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
바르트의 신학, 기독교적 철학으로서 학문
우리는 바르트가 교회의 기능을 “신학, 학문(Theo-logie, Wissenschaft)”으로 규정하고 있다고 제시했다. 바르트의 글은 너무나 아픈 부분을 찌르는 것 같다. 그러나 그러한 명료한 지적에 대해서 답변하지 못한 교회는 어떻게 해야 할까? 그러나 신학자는 약점을 교회에 질문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가 공격을 받을 때 변호하는 위치에 있어야 한다. 그런데 바르트는 반대로 교회가 갖고 있는 약점을 파악해서 교회에 질문한다. 교회를 변호하는 신학자가 아닌 교회에 질문하는 신학자이다. 그의 질문은 너무나 정직하고 예리하다. 그의 질문에 답할 수 없다. 그러나 답하지 못하기 때문에 패배를 인정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답했다면 문제가 클 것이다.
바르트가 질문한 것은 교회에서 행해지는 설교의 근원이 어디이며, 설교자가 말한 언어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신 말이 몇 %가 되는지에 대한 물음이다. 바르트는 과거에는 분명히 하나님의 계시 역사가 있었다고 인정한다. 그것은 현재 교회가 과거에 연속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계시 역사 기록에 대한 진위성에 대해서는 인정하지 않는다. 오히려 고대 교회에 결정한 공교회의 결정에 대해서는 의심한다.
바르트는 진리 문제(물음, Wahrheitsfrage)라고 했다. 바르트는 교회의 존재를 예수 그리스도라고 규정했다(das Sein der Kirche, d. h. aber Jesus Christus). 그리고 그것을 “은혜로운 하나님이 인간에게 계시하는 그리고 화해하기 위해서 오는 것 혹은 연설(Gott in seiner gnadigen offenbarenden und versohnenden Zuwendung zum Menschen)”로 규정했다.
바르트는 ‘설교, 기독교적인 말(die christliche Rede)이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오는가? 혹은 예수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가?’라는 예리한 질문을 했다. 바르트의 질문이 너무나 명료하다. 그러나 그 질문에 대답할 수 있는 신학자는 없다. 대답할 수 없는 질문을 만드는 기술이 탁월하다. 대답할 수 없는 질문에 성실하게 답하는 것은 오히려 문제가 크다. 프란시스 쉐퍼(Francis A. Schaeffer, 1912-1984)는 정직한 질문에 정직하게 답변(Honest Questions, Honest Answers)해야 한다고 했다. 즉 정직하지 못한 질문에 정직하게 답변하는 것은 어리석은 것이다. 바르트의 질문은 너무나 정직하지만, 너무나 어둡다. 누구도 답변할 수 없기 때문이다. 바르트는 함수에서 사유 논의를 시작한다. 반복해서 반틸 박사(Cornelius Van Til, 1895-1987)의 전제주의를 제시한다. 반틸 박사는 하나님의 존재에서 시작하지만, 바르트는 신 존재를 불가지론적으로 보는 관점에서 진행한다(김성삼, “행동하시는 하나님, 존재하시는 하나님: 바르트와 칼빈의 하나님론”, 총신대학교 대학원 박사논문, 2005).
바르트는 진리 물음에 대해서 규정하고, 성경신학, 실천신학, 교의신학을 개념화했다(GG., 29). 성경신학은 물음에 대한 정초에 대한 물음이고, 실천신학은 그 목표에 대한 물음이고, 교의신학은 교회에 고유한 말에 내용에 대한 물음이다(GG., 29). 바르트는 교의신학 분야에서 과거 교회에 있었던 고유한 말에 대한 물음을 해소시켰다. 참고로 바르트는 교회사는 교의학적 실천 신학의 보조 학문으로 규정했다(GG., 29).
바르트는 교회가 성경신학적, 실천신학적, 교의신학적의 삼중적 의미를 갖고 진리문제를 자체 검토하는 학문적 성격으로 규정한다(GG., 29). 이 질문에는 과거와 미래 그리고 현재가 포함되어 있다. 1세기 십자가에서 미래는 당시 20세기이다. 또 20세기 현재에서 1세기 과거와 21세기 미래를 바라보아야 한다. 바르트는 이 관계에서 세 질문(질문의 정초, 목표 그리고 고유한 발화에 대한 내용)이 교회, 신학, 학문이 된다는 것이다.
우리는 교회는 복음의 기관으로, 주 하나님의 피로 사신 거룩한 기관(행 20:28)으로 규정했다. 바르트는 교회를 신학이 발생하도록 하는 언어 사건이 있는 공간으로 규정한 것이다. ‘그 언어가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이 되는가?’에 대한 자기가 체계화시킨 메커니즘을 밝히는 것이다. 그런데 바르트는 자기 매커니즘을 밝히기 위해서, 과거 교회에서 결정한 교리에 대해서 의심하고 부정하는 자세에서 매커니즘을 구축했다는 것이 심각한 문제이다. 그것은 1세기에 전했던, 16세기 종교개혁에서 전했던 복음의 내용이 같지 않으며, 또한 20세기에서도 복음의 내용은 변환되어야 한다는 것을 밝히고 있는 것이다.
바르트는 진리 물음에 답변하는 것을 신학으로 규정하고 있으며, 이 신학을 진행할 때에는 학문(과학, Wissenschaft)으로 수행해야 한다는 것이다. 바르트는 “신학의 특수성(Besonderheit)”을 제시하면서, 특수한 신학의 절대성을 회피했다. 바르트는 진리에 대한 물음에서 추상적인 답변이 아닌 실천적인 논증을 제언했다(GG., 29). 바르트의 제언은 항상 옳다는 것이 문제이다. 좌파와 우파의 논쟁에서 좌파에게 우파가 질 수밖에 없는 것은 좌파는 틀린 말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 말은 실현이 불가능한 미지의 영역에 있다는 것이 실재이다. 그러나 그 실현 불가능한 가치가 미래에 성취될 것이라고 희망을 주는 것이 좌파적 관념의 특징이다. 바르트의 제언은 너무나 옳기 때문에 반박이 불가능할 정도이다. 그러나 세상일이 말처럼 이상처럼 되지 않는다. 그런데 신학은 영적 영역이다. 영적 영역이 인간의 합리성에 근거한다면 영적인 것은 영이 아니라 세속이 될 것이다. 세상일, 경제에서도 예측할 수 없어 “보이지 않는 손(invisible hand)”을 말했다.
바르트는 신학에 있다고 주장하는 특수성을 제외시켰다(GG., 30). 바르트는 렘 31:34이 성취되었으므로(34절. 너는 여호와를 알라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나를 알기 때문이라 내가 그들의 악행을 사하고 다시는 그 죄를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철학이나 세속적 학문이 세속적이거나 이교적이지 않는다고 제언했다. 그래서 바르트는 신학이 기독교적 철학(philosophia christiana)이 될 수 있다고 확정했다.
바르트는 참된 철학자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verus philosophus est amor Dei)라고 하는 어거스틴의 제언을 인용해서, 참된 신학자도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이며, 영적인 통찰과 세속의 실천에 대해서 제시하기 때문에 교차적으로 사용할 수 있다는 늬앙스를 제공한다.
바르트는 교의학을 실천신학의 분야에 포함시키는데, 이것은 슐라이어마허의 영향을 반영하는 것이다. 신학은 실천적 훈련이나 지향성 이전에, 강단에서 선포할 복음을 위한 기초, 숙련된 지식이고 훈련이다. 선포된 복음이 있어야 교회는 교회가 된다. 선포된 복음을 잘 분석해서 교회가 되는 것이 아니다. 선포되는 복음의 특수성과 절대성을 반드시 고려해야 합당한 신학이 된다. 그런데 바르트는 그 특수성을 제거했다. 그리고 실천을 강조한다. 실천이 중요하지만 선포된 복음이 없는 실천은 울리는 꽹과리와 같다(고전 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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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프로필 글쓴이 : 고경태 목사 (주님의교회 / 형람서원) 이메일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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