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순일곱: 로마 가톨릭의 미사와 음악, 로마 제국의 유산
로마 가톨릭 미사는 기독교 고유의 예배 형식이 아니다. 이는 로마 제국의 공적·종교적 의식과 전례 전통의 혼합물이다. 가톨릭 미사는 특히 로마 제국의 권위, 의례 형식, 공적 제사 체계와 깊은 연관이 있다. 로마 제국의 의례 구조에서 공적 제사는 황제 숭배와 다양한 신들에게 제사(Sacrificium)를 드리는 필수 행위였다. 반드시 사제(collegium pontificum)가 집전해야 하며 정해진 의식 절차에 따라 특정 장소(포룸, 신전)에서 거행했다. 제물 봉헌은 필수 요소였으며 정해진 기도와 찬가 그리고 행렬 등 의식 절차의 형식성과 엄숙함을 강조했다.
로마 제국의 의식 집전자 제사장(pontifex)은 가톨릭에서 미사를 집전하는 사제(Priest)로 대체되었다. (로마 교황을 칭하는 용어 중 ‘Pontifex Maximus’가 있으며 이는 ‘교회의 최고 사제’라는 뜻이다.) 제물 봉헌은 성찬의 빵과 포도주 봉헌으로, 공식 기도와 찬가는 미사 통상문(Gloria, Sanctus 등)으로, 제국의 엄격한 의식 구조는 미사 전례의 정형화된 순서(입당→설교→성찬 전례 등)로, 황제를 비롯한 시민 행렬은 미사 시작 시 입당 행렬이나 이른바 성체 행렬로 자리 잡았다. 다시 말해 성경적 근거가 거의 없는 로마 제국의 다신교 숭배 절차들이 마치 기독교의 고유한 의식처럼 둔갑한 것이다. 이것이 이상하지 않았던 이유 중 결정적인 것은 476년 서로마 제국의 멸망 후 수많은 제국의 왕족과 귀족들이 자신들의 권력과 재산을 유지하기 위한 수단으로 국교화된 기독교로 단지 그들의 자리를 이동했기 때문이다. 숭배 대상을 그리스-로마 잡신들에서 하나님, 예수, 마리아, 성인으로 대체했을 뿐이다.
로마 제국의 다신론 숭배가 가톨릭 미사로 이행하는 데 결정적 도움을 준 한 요소가 있다. 바로 라틴어 사용이다. 로마 제국의 공적 의식이나 법률 그리고 행정에서는 라틴어를 사용했다. 기독교가 국교화하면서 이 라틴어를 교회의 공식 언어로 채택했으며 따라서 미사에서 라틴어 사용은 자연스럽게 정착했다. 이런 점에서 라틴어를 통해 미사의 제의적 권위를 극대화하는 의식은 다름 아닌 전 제국의 모든 사람들이 로마 황제를 숭배했던 의식을 모방했던 것이다. 연초 혹은 각종 가톨릭 행사에서 전 세계 수많은 가톨릭 신도들이 바티칸 시국(Città del Vaticano)에서 교황을 환호하는 저 전통은 멸망당한 서로마 제국의 황제의 영광을 재현하려는 것으로 보인다.
로마 황제에 대한 숭배 의식과 절차에서 가장 중요한 목적은 바로 인간을 신처럼 숭배하면서 황제에 대한 충성을 맹세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제의 절차는 가톨릭 미사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몸과 피가 실제 현존한다고 믿는 상징인 성체성사(聖體聖事, Eucharist)로 대체된다. 이러한 제의 절차에서 성체성사의 정통성을 보장하는 인물이 바로 교황이며 교회 일치의 가시적 표현이 바로 교황의 권위다. 이처럼 황제 숭배에 사용했던 서로마 제국의 모든 의례적 권위는 교황 중심의 가톨릭교회의 의례적 권위로 전이된다. 패망한 서로마 제국의 왕족들과 귀족들은 국교화한 기독교 체제가 전혀 낯설지 않았을 뿐 아니라 제국의 영광과 부와 권력을 기독교를 통해 오히려 더 확고히 하면서 ‘영원한 로마’의 영광이 다시 재현되고 영속할 것이라는 확신을 갖는다. 제국을 잃은 로마 왕족들과 귀족들에게 기독교의 국교화는 좋아도 너무 좋은 선물이었다.
그리고 로마 제국의 공공 회합 장소였던 바실리카(Basilica)의 권위는 기독교가 국교화하면서 예배당(교회 건축)으로 전환하는데, 미사 전례의 공간 구조(중앙 통로, 제단, 좌우측 성가대석 등)의 원천은 로마 공공 건축 양식에서 발전한 것이다. 제국의 법적·공적 성격의 의례 절차들은 본래 신성한 권위를 표방했기 때문에 가톨릭 미사를 개인 예배가 아닌 공적·공동체적 행위(Liturgia)로 전환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결과로 이어졌다. 이처럼 로마 제국의 법, 의례, 국가의 통일성은 로마 가톨릭의 체제 확립을 위한 제도와 전례의 규범화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다. 제국의 유산은 로마 가톨릭 신도들의 일상 시간 구조에도 반영되었다. 제국의 공적 축일을 기독교 절기 체계(부활절, 성탄절 등)로 융합한다. 로마의 춘분, 농경제, 황제 축일 등은 교회 절기에서 변용된 형태로 흔적을 남긴다.
그뿐 아니라 로마 제국의 종교의식에서 사용했던 찬가(Laudes, Hymni)의 전통은 미사의 찬미가인 그레고리오 성가로 발전하는 데 결정적 요인이 되었다. 특히 황제를 비롯한 시민 행렬에서 부르는 찬가와 공적 의례의 합창 구조는 그레고리안 성가 발전과 정착의 기원이 된다. 하나의 선율(멜로디)만으로 이루어진 음악 즉 하나의 음높이(line)만으로 부르는 단성(모노포니) 전례 성가인 그레고리안 성가(Gregorian Chant)는 주로 라틴어로 불렸으며 이는 6~8세기경 여러 전통들의 융합이다. 규칙적 박자보다는 말의 운율을 강조했던 로마 음악은 그리스 전통을 따라 자연스러운 언어 운율을 중시했다. 이러한 전통이 그레고리안 성가가 말의 억양과 운율에 따른 선율을 구성하는 데 영향을 미치면서 단순한 단선율 중심과 무반주 성가로 정형화한다. 그리스 음악 이론을 계승한 로마 제국의 그리스의 선법(旋法, 모드) 체계가 그레고리안 성가에서는 8개의 교회 선법으로 정착한다. 이처럼 로마 제국의 종교 의례 행사에서 음악을 사용한 전통(국가 제사, 황제 숭배 의식 등)은 기독교가 국교화된 이후 로마 가톨릭 의례에 자연스럽게 이식된다. 그레고리안 성가는 단순히 종교적 산물만이 아니라 로마 제국의 문화적·행정적·음악적 전통 위에 세워진 혼합물이다. 로마 제국의 통일성과 라틴 문화, 그리고 고대 의례와 음악의 형식이 모두 녹아들어 서유럽 중세 가톨릭교회를 로마 제국의 계승자로 만들어 주었다.
<272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