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예수교장로회연합회 교회동역자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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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4-12-03 12:54  기사 출력하기 글쓴이에게 메일보내기
 

신정론의 담론(談論) 6


죄가 율법 있기 전에도 세상에 있었으나 율법이 없을 때에는 죄를 죄로 여기지 아니하느니라 그러나 아담으로부터 모세까지 아담의 범죄와 같은 죄를 짓지 아니한 자들 위에도 사망이 왕노릇 하였나니 아담은 오실 자의 표상이라
(로마서 5장 13-14절 개역성경)

기독교에 대해 단순하게 인간의 사죄가 종교 생활의 목적이라고 인식하는 사람들이 허다하다. 그렇다면 성도들은 죄에서 벗어나 평안한 삶을 유지하는 것이 마땅하다. 그런데 비기독교인이나 무교(無敎)인 사람들과 비교하면 기독교인들은 항상 죄의식에 사로잡혀 가장 예민하게 반응한다. 성경에서는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고 말씀하고 있는데 성도들은 죄로부터 자유스럽지 않아 보인다. 이런 것을 생각해 보면 죄의 개념에 대해 깊게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그리고 일부 교회에서는 가톨릭 고해성사와 유사하게 한 주간 지은 죄를 자복하는 순서를 매주 예배시간에 진행하기도 한다. 그리고 한때는 무속인이 주문을 외우듯 목청 높여 ‘주여’를 삼창하면서 속죄와 복 주시기를 기도하는 모습들이 교회당 안팎에서 유행하기도 했다. 이러한 모습들은 지나고 보니 참으로 부끄러운 과거 우리들의 자화상이었다. 이는 죄에 대한 본질을 이해하는 데 오류가 있었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그러면 오류에 대한 정답이 무엇이냐고 반문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에 대한 해답을 단답식으로 답변하는 것은 매우 어렵다. 왜냐하면, 사람들에게 방대한 진리의 말씀을 짧은 몇 마디로 진리를 수납할 수 있도록 전달하는 것은 간단치 않고 많은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더욱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깨닫게 하시는 믿음의 선물을 주셔야만 가능하다. 그래서 지난 호에 밝힌 신학사상을 바탕으로 천천히 한 걸음씩 걷는 심정으로 올바른 정답을 찾아서 담론하려고 한다.

지난 호에는 모세시대 율법 이전에 아니, 창세전에 하나님 기준에서 ‘싫으심’인 악이 관념적인 실재이고, ‘싫어하시는 것’인 ‘악한 것’이 구체적 실재이며, ‘하나님께서 싫어하시는 것’이 인간 내면에 구체화 된 것이 ‘죄’라는 것을 살펴보았다. 이러한 논리로 보면 모세시대 율법은 죄의 탄생과 무관하다. 이번 호에는 ‘죄’와 에덴동산에서의 금과법(禁果法)과 모세시대 율법과의 관계성을 알아보려고 한다.
기독교 전통신학은 율법을 위범(違犯)한 것이 죄라고 말한다. 이러한 것은 인간의 내적인 죄의 본질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밖으로 드러나는 외적인 행동에만 한정 짓고 있다. 그러나 모세시대의 율법은 내적, 외적 모두 관련성이 있다. 예를 들어 예수께서 모세시대의 율법에 “간음하지 말라”고 하는 계명에서 남의 아내를 범하는 범죄와 음욕을 품는 죄까지도 간음이라고 하셨다. 그러므로 율법은 인간의 마음속까지도 규제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도 바리새인처럼 외부로 드러나는 행동만을 규범이라고 잘못 알고 있는 것을 책망하셨으며, 제자들에게도 율법에 대한 올바른 견해를 가르쳤다. 그러므로 율법은 범죄와 더불어 죄와도 떨어질 수 없는 관계성이 깊다. 이에 대하여 죄는 어떠한 성질을 띠고 있는지, 두 가지로 나누어 성경을 근거 삼아 해답을 찾아보려고 한다.

첫 번째는 에덴동산에서 금과법(禁果法) 아래서의 죄이다.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 먹고 금과법을 범하여 하나님께서 싫어하시는 것, 선과 악을 아는 것으로 말미암아 죄인이 되었다. 그러므로 아담과 하와가 범한 죄는 에덴동산의 율법인 금과법 아래서 구체화된 죄이기 때문에 율법과 관계있는 죄다. 에덴동산에서의 금과법과 모세시대의 율법은 근본적으로 같은 원리를 가지고 있으나, 구체적인 법조문은 서로가 다르다. 그러나 두 시대의 법조문의 근본적인 원리는 하나님의 절대이성기능에 의한 가치판단의 결과로서의 ‘좋으심’과 ‘싫으심’ 즉, ‘선’과 ‘악’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또한, 이 율법들의 조항들도 하나님께서 ‘좋으신 것’과 ‘싫으신 것’들에 대해 구체적으로 기록한 것으로서도 그 원리 면에서 일치한다. 그러나 두 율법은 그 기능 면에 있어서 근본적으로는 상이(相異)하다. 에덴동산의 금과법은 아담에게서 ‘악한 것’이 처음으로 구체적으로 드러난 ‘죄’와 행동으로 나타난 ‘범죄’가 형성되는 데 있어서 정죄기능(定罪技能)으로서의 반드시 있어야 할 율법이었다. 모세 시대의 율법은 인간 내면의 악성이 구체적으로 형성된 ‘죄’와 그 행동으로 드러나는 ‘범죄’를 깨닫게 하는 데 있어서 교화기능((敎化技能)으로서의 필수요소들이었다.
그러면 에덴동산의 금과법과 관계있는 죄는 무엇일까? 대부분의 신학자들이 수용하는 일반적인 교리는 하나님께서 명하신 금과법에 대한 아담의 불순종을 죄라고 정의한다. 여기서도 아담의 불순종은 죄의 형성 과정의 외적으로 드러난 행동이지 죄 자체의 본질은 아니다. 그러나 아담이 지은 죄에 대한 본질적인 정의는 아담이 ‘좋음’과 ‘싫음’을 아는 것, 즉 ‘선’과 ‘악’을 알고 판단하는 것 그 자체이다. 이러한 것이 아담과 하와의 내면에 구체적으로 실제 존재하는 에덴동산의 금과법과 관계있는 ‘죄’이다.
에덴동산 선악과 사건과 관련하여 고대부터 다양한 논란들이 생산되고 있다. 왜냐하면, 전통적인 기독교 신학에서 모든 시점과 난제의 근원이 죄와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의문들을 해결할 수 있는 것은 인간의 사색에 의한 철학적 방법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하게 하신 특별계시인 성경을 통해서만 정답을 찾을 수 있다. 따라서 에덴동산의 금과법과 관계있는 죄를 성경신학(The Bible Theology)적으로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하나님께서 아담을 지으시고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에덴동산 중앙에 나게 나셨다. 그리고 아담에게 따 먹지 말라는 금과법을 주신 다음 뱀에게 하와를 유혹하여 금과법을 범하여 타락하도록 하신 것은 하나님의 영원하신 작정(로고스 λoγοc)에 따라 예정하신 뜻대로 이루시도록 하시는, 이 모든 과정이 곧 여호와 하나님의 계시를 실현한 하나의 방편이었다. 특히 에덴동산의 금과법은 아담과 하와가 불순종하여 타락하도록 하신 하나님의 섭리에 대해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하신 방편이었다. 이 요약에 대해 의문을 제기할 수도 있다. 그러나 앞의 본문 로마서 5장 14절에 “아담은 오실 자의 표상이라”고 분명히 성경은 밝히고 있다. 다시 말하면 아담은 오실 예수에 대한 상징적인 예표로서의 존재라는 뜻이기 때문에 반드시 아담과 하와는 불순종하여야만 하고 타락하여 죄인이 되어야 하며 이로 인하여 예수께서 이 세상에 육신의 몸으로 반드시 오셔야 했다. 다시말하면 아담 한 사람의 범죄로 인해 모든 인간이 정죄에 이른 것같이 예수님께서 대속주 직임을 행하셔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의롭다 하심을 얻어 생명에 이른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 모든 과정이 절대적인 하나님의 언약으로 말미암아 철저하게 그렇게 이루어졌어야만 했다. 덧붙이자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모든 피조물 중 무엇이라도 하나님의 영원하신 작정섭리의 주권적 영역을 벗어나서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언약의 결괏값으로 오늘날 기독교의 존재에 대한 사유로 도출된다.

두 번째는 모세시대의 율법 아래서의 죄이다. 오늘날 일반적인 신학자들은 모세시대 율법의 기능을 몽학선생, 종교적, 교훈적, 죄를 깨닫게 하는 방법, 정치적, 사회적 등의 측면에서의 용도라고 한다. 또한, 이들은 율법의 제3의 용도로 중생자를 위한 성화의 수단, 규범, 삶의 원리, 원칙이라고 말한다. 이렇게 나열된 다양한 율법의 기능들은 더러는 시작과 과정에서는 모범답안을 찾아가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으나, 안타깝게도 성경적인 결론보다는 착하고 의롭게 살아가라는 윤리, 도덕적인 의미로 대부분 마무리한다는 점에서 많은 아쉬움이 있다. 그러나 성경은 정확하게 말씀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하여 율법을 명하신 목적은 이스라엘 자손에게 열조와 맺은 언약대로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가 큰 민족을 이루어 살도록 해 주셨으므로 언약대로 이루어 주신 여호와 하나님을 잊지 않고 기억하여 섬기게 하시려는 데 있었다고 말씀하고 있다. 신학자들은 이러한 언약을 ‘행위언약’이라고 말한다. 율법대로 행하면 복으로 가나안 땅에서 오래 살고, 어기면 저주로 인해 쫓겨나게 된다는 뜻으로 맺어진 언약이라고 하여 붙여진 명칭이라고 말한다.
행위언약인 율법 아래서 죄는 죄와 범죄로 정확하게 구분하여 설명해야 한다. 앞서 언급되었던 인간의 죄는 모세시대의 율법과 관계없이 인간 타락 이후 세상 모든 인간의 내면에 악성으로 가득 채워져 있는 것이다. 이러한 것을 전통신학에서는 ‘원죄(原罪)’라고 한다. 그리고 모세시대의 율법과 관계있는 죄는 인간이 출생할 때부터 존재하는 원죄에 의하여 율법 조항들을 범하는 행동을 ‘자범죄(自犯罪)’라고 한다. 그러므로 인간은 범죄했기 때문에 죄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 죄인이기 때문에 범죄를 하게 되는 것이다. 일반적인 도덕적 기준에서는 범죄 하지 않은 사람을 의인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기독교는 하나님 기준에서 타락한 모든 인간은 범죄 여부와 상관없이 선악과 사건으로 타락하게 되어 인간의 내면에 악한 것,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것이 구체적으로 실제로 존재하는 것을 ‘죄인’이라고 한다.

보편적으로 인간의 범죄가 율법을 범한 것과 관계가 있다고 한다. 그래서 율법의 규범으로 인간의 행동을 규제하여 범죄를 막으려고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러한 것은 잘못된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율법적으로 범죄 행위가 없다 하더라도 인간 내면에 사악한 속성은 항상 존재하므로 율법이 인간 내면의 사악성에 대해 근본적인 죄악을 절대로 해결할 수 없다. 사도바울과 다윗도 로마서 5장 12절과 시편 51편 5절에 언급하였듯이 모든 인간은 출생할 때부터 원죄로서의 내면적인 악성을 가지고 태어났다. 그러므로 모든 인간은 죄인이므로 범죄할 수밖에 없는 존재다. 그래서 이러한 인간의 ‘죄’와 ‘범죄’ 모두 모세시대의 율법 아래 있는 것이다. 예수님 당시에 바리새인들과 같은 사람들을 보더라도 잘못된 율법관이 외식, 위선, 경건주의, 금욕주의 등의 부정적인 결과를 가져왔다. 모세시대의 율법 중 일부를 그리스도인들이 반드시 지켜야 하는 도덕적 규범으로 잘못 인식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러한 현상들은 오늘날까지도 기독교의 순수성을 변질시켜왔다.

또한, 현대 기독교 신학계가 반드시 해결해야 할 과제 중 하나가 기독교 윤리 문제다. 오늘날까지 기독교는 인간의 범죄 행위를 모세 시대의 율법과 관련지어 해결하려고 노력해 왔다. 그리고 십계명을 도덕법의 강령으로 이해하여 율법의 계명을 기독교 윤리의 이상(理想)으로 제시해 인간의 삶을 규제해 왔다. 이로 인하여 이방종교와 유사한 도덕적 체계로 여겨 혼란만 야기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혼란을 가중케 하는 것 중 또 다른 하나는 성경을 조건문으로 기록한 한국어 성경 번역도 한몫했다. 그 예로 ‘그리하면’이 성경 여러 곳에 기록되어 있다. 히브리어로 ‘레마안(ַןַעְמל, le-ma'an)’이라고 하는데, 이는 주로 어떤 목적을 나타낼 때 사용하는 접속사 의미이다. 이러한 것을 보면 그 어떤 행위에 대한 응답의 조건문이 아니라 이미 하나님의 작정 안에 섭리하시려는 목적이 있다. 비록 조건문으로 번역되었더라도 성경을 큰 그림으로 보면 언약성취사적 측면에서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다음 호에 계속>

참고문헌    박용기, 『율법과 죄 그리고 은혜』(진리의말씀사)

글쓴이 프로필
글쓴이 : 이오현 편집국장 ((주)한국크리스천신문, 장안중앙교회 장로)
이메일 : donald257@nate.com

아름다운 사랑 (삼하 9:1~11, 마 5:43~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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