에의 의지’와 ‘예술가 철학’에 대한 충분한 예감을 주기도 하는 두 개념의 연관성은 전통적 역사 서술에 대한 근본 전환을 요구한다. 다시 말해 극단의 다양성이 난무하고 무질서와 혼돈이 반복하며 모순과 투쟁이 빈발하는 역사적 상황 서술에서 시대를 지배하는 원동력으로서 ‘힘의 관계’를 지적하는 것은 니체의 ‘비판적 역사관’에서 중요한 요소다. 여기서 힘의 관계는 (단지 역사에 대한 서술이 아니라) 역사적 현장을 예술 작품의 창작 과정으로 열어주려는 의도로 보인다. 생존의 근본 동력인 ‘힘’은 온갖 허구적 폐습을 해체하고 창조의 장벽을 파괴함으로써 삶을 지속적 극복과정으로 열어 놓는다.
역사 서술을 예술적 창조 행위로 보는 이러한 발상은 오직 자기 극복을 통해 더 높은 존재로 발전하려는 본능인 ‘힘에의 의지’에 대한 심오한 통찰에서 비롯한다. 힘(권력)과 감동(아름다움)을 주는 예술가적 행위로서 역사 서술은 단순한 연대기(Chronik) 서술이 아니라 인간 정신의 고양 과정이어야 하며 가치 창조를 위한 무한한 해석 과정이어야 한다. 그래서 역사가 죽은 기록이 아니라 죽어가는 사람을 살리고 이미 죽은 자들이 산 자를 살게 하는 생기(生氣) 충만한 동력이 되어야 한다. 니체는 이러한 목적 달성을 위해 “위대한 예술적 능력, 창조적인 비약, 실증적 자료들 속으로의 즐거운 몰입, 창작을 통해 주어진 유형을 발전시키는 일이 필요하다”(341)고 한다. 이는 전적으로 예술가적 창조 의지가 지배할 때 가능하다. 가령 니체가 “역사가의 허영심이 객관적인 체하는 이 무관심을 재촉할 때 우리는 정말 화가 난다”(341)고 할 때 이는 소위 역사가들의 ‘중립성’ 주장에 숨겨진 지적 허영심과 자기 과시 욕구가 진정한 역사 탐구를 망치고 있다는 사실을 지적하려는 것이다. 니체는 객관적 역사 해석과 그 서술의 허구성에 대해 이렇게 지적한다. “적어도 좀 정직해져라! (……) 흘러간 시대와 세대들의 재판관이 될 권리를 가진 시대와 세대는 없다. (……) 단지 너희는 늦게 세상에 왔을 뿐이다.”(341-42)
니체에게 진정한 역사가란 “가장 알려진 것을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것으로 바꾸고 보편적인 것을 너무나 단순하고 심오하게 선언할 수 있는 힘을 가져야 한다.”(342-43) 그래서 니체에게 위대한 역사가는 위대한 창작을 수행할 수 있는 ‘예술적 인간’이어야 하며 그래야 피상적인 멍청이 역사관에서 벗어날 수 있다. 니체가 보기에 위대한 학자와 위대한 멍청이는 그야말로 종이 한 장 차이이지만 그 무게는 결코 비교할 수 없다. 가령 니체가 “과거의 금언은 항상 신탁이다”(343)라고 할 때, 이는 사건에 대한 해석과 의미 부여가 창조적 역량을 실현할수록 신의 음성과 같은 무게가 있다는 말이다. 예술가적 창조의 직감력이 없는 자는 과거를 해석할 능력이 없는 자다. 니체의 말이다. “미래를 건설하는 자만이 과거를 심판할 권리가 있음을 안다.”(343) 이런 점에서 역사관의 유효성은 미래 창조의 가능성을 얼마나 구체적으로 열어주고 있느냐에 달려 있다. 그래서 니체는 역사를 평가할 때 미래 건설의 여지를 얼마나 열어주느냐를 역사관 확립의 중요한 기준으로 보기 때문에 인물 평가도 미래를 위해 “‘자기 시대와 투쟁한 자’”(344)를 기준으로 삼는다. 이렇게 니체는 미래를 위해 제어당하지 않은 역사적 감각은 과거에 대한 집착으로 인해 창조적 상상력과 현재의 활력을 저해하고 미래 가능성을 뿌리째 흔들 만큼 해롭다.
그런데 미래 창조 가능성의 근본 조건이 있다. 모든 해석과 가치에 대한 전복과 파괴의 전격적 수용 없는 미래 역사는 불가능하다. 니체는 이렇게 말한다. “역사적 정의(Die historische Gerechtigkeit)가 (……) 항상 살아 있는 것을 파괴하고 몰락시키기 때문에, 무서운 미덕이다. 역사적 정의의 심판은 항상 파괴다.”(344) 그렇다고 니체가 과거에 대한 무작위 파괴를 조장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창조 없는 파괴는 니체에게 죄악이고 범죄다. 니체는 괴테의 말을 빌려 파괴만 일삼는 자를 이렇게 경계한다. “‘자기 내면의 그리고 다른 사람들 속에 있는 환상을 파괴하는 자에게 자연이 엄격한 독재자로 벌을 내릴 것이다.’”(345) 니체는 같은 맥락에서 당대 개신교 즉 독일 ‘자유주의 신학(theologus liberalis)’에 대해 비판한다. 이 자유주의 신학자들이 주장하는 ‘순수한 기독교’ 또는 ‘참된 교회’란, 니체가 볼 때, 본래의 기독교가 아니라 모호한 상대적 종교로 변질한 것이다. 그 본래의 정체성을 잃었다는 말이다. 자유주의 신학의 주장에 따르면, 기독교는 다른 종교와 얼마든지 공감이 가능하며 그래서 교회란 ‘형체도 경계도 없이 굴러다니는 덩어리’ 정도로 본다. 니체는 이러한 자유주의 신학에 대해 기독교의 본질을 완전히 왜곡하고 희석시키는 ‘반기독교’로 규정한다. 자유주의 신학이 기독교의 정체성을 소멸하면서 모든 교회를 포용하겠다는 것은 스스로 자신은 정체성이 없는 종교 집단이라는 것을 자백하는 것과 같다. 이들은 추상적이고 이상적인 이념만을 추구할 뿐 미래 창조의 가능성을 열어주는 건전한 신학과는 거리가 멀다.
미래 창조의 가능성과 기대를 멀리하고 단지 과거 해석에만 몰두하는 것이 역사학의 임무라고 여기는 태도는 니체 당대의 독일 자유주의 신학자들도 반복했다. 미래 가능성을 고려하지 않는 역사 해석은 미래 생명의 씨앗을 잘라버리는 악행이다. 이러한 태도로 기독교 역사를 평가하는 자유주의 신학자들을 니체는 이렇게 비판한다.
우리가 기독교를 통해 배울 수 있는 것, 기독교가 역사적으로 다루어진 영향으로 둔감하고 부자연스럽게 되었으며, 그래서 결국 완벽하게 역사적인, 즉 공정한 취급은 그것을 기독교에 관한 순수한 지식으로 해체하며 그로써 그것을 파괴한다는 사실, 이 사실을 우리는 생명을 가진 모든 것에서 연구할 수 있다.(346-47)
기독교에 대한 역사적 탐구가 결국 그 본질을 파멸로 몰아갔다고 보는 니체는 미래 창조의 가능성을 열어 주는 해석을 원천에서 차단하는 역사가들을 “우리 문화 가운데 가장 생명력 넘치는 것에 가해진 불의”(347)로 평가한다. 미래 창조를 위한 통찰력이 작동할 수 있도록 비밀스러운 신비감은 항상 남겨 놓을 수 있는 역사관이 중요하다. 니체의 소원이다. “살아 있는 모든 것은 자기 주변에 어떤 분위기, 비밀스러운 안개 층이 필요하다.”(347)
<273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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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프로필 글쓴이 : 박홍기 박사 (주필 철학박사 미국 오이코스대학교 교수) 이메일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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