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신정론의 담론(談論) -Ⅱ
지난 호에 ‘신정론’의 정의와 현대신학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대표적인 두 신학자 이레니우스와 어거스틴이 주장한 신정론을 살펴보았다. 이들이 주장한 공통분모는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부여하였다는 ‘자유의지’이다. 과거부터 기독교 신학자들은 선(善)하신 하나님을 변호하기 위하여 악의 출발과 책임소재에서 하나님을 배제하고 인간들에게 죄를 전가할 목적으로 자유의지라는 올무를 대안으로 착안했다고 본다. 그럼 과연 하나님은 이들이 말하는 인간의 자유의지에서 기인된 죄악과 전혀 상관이 없을까? 지난 호에 언급했듯이 ‘성경 역사서에 나타난 하나님의 섭리 중에 인간들의 윤리·도덕 중심적 사상에 비추어 상식 이하의 사건들은 어떻게 설명해야 할 것인가?’에 대해 일반 종교처럼 선(善)을 보는 측면에서 난제 몇 가지 예를 들어보려고 한다.
그 예로 첫 번째, 여호와 하나님께서 창세기 6장 13절 “하나님이 노아에게 이르시되 모든 혈육 있는 자의 강포가 땅에 가득하므로 그 끝날이 내 앞에 이르렀으니 내가 그들을 땅과 함께 멸하리라”라고 언약하셨다. 그러므로 이 말씀대로 7장에서 인류 심판 때에 노아 가족 8명 외에 모든 인간을 홍수로 죽게 하셨다. 그들이 말하고 있는 윤리·도덕의 선하신 하나님이라면 백성들의 행위가 아무리 패괴하였어도 용서해 주셔야 마땅하지 않은가? 최근에도 우리 주변과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는 홍수, 지진, 대형 산불 등 재난 관련 뉴스 현장을 보면 우리들의 심정은 참으로 안타깝다. 그런데 앞서 홍수로 모든 인류를 멸하신 사건의 주체는 여호와 하나님이다.
두 번째, 하나님께서 출애굽 당시 내리신 열 가지 재앙과 애굽 군사들을 홍해에서 수장시키신 것이다. 선하신 하나님이 바로의 마음을 변화시킬 수 있는 다른 방법도 많이 있을 것인데 비단 이들이 이방인이지만 한두 명도 아니고 수많은 애굽 백성들의 장자를 죽이시고, 군사들을 바다에 빠뜨려 죽도록 하셨다. 그 처참한 현장을 상상해 보면 무엇이라 형언할 말이 없을 것이다. 학자들은 이 사건의 원인을 타락한 인간들의 자유의지를 소환하여 이것에서 비롯됐다고 하나님을 변호하려 할 것이다. 그래도 이들이 말하는 선하신 하나님은 그렇게 하시면 안 된다고 본다. 그런데 성경은 이렇게 대답하고 있다. “밤중에 여호와께서 애굽 땅에서 모든 처음 난 것 곧 위에 앉은 바로의 장자로부터 옥에 갇힌 사람의 장자까지와 생축의 처음 난 것을 다 치시매”(출 12:29)와 “여호와께서 애굽 사람들을 바다 가운데 엎으시니 물이 다시 흘러 병거들과 기병들을 덮되 그들의 뒤를 쫓아 바다에 들어간 바로의 군대를 다 덮고 하나도 남기지 아니하였더라”(출 14:27하~28)고 기록되어 있다. 이 두 역사적인 사건을 보면 확실하게 문장의 주어는 ‘여호와’이며, 여호와 하나님께서 하나도 남기지 아니하시고 죽게 하셨다고 확실하게 말씀하고 있다.
세 번째, 전통신학자들이 신정론을 담론할 때 자주 언급하는 성경 내용 중에 욥기서가 있다. 욥기 1장 1절에 욥은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더라”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러한 욥을 하나님께서는 사단에게 맡기셔서 망하게 하신다. 단순하게 생각하면 도저히 이해가 안 되는 일이다. 선하신 하나님이 어떻게 이럴 수 있는가 말이다. 일반적인 신학자들의 사고로는 해답을 찾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말씀하고 있다. 욥기 42장 1절에서 2절까지 “욥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가로되 주께서는 무소불능하시오며 무슨 경영이든지 못 이루실 것이 없는 줄 아오니”라고 욥기서 주제의 실마리를 알려 주신다. 여기서 우리가 눈여겨볼 것은 욥기서 전반부만 보고 판단할 것이 아니라 욥기서 전체를 면밀하게 구조를 파악하고 세 친구와 변론이 어떻게 전개되어 마무리되는지를 보면 왜 욥기 결론이 앞서 인용한 42장 1~2절인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성경 전체에서도 일반적으로 선하신 하나님으로 보는 시각에서는 이해하기가 어려운 숙제들이 대다수다. 그래서 보편적인 사고를 지닌 신학자들은 인간들에게 자유의지가 있다는 것을 빌미로 인간들에게 책임을 묻는다. 자유의지가 아니면 도저히 난해한 실타래를 풀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선의 개념이 고대 기독교 신학자들로부터 시작점에 문제가 있었다고 본다. 이러한 영향으로 이천 년 교회사에 엄청난 혼란을 초래했고 이러한 것들을 답습한 현재도 진행 중이다. 대개 신학자들은 성경에서 근거를 찾아 일관성, 통일성, 논리적으로 보기보다는 철학과 종교에 의한 사색적인 방법으로 원칙과 기준도 없는 생각과 판단에 좌우되는 상황 논리로 성도들에게 교육하고 있다. 인간에게 자유의지가 있다면 일원론은 물론 이원론도 아니고 다원론으로 갈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대개 사람들은 하나님께서는 인간들보다 차원이 다른 본성이 있다고 말하지만, 세상에 모든 일이 인간의 자유의지에 따라 좌우된다고 보기 때문이다.
성경을 철학적인 방법이나 지엽적으로 읽는 사람은 사도행전 8장 26절부터 31절에 등장하는 에티오피아 여왕 간다게의 내시처럼 아무리 성경을 열심히 읽는다고 하여도 올바른 선생이 없어서 그 깊은 뜻을 깨닫지 못한다. 그리고 이러한 부류의 사람들은 과거 신학에 매달려 허송세월하며 이곳저곳을 기웃거리며 떠돌아다니는, 뼈대만 앙상하고 허기진 신학의 방랑객이 될 수밖에 없다. 또한, 이들은 자신이 세운 이론의 탑이 기초가 잘못되었다 하여도 허물려 하지 않는다. 이는 그동안 쌓은 크나큰 자긍심이 나락으로 떨어지는 것을 두려워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명쾌한 해답이 있어도 그들은 도리어 그것에 이단의 탈을 씌워 배척하려고만 한다. 이제는 아닌 것은 아니라고 할 수 있는 세상이 도래한 것 같다. 왜냐하면, 과거 기독교 문화와 더불어 경제 대국으로서 영화를 누렸던 국가들이 경제 몰락과 함께 기독교도 동반 쇠퇴하는 과정에서 드러나는 지도자들의 타락과 신학의 허구들을 보면서, 모든 기독교 신학이 도긴개긴이라는 것이 만천하에 드러났고 성도들이 직접 그러한 것들을 목격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는 아직 경제적인 면에서는 풍요를 누리고 있지만, 많은 교회 지도자들이 타락하고 우후죽순처럼 목회자마다 독특한 용어들을 사용하여 다양한 신학들을 내세워 가르치고 있다. 그러나 비성경적, 비논리적인 영향 등으로 기독교인의 감소와 교회학교 미운영 교회의 증가가 교회 쇠퇴기에 진입했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다. 이에 따라 서서히 꺼져가는 한국교회에 바람막이가 되었으면 하는 심정으로, 다음 호에는 성경을 의미분석으로 체계화시킨 성경신학(The Bible Theology)을 중심으로 모순에 모순을 낳고 있는 전통신학의 선과 악의 오류를 여러분과 함께 교정해 보려고 한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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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프로필 글쓴이 : 이오현 편집국장 ((주)한국크리스천신문, 장안중앙교회 장로) 이메일 : donald257@nate.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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