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양약이 필요한 한국교회
위는, 지난 글 <앓고 있는 한국교회>에 대하여, 하나의 대안이다. 한국교회가 앓고 있는 중병(重病)은, 십일조(十一條)와 새벽회(早期會)와 그리고 착각병(錯覺病) 등과 같은 것들이다. 이것들 외에도 여러 방면에서 세뇌(洗腦)되어 있을 정도로 심각히 앓고 있다. 이것들은 근본적으로 우상(偶像)과 관련되어 있다. 우상은 최대의 악이다.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惡)의 뿌리이기 때문이다. 이제 간결하나마 처방(處方)에 좋은 양약(良藥)을 제시하고 싶다. 그 처방에 맞는 약은 하나밖에 없다. 그 하나는 바로 성경이다. 성경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의 연결이다. 마치 목을 통하여, 머리와 목 이하의 신체가 서로 연결되어 있는 것과 같다. 이런 의미에서 성경의 연결은 목숨이며 생명이다. 이 짧은 글을 작성하여 처방전(處方箋;prescription)으로 비유하고 싶다. 한국교회가 성경에서 관심이 멀어지고 흥미를 잃었기 때문에, 이 점을 감안하여 관심과 흥미를 자극하기 위해서이다. 성경의 위치적인 연결부를 강조하여 간단히 제시한다.
첫째, 몸통과 사지에 구약(舊藥)이 필요하다. 이 구약(舊藥)은 구약성경으로 비유한 것이다. 한국교회는 설교의 선택에서, 그 비중을 보면 신약성경이 구약성경보다 더 높다. 이것은 무엇보다 성경을 보는 관점과 관계되어 있기 때문이다. 구약성경은 크게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바로 역사서(창~에)와 시가서(욥~아)와 선지서(사~말)이다. 구약성경 배열의 순서상 중간에 위치하고 있는 것은 시가서이다. 역사서와 선지서의 중간에 위치하는 시가서는 욥기와 시편과 잠언과 전도서와 아가이다. 이것들은 그 각각의 명칭이 의미 있고 또 재미있는 점을 제시해 주고 있다. 이러한 것들은 근본적으로 성령의 감동으로 분명히 기록되었다. 성경을 기록한 기자들과 편집자(성도)는 바로 성령의 전(殿)이기 때문에, 그들 안에 머물고 있는 성령이 기자들과 후대의 편집자들을 모두 움직여서 오늘에 이르도록 했다. 이것들의 명칭은 기본적으로 시가(詩歌)적인 성격을 갖추고 있기 때문에 시가서로 묶여졌다. 이 기본적인 성격의 바탕 위에서 마치 다섯 손가락처럼 그 문학 작품의 표현상의 특징 때문에, 욥기(記)와 시편(篇)과 잠언(言)과 전도서(書)와 아가(歌)로 모두 연결되어 있다. 시가서는 그 자체로 마치 5장(藏)이나 다섯 손가락처럼 구조화되어 있다. 이 시가서는 앞에 있는 역사서와 뒤에 있는 선지서를 완전히 외면하고 독자적으로 그 가치를 지닐 수 있는가? 결코 그럴 수 없다. 만약 독자적으로 그 가치를 굳이 부여한다면 신학적인 의미는 사라지고 일반 문학적인 가치로만 남게 될 것이다. 창세기와 말라기서가 각각 구약성경의 시작과 끝에 위치해야 하는 것과도 분명히 관계되어 있다.
둘째, 머리와 얼굴에 신약(新藥)이 필요하다. 이 신약(新藥)은 신약성경을 비유한 것이다. 신약성경에서 여러 가지의 특징들을 고려하면, 사도행전을 중간적인 위치로 보아도 무리가 없을 것이다. 바로 앞의 요한복음 끝의 “……낱낱이 기록된다면 이 세상이라도 이 기록된 책을 두기에 부족할 줄 아노라”와 사도행전 시작의 “데오빌로여 내가 먼저 쓴 글에는 무릇 예수의 행하시며 …… 승천하신 날까지의 일을 기록하였노라”는 부분적으로 중요한 근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신약성경에서 4복음서는 예수에 의해서 성취되고, 그 뒤는 성령에 의해서 성취된다. 이러한 두 큰 내용에서, 사도행전은 그 중간에 위치하여 앞뒤로 입체적으로 잘 조화되고 있다. 성경의 시작인 창세기는 마치 발바닥과 같다. 성경의 마지막인 요한계시록은 마치 대뇌(大腦)와 같다. 한국교회가 성경을 상고하고 상용하는 데 있어서, 그 대부분의 조류(潮流)는 부분적인 구절을 내세우고 인용하는 분위기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은, 구약성경 전체와 신약성경 전체를 개관(槪觀)하여 개괄(槪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성경은 인생의 양약(良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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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프로필 글쓴이 : 박근호 목사 (중어중문학박사) 이메일 : yan825@hanmail.net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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