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예수교장로회연합회 교회동역자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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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4-12-26 09:45  기사 출력하기 글쓴이에게 메일보내기
 

신정론의 담론(談論) 7


우리가 알거니와 무릇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게 하려 함이니라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로마서 3장 19-21절 개역성경)

대개 기독교 신학은 율법을 도덕법, 의식법, 사회법 등 다양한 법으로 구분하여 정리한다. 이는 하나님께서 백성들에게 주신 율법의 정확한 목적을 모르고 오해함에서 비롯되었다고 볼 수 있다. 어떤 이들은 율법을 잘 지키면 의인이 되며 축복을 받는다고 하고, 어기면 죄인이 된다고 가르친다. 또한, 율법이라는 명분을 내세워 오늘날 교회 운영에 필요한 수입원 중 큰 비중을 차지하는 십일조를 말라기 3장 10절을 인용하여 온전하게 바치면 큰 복을 받는다고 교회당 강대상에서 크게 외치는 교회 지도자들도 있다. 심지어 과거 일부 목회자들은 십일조나 주일 헌금을 바칠 때 더러운 지폐는 은행에 가서 깨끗한 지폐로 교환하거나 다림질해서 바쳐야 하나님께서 열납 하신다고 가르친 적도 있다. 이러한 행위는 하나님을 아주 유치한 수준으로 추락시키는 모습이며, 다른 종교나 토속신앙의 영향을 받아 지극 정성을 강조함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러한 사상 속에서 헤어나지 못하면 십일조를 낼 때에도 십 원짜리 하나라도 안 빠뜨리려고 월급 전체의 십 분의 일이냐, 아니면 세금 등을 차감한 실수령액의 십 분의 일이냐를 고민하던 때가 기억난다. 지금 생각하면 참으로 쓴웃음밖에 안 나온다. 따라서 이러한 논리라면 십일조 바친 성도들은 모두 복을 받아 부자가 되거나 행복한 삶을 누려야 한다. 그러나 우리가 경험한 세상에서는 그렇지 않다. 그러면 성경에 오류가 있는 것일까? 이는 성경 전체가 말씀하고 있는 전후 문맥을 보고 판단하지 않고 지엽적인 것에만 집중해서 나온 생각들로 가까이 있는 물체만 볼 수 있는 흐릿한 구정물과 같은 것에 지나지 않는다.
여기서 온전한 십일조는 히브리서 9장 11절에서 12절까지 언급하신 말씀처럼 구약시대 때 백성들의 거짓되고 불완전한 제사를 예수 그리스도께서 영원한 제사장이 되시고 참 성전과 영원한 제물이 되어 영원한 제사를 드렸을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 자신이 거룩하게 구별된 십일조 예물이 되셔서 하나님께 온전하게 드린다는 예언적 의미를 담고 있다.
성경은 말씀하고 있다. 위의 본문에서 밝히고 있듯이 율법의 행위로는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다고 명확하게 말씀하고 있다. 율법 외에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신 목적은 율법과 선지자들의 예언으로 오셔서 증거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 사역으로만 오직 의롭다 하심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다수의 기독교 지도자들은 이러한 말씀들을 왜 외면할까? 성경을 타 종교와 동일한 경전으로 생각하는 것은 아닐까? 율법을 지켜야만 의인이 될 수 있다고 하는 이들이 주장한 논리대로라면 로마서를 기록한 사도가 이단자가 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이번 호에는 율법과 죄는 어떠한 관계가 있는지에 대해 알아보려고 한다. 먼저 앞서 밝힌 죄의 개념에 대해 다시 간단히 정리해 보려고 한다. 창세전 하나님의 절대적인 관념 속에 ‘싫으심’의 ‘악(ער 라아)’과 ‘싫으신 것’ 곧 ‘악한 것’이 실제로 존재해 있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하지 말라 하신 것 즉, 하나님께서 싫어하신 것의 대상이 아담과 하와의 내면에 구체화 된 것, 선악과를 따 먹고 싶은 탐욕이 ‘죄’다. 이로 말미암아 선악과를 따 먹음으로 ‘범죄’가 구성되었다. 그리고 아담 범죄 이후 인간들의 내면에는 노아 홍수 사건, 롯의 소돔성 멸망 사건처럼 죄악이 가득했다. 그러나 사람들은 모세시대 때 율법이 있기 전까지는 죄를 죄로 여기지 않았다.(로마서 5장 13절 참조) 그러므로 율법을 위범(違犯)한 것이 죄가 아니라 인간의 내면 구체화 된 것 즉, 하나님께서 싫어하시는 것, 악성에 따른 탐욕, 욕망, 욕심, 욕구 등이 ‘죄’이다. 앞서 나열한 근거로 율법과 죄의 관계에 있어서 율법의 효능이 무엇인가를 두 가지로 나누어 살펴보려고 한다.
첫 번째는 율법은 죄를 깨닫게 하는 효능이 있다. 아담과 하와가 죄인임을 알게 된 이유는 하나님께서 금과법을 명하셨기 때문이다. 선악과를 따 먹지 말라는 금과법을 명하지 않으셨다면 설령 이들이 선악과를 따 먹었어도 죄가 되는 것을 알지 못했다. 왜냐하면 아담과 하와의 내면에 하나님께서 싫어하신 것, 따 먹지 말라는 것이 이들의 내면에 구체적인 것인 죄로 드러나지 않기 때문이다.
아담 이후 모든 인간은 에덴동산의 금과법 같은 법을 직접적으로 범한 사실은 없다. 그러나 에덴동산의 선악과 사건으로 말미암아 온 인류는 죄악이 관영(貫盈)한 상태에서 온갖 범죄를 자행한 것을 성경에서 우리는 목격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율법을 명하시기 전까지는 죄를 위범했지만, 그것이 죄라는 사실을 사람들은 깨닫지 못했다. 모세시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명하신 율법으로 인하여 정죄(定罪)되어 죄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러므로 율법은 사람들이 위범했을 때 그러한 사실이 범죄라는 것을 깨닫게 해주는 것, 즉 정죄해 주는 기능으로서의 율법이 인간들에게는 필수 조건이었다. 또한, 모든 인간은 출생부터 하나님께서 싫어하시는 것의 구체적인 실재인 사악한 죄성을 가지고 태어난다. 이러한 것을 뒷받침해 주는 말씀이 로마서 7장 15절에서 23절까지 내용으로, 사도 바울이 자기 내면에 있는 죄의 법이 자기가 원하지 아니하는 행동을 하게 된다는 것을 보면 인간들의 범죄에 대한 필요성을 말씀해 주고 있다.
계속해서 사도 바울은 로마교회 성도들에게 보내는 편지 내용에서 하나님께서 백성들에게 율법을 주신 목적과 율법의 용도를 자세하게 설명해 주었다. 로마서 3장 19절에서 20절까지는 율법으로 죄를 깨닫게 한다. 7장 7절은 율법으로 말미암아 죄를 알게 한다. 7장 13절은 율법으로 죄를 심히 죄 되게 한다. 5장 20절에서는 율법이 가입(加入)한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한다. 4장 15절에서는 율법이 없는 곳에서는 범함도 없었다고 정확하게 언급해 주고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인간들에게 율법을 주신 목적 중의 하나는 인간 스스로 깨닫지 못하는 죄를 죄가 되는 것을 알게 함과 동시에 깨닫게 하는 방편이었다.

두 번째는 율법은 죄인을 죽게 하는 효능이 있다. 율법 속에 하나님께서 싫어하시는 것 그 대상이 구체화 된 인간의 죄로 죄가 드러나게 하여 인간이 죄가 되는 줄을 왜 알게 하셨을까? 라는 이러한 의문에 율법으로 인간을 심히 죄인 되게 해서 죽게 하시려는 것이라고 성경에서 명확하게 해답을 알려 주고 있다. 하나님께서 에덴동산에서 아담에게 선악과를 따 먹지 말라고 하시면서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는다고 하셨다. 이렇게 말씀하신 것을 전통신학자들은 행위에 따른 언약 또는 계약이라고 말한다. 이들은 이러한 것을 인간과 인간 사이에 맺는 약속처럼 이해한다. 그러나 하나님과 아담이 대등한 관계에서 맺은 약속이 아니라 금과법은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아담에게 하신 절대적인 언약이므로 인간의 행위 조건에 의해 이행 여부에 따라 하나님께서 벌을 내리시는 것은 아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아담의 행위 여부에 따라 결정을 내리신다면 인간인 아담의 의지 결정에 따라 하나님의 절대적 의지가 결정되었기 때문에 하나님은 아담보다도 못한 신이 될 수밖에 없다.
에덴동산에서 금과법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시니라(창세기 2장 17절 개역성경)” 라는 것을 문자적으로 보면 하나님의 명령으로 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 절대적이면서도 수직적인 언약으로 봐야 한다. 앞서 다양하게 밝혔듯이 ‘먹지 말라’는 행위 조건의 전제는 이미 하나님의 작정 속에 에덴동산 구석이 아닌 동산 중앙에 선악과를 나게 하셔서 인간인 아담을 죽이기로 되어 있었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여기서의 죽음은 육적인 죽음이 아니라 생령 아담이 영적으로 죽는다는 것이다. 아담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으면 하나님과 동일하게 선악을 알게 된다. 그리고 아담이 생각하는 기준에 따라 가치판단을 하게 되므로 하나님과 같은 심판자가 된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선과 악을 아는 아담을 영적으로 죽이신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주신 행위 조건은 아담을 죽게 하시는 조건이었다.
하나님께서 왜 아담으로 하여금 선악과를 따 먹고 죄인 되게 하셨는가에 대한 해답을 특별계시인 성경을 통해 명쾌하게 알려 주시고 있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율법을 주어 죄로 심히 죄 되게 하시는 것은 그 율법으로 인해 율법의 저주 아래서 죽게 하시려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이러한 말씀은 아담과 이스라엘 택한 백성, 예수 그리스도(갈라디아서 3장 13절 참조), 성도들과 전 인류에게 동등하게 적용된다. 그러므로 율법과 죄의 관계는 인간을 죄인 되게 하여 죽게 하는 데 있어 따로 분리하여 논할 수 없는 동반자와 같다. (로마서 7장 9절에서 13절까지 참조)
그리고 하나님께서 백성들에게 율법을 주어 죄인 되게 하셔서 죽게 하시는 섭리의 목적은 무엇일까. 그 목적은 택한 백성들을 율법의 저주 아래서 죽게 하셨다가 살게 하시려는 것이다. 그러나 불택자들은 영원히 죽게 하시려는 데 있다. 하나님께서 택한 백성들에게 율법을 주어 죄로 죄가 되게 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의를 드러내시려는 것이고 택한 자로 하여금 죄로 인하여 죽게 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의로 살게 하시려는 것이다.(갈라디아서 2장 19절, 3장 21절, 로마서 3장 25절, 26절 참조) 다시 정리하면 하나님께서 택한 백성들이 스스로의 행위에 의한 의로 살지 못하게 하시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으로 의롭다고 하시는 하나님의 의로 살게 하시려고 죽게 하는 율법을 택한 백성들에게 주어 죄인이 되게 하셔서 율법 아래서 죽게 하시려는 목적이 있었다.

율법과 죄와의 관계에 있어서 수많은 신학적 난제들이 쌓여 있다. 이러한 신학적인 난제들의 직접적인 원인은 하나님께서 에덴동산에 선과 악을 알게 하는 실과를 동산 중앙에 나게 하셔서 따 먹도록 하신 것을 윤리 도덕적인 측면에서 접근한 신학자들은 선하신 하나님께서 어떻게 그렇게 하실 수 있냐는 반문에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다. 성경이 명확하게 밝히고 있는데도 이러한 사유로 그러한 것을 부정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모세 시대의 율법과 아담이 타락하기 전에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 안에 좋으심과 싫으심 그리고 좋아하시는 것과 싫어하시는 것이 관념으로 존재하였던 것을 에덴동산 중앙에 그것도 보암직하고 먹음직스러운 선악과를 자라게 하셨다. 그러므로 ‘악’은 하나님께서 선악과를 통하여 이 세상에서 계시 섭리의 방법으로 사용하셨다. 더 나아가 이러한 것은 창세전에 하나님께서 섭리하신 영원한 작정에 기초한다. 그런데 기독교 신학자 대부분은 하나님과 악의 관계에 있어서 성경이 확증해 주는데도 불구하고 별개라고 강하게 부정하고 있다. 이러한 부정이 오늘날 기독교 신학계가 혼돈의 세계로 빠져든 가장 큰 원인이 되었다.
<다음 호에 계속>

참고문헌    박용기, 『율법과 죄 그리고 은혜』, 『무엇인가Ⅰ』(진리의말씀사)

글쓴이 프로필
글쓴이 : 이오현 편집국장 ((주)한국크리스천신문, 장안중앙교회 장로)
이메일 : donald257@nate.com

아름다운 사랑 (삼하 9:1~11, 마 5:43~4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