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하늘이 내린 다문화
‘인명재천(人命在天)’은 땅 위 모든 사람의 목숨이 하늘에 달려 있다는 것이다. 유독 사람들의 목숨만이 하늘에 있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2019년 3월 1일이 되는 하루 전에 베트남에서 열린 북·미정상회담은 합의문 도출에 이르지 못하고 결렬되었다. 이것에 관심을 두고 상당히 오랜 시간 동안 보도(報道)해 온 언론 매체들도 그 결과에 놀라움을 토하였다. 그것은 예상 밖의 결과로 끝났기 때문이다. 100년 전에 있었던 3.1운동도 삽시간에 전국적인 운동으로 번지리라고는 예상을 못했다. 바로 여기에 올해로 3.1운동 100주년을 맞는 진정한 의미가 있지 않을까? 이것은 성경에 근거를 두고 있다. 그 근거는 노아의 세 아들이다. 이 후손들이 서로 왕래하며 같이 생활할 것이 예언된 것이다. 이렇게 이 땅에서 사는 인류의 문화가 하늘에 바탕을 두고 있음을 생각해 보고자 한다. 글 제목에서 하늘은 피조계인 하늘(sky)을 포함하는 근원(heaven)을 의미한다. 동양에서 말하는 천지인(天地人)에서의 하늘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이 하늘은 예수께서 가르치신 기도에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라고 할 때의 바로 그 하늘이다. 이 하늘은 구약성경의 다니엘서와 신약성경의 요한계시록에서 특별히 의미 있게 사용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도 땅만 보지 말고 하늘을 보며 살라고 한다. 물론 하늘의 의미 차이는 존재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말로부터 문제의 제기를 가져올 수 있다. 오늘의 문화가 너무 땅에 집착하기 때문이다. 세계사나 개인사 이 모두가 하늘에 의해서 진행되지 않는다고 누가 증명할 수 있겠는가?
노아의 세 아들 중에 셈이 있다. 성경은 셈의 여호와 하나님을 찬송하게 될 것을 예언하였다. 창세기에서부터 예언한 이 성경책을 두고 성경의 결론이라 할 수 있는 요한계시록에서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이라 하였다. 이렇게 예언의 말씀이라고 강조하여 지칭할 때에 ‘예언’이라고 한 것은 하늘에 근거하고 있기 때문이다. 성경은 땅에서 되는 만사의 근거로 하늘을 강조하여 밝혀주고 있다. 창세기에 나오는 에덴동산의 타락 사건도 하늘에서 비롯되었음을 요한계시록에서 강하게 계시하고 있다. 이 땅 자체에서는 아무것도 얻을 것이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일반인들이나 심지어 하늘의 거룩한 부름을 입었다고 하는 성도들까지도 이 땅에 모든 것을 던지는 문화가 만연되어 있다. 왜 이러할까? 그것은 대개 인간의 근본이며 바탕인 하늘에 대한 확증이 없거나 약하기 때문일 것이다. 다문화 선교에서 가장 중요하게 대두되는 것이 물질문화이다. 진정한 복음의 진수를 만나기 전까지는 불가피한 현실이지만, 이 시대의 문화가 노아 시대와 방불하다. 한편으로 성경의 예언대로 되는 것이기에 정말 위안이 되기도 한다. 다문화 선교에서 피부로 느낄 수 있는 것은 언어 문제이다. 소통이 되지 않는 것은 지엽적인 문제이다. 근본적인 문제의 핵심은 소통되지 않는 자체보다는 오히려 복음을 가졌다고 하는 전도자의 관점이다. 전도자가 하늘의 영원한 복음을 가졌으면 전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 어려운 언어의 문제도 하나님께서 바벨탑 사건을 통해서 당신의 뜻을 전해주기 위해 흩으신 것으로 이해하기 때문이다. 이 땅의 이러한 여러 가지 문제의 본질은 신학에 있다. 바른 신학이 없는 곳에는 그 모두가 문제투성이로 남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땅에 소망이 없고 하늘에 진정한 생명이 있음을 강조하면서, 신학의 문제를 한 가지 짚고자 한다. 땅에 편중적으로 집착하고 진정한 하늘을 바라다볼 수 없었던 이유는 여러 가지다. 그중에서 이 주제와 관계된 하나는 성경을 단편적으로 보고 연구하여 시각이 좁아져 있다는 점이다. 일반학문에서는 종합학문이 되어 입체적으로 연구되는데, 신학은 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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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프로필 글쓴이 : 박근호 목사 (중어중문학박사) 이메일 : yan825@hanmail.net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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