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
탐구로서의 교의학(1) 인식의 가능성을 세움
우리는 앞에서 교의학(Dogmatik)과 교의(Dogma)에 대한 개념을 확립하는 과정을 거쳤다. 교의(Dogma)는 “교의학적 검토로 확립된 올바른 내용(Rechten Inhalt)”이다. 교의학은 “하나님에 관한 교회의 진술내용에 대한 그리스도교 교회의 자기 검증이다(Dogmatik ist die Selbstprufung der christlichen Kirche hinsichtlich des Inhalts der ihr eigentumlichen Rede von Gott, GG., 37).” 바르트는 교의학에 대한 더 구체적인 개념은 § 7에서 설명할 것이라고 했다. 우리도 바르트를 따라서 § 7에서 교의학에 대한 구체적인 진술을 탐구할 것이다.
인간은 인식(Erkenntnis)을 하는 존재인데, 인식은 탐구를 통해서 획득된 가치이다. 탐구(Forschung)는 대상(Gegenstand)이 있어야 한다. 바르트는 교의학이 탐구하는 대상에 대해서 명확하게 제시한다. 신학도는 대상에 대해서 명확하게 인식해야 한다. 바르트는 탐구가 가능한 대상을 명확하게 제시했다. 즉 탐구될 수 없는 대상을 설정하는 것을 거부했다. 학문이라는 것은 합당한 탐구 대상이 있어야 한다. 바르트는 그 탐구 대상을 전제(setzt voraus, presupposes)로 제안했다.
1. Dogmatik als Forschung setzt voraus, daß der rechte Inhalt christlicher Rede von Gott vom Menschen erkannt werden kann(KD., 10). can be known by men(인간에 의해 될 수 있다).
2. Dogmatik als Forschung setzt voraus, daß der rechte Inhalt christlicher Rede von Gott menschlich erkannt werden muß(KD., 12). must be known by men(인간에 의해서 되어야 한다).
우리는 반틸(Cornelius Van Til')의 전제주의(presuppositionalism)를 칼 바르트의 신학을 배격하기 위한 신학 어휘라고 생각한다. 칼 바르트는 『교회교의학』 I/1, 첫 부분에서 ‘전제’로 시작한다. “대상을 인식할 수 있다는 전제”로 세우고 있다. 그런데 대상은 존재가 아니라 인간이 신에 관해서 말하는(Redens von Gott) 행위에 말함(Rede)이다. 바르트는 그 말함에서 기독교적 바른 내용을 인식할 수 있다고 주장하고, 그래야만 한다고 주장한다.
신학에서 하나님을 아는 것, 인식하는 것은 매우 민감한 문제이다. 일반적으로 이러한 구체적인 메커니즘을 밝히지 않는다. 그런데 칼 바르트는 매우 명확하게 구조를 밝힌다. 왜 신학자들은 자기 신학적 프레임(a theological framework)을 밝히지 않았을까? 칼 바르트도 천재이지만, 세계적인 천재는 어거스틴이고 마틴 루터이고 존 칼빈이다. 필자는 존 칼빈이 가장 탁월한 천재였을 것이라 생각한다. 서철원은 “철학 문장은 어렵지만 이해하면 쉽고, 신학 문장은 단순하지만 이해할 수 없다”고 술회했다. 바르트는 인문학적 신학을 추구하기 때문에, 그의 문장이 비록 어렵지만 반복해서 훈련하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마틴 루터의 글이나, 존 칼빈의 『기독교강요』는 얇고 쉽게 느껴지지만 읽으면 읽을수록 쉽지 않다. 정통파들은 자기 신학 프레임을 정확하게 밝히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바르트는 신학 프레임을 정확하게 제시한다.
바르트는 ‘가능성(kann, can)’을 전제로 삼으면서 ‘당위성(muß, must)’으로 전제를 확립시켰다. AI(Gemini)는 바르트의 변증법적 신학(The Logic of Barth's Dialectical Theology)으로 분석한다. 시작은 인간은 하나님을 인식할 수 없다. 전환은 하나님이 스스로 계시할 가능성이 있다. 결론은 그래서 하나님이 계시하기 때문에 인간은 반드시 믿음으로 응답할 당위성이 있다.
개혁신학자 유니우스(Franciscus Junius, 1545-1602)는 신학의 대상을 원형신학(Archetypal Theology)과 모형신학(Ectypal Theology)으로 구분해서, 모형신학, 즉 계시(revelation)에 의해서 수행한다. 즉 하나님을 직접 대상으로 하지 않고, 특별계시에 의해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수행하는 것이다. 그래도 간접지식이 아닌 직접지식으로 간주한다. 정통 기독교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추구한다. 그런데 바르트는 하나님에 관한 말함에서 인식되어지는 바른 내용을 추구한다. “끊임없이 믿음을 추구하는 믿음”과 “믿음의 결단으로 인식을 추구하는 끊임없는 탐구(바르트)”로 명백하게 대조된다.
우리는 이 부분에서 바르트가 “믿음의 대상”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가능성”을 전제로 한 탐구에서 “올바른 내용”을 인식하는 것으로 제시한다. 그리고 “당위성”을 전제로 사람이 “올바른 내용”을 인식할 수 있다는 확증으로 전개한다. 가능성만 있다면 주장의 설득력이 약하다. 반드시 구체적인 목표를 말해야 할 것인데, 실재로 구체적인 목표에 도달한 것은 알 수 없다. 항상 가능성을 전제로 추구, 탐구해야 하는 노정(路程)에 있다.
우리는 앞에서 바르트가 제시한 교의(Dogma) 개념은 정통 교회가 제시한 교의(Dogma) 개념과 같지 않다고 밝혔다. 바르트는 “올바른 내용”을 교의라고 하는데, 정통 교회에서 교의는 삼위일체와 그리스도 양성교리(한 위격에 두 본성)이다. 이런 영향을 받은 조지 린드벡(George A. Lindbeck, 1923-2018)은 『교리의 본성, The Nature of Doctrine: Religion and Theology in a Postliberal Age』(1984년)에서, 교리를 “신앙공동체의 삶과 언어를 규율하는 문법이자 규칙으로 종교 의미를 제공하는 체계”로 제시했다(김영원 번역, 서울: 100, 2021). 바르트 이전은 자유주의이고, 바르트는 1차 대전을 기점으로 시작된 현대신학으로 하고, 린드백은 1960년 이후에 형성된 후기자유주의라고 한다. 후기자유주의는 후기종교사학파 (Post-Religious Historical School), 새관점학파(New Perspective on Paul) 등으로 구분되어 활동하고 있다. 기본적으로 칼 바르트 이후의 신학은 칼 바르트의 그늘 아래 있다고 보아야 한다. 서철원은 칼 바르트도 슐라이어마허의 그늘을 벗어나지 못했다고 주장한다. 슐라이어마허는 칸트의 인식론 범주 아래 있다. 자유주의는 이신론에 근거한 계몽철학의 시녀이다. 계몽철학의 완성자는 임마누엘 칸트이다. 칸트의 순수이성(pure reason)에서 슐라이어마허는 절대의존감정(feeling of absolute dependence)을 주장했고, 헤겔은 절대이성(Absolute Spirit)을 주장했지만 칸트의 그늘에 있다. 인식을 주장하면 칸트를 벗어날 수 없다. 칸트처럼 완벽하게 이성 체계를 분석한 학자는 없다. 주님의 말씀은 적지 않게 두렵다.
마 12:43-45 “더러운 귀신이 사람에게서 나갔을 때에 물 없는 곳으로 다니며 쉬기를 구하되 쉴 곳을 얻지 못하고 이에 이르되 내가 나온 내 집으로 돌아가리라 하고 와 보니 그 집이 비고 청소되고 수리되었거늘 이에 가서 저보다 더 악한 귀신 일곱을 데리고 들어가서 거하니 그 사람의 나중 형편이 전보다 더욱 심하게 되느니라 이 악한 세대가 또한 이렇게 되리라”
바르트는 신을 인식할 수 있는 가능성을 전제로 세웠다. 그 전제의 근거는 아직 밝히지 않았지만, 신의 활동이다. 우리는 성령의 조명으로 하는데, 반드시 “선포된 말씀과 함께(cum verbo)”를 견지하는데, 바르트는 그러한 구도를 신을 제약하는 것으로 평가해서 거부한다.
현대신학 이후, 후기자유주의신학을 접할 때에도 자기 전제를 분명하게 세워야 하며, 자기 지향성을 분명하게 세워야 한다. 그렇지 않는다면 거대한 넓은 길을 벗어날 수 없다. 예수 복음을 전도함과 복음으로 교회 세움을 명료하게 세우지 않는다면, 예수는 대상에서 사라질 것이고, 교회는 체험된 종교경험을 나누는 공동체가 될 것이다. 교회는 주 하나님의 피로 사신 거룩한 공동체로 교회의 머리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만을 높여야 한다. 바르트의 『교회교의학』에서 그렇게 풍성하게 예수 그리스도를 언급하지만, 바르트는 예수를 대상이 아닌 도구, 근거로 활용한다. 전적으로 인간 예수 그리스도를 표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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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프로필 글쓴이 : 고경태 목사 (주님의교회 / 형람서원) 이메일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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