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신정론의 담론(談論) -Ⅲ
여호와 하나님이 그 땅에서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 하시니 동산 가운데에는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더라(창세기 2장 9절 개역성경)
한국교회 교단들은 자긍심을 가지고 각자의 전통신학을 답습, 계승하며 교리들을 가르쳐 왔다. 그런데 작금의 현실에서는 각 교단의 독특한 신학의 정체성도 언제부턴가 그 발자취가 사라져 버렸다. 특히, 칼빈의 신학사상을 바탕으로 하는 한국교회의 대표적인 교단도, 하나님의 절대주권에 따른 칼빈의 5대 교리와 예정론을 언급하는 것은 옛날 이야기가 되었다. 이들 중에 소수들만 칼빈신학을 이어가고 있지만, 예정론에 있어서 선택과 유기 즉, ‘이중예정’은 인본주의 신학에 짙게 물들어 버린 성도들에겐 호응을 얻지 못하고 있다. 이는 시대의 변화에 따른 전통종교의 유연성과 사색적인 근원에서 출발한 전통신학을 이어받은 현대신학이 성경적 논거에 대한 질문에는 묵묵부답이고 과정 신학에만 충실한 나머지 반기독교적인 세력에 대항하는 과정에서 무리수를 두어, 윤리 도덕적인 측면에서 선(善)하신 하나님을 변호하려고 했던 결과물이다. 그리고 어느 순간 유일신이신 하나님의 절대 주권에 의한 신본주의가 인간의 자유의지에 의한 선악과 사건을 구실 삼아 이원론적인 인본주의 신학으로 변해 있었다. 그런데 더 큰 문제는 대부분의 성도가 이러한 잘못된 신학을 감지 못하고 맹신을 하는 데 있다. 따라서 이번 호는 성경신학(The Bible Theology)을 중심으로 현대신학의 오류와 반기독교적인 세력을 향하여 ‘신정론(神正論, theodicy)’을 담론하려고 한다. 따라서 성경을 근거로 성경신학에서 말하고 있는 선악과 사건 이전부터 존재했던 악의 기원을 살펴보려고 한다.
첫 번째 창세기 1장 2절에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신은 수면에 운행하시니라”로 기록되어 있다. 이 본문에서 주목해야 할 단어 ‘흑암’은 히브리어로 ‘호쉐크( ְךֶׁשח, choshech)’, 헬라어로 ‘스코토스(σκoτοc, skotos)’로 어두움, 영적 어두움, 악의 권세로 상징되기도 한다. 이 문맥으로 보아 확실히 흑암은 인간 타락 전에 이미 존재하고 있었으며, 타락된 세상을 지배하는 악(죄) 같은 속성으로 흑암권세의 원형과 모체이다.
이렇게 보는 성경 근거는 골로새서 1장 13절부터 14절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그 아들 안에서 우리가 구속 곧 죄 사함을 얻었도다”이다. 이는 죄로 말미암아 흑암의 권세에 가둠을 당했는데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죄 사함을 얻었다고 말씀한다. 그러므로 흑암의 권세와 죄(악)가 연관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요한계시록 20장 3절에도 “무저갱에 던져 잠그고 그 위에 인봉하여 천 년이 차도록 다시는 만국을 미혹하지 못하게 하였다가 그 후에는 반드시 잠깐 놓이리라”라고 했다. 여기 무저갱도 역시 흑암의 권세가 지배하는 장소로 말하고 있다. 유다서 1장 13절에서도 “자기의 수치의 거품을 뿜는 바다의 거친 물결이요 영원히 예비된 캄캄한 흑암에 돌아갈 유리하는 별들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 내용은 유다가 적그리스도의 속성들을 말하는 것 중 하나인데, 우주에 별들이 세상 종말에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미 예비한 영원한 흑암으로 돌아가는 것과 같이 적그리스도도 역시 최종적으로 어두운 종말을 맞이할 자들이라는 뜻으로 해석된다. 그리고 유다서 1장 6절에서 “또 자기 지위를 지키지 아니하고 자기 처소를 떠난 천사들을 큰 날의 심판까지 영원한 결박으로 흑암에 가두셨으며”라고 말씀하고 있다. 유다는 하나님께서 범죄한 천사들을 최후 심판 때까지 활동하지 못하도록 영원한 흑암 속에 가두셨다고 했다. 또한, 베드로후서 2장 4절에도 “하나님이 범죄한 천사들을 용서하지 아니하시고 지옥에 던져 어두운 구덩이에 두어 심판 때까지 지키게 하셨으며”라고 말하고 있다. 앞의 구절들에서 언급했던 ‘흑암’과 연관된 ‘흑암의 권세’, ‘무저갱’, ‘영원히 예비된 캄캄한 흑암’, ‘영원한 결박으로 흑암’, ‘지옥에 던져 어두운 구덩이’는 악(죄)과 동일한 속성의 개념들이다. 그러므로 창세기 1장 2절에 인간 타락 이전에 있었던 ‘흑암’은 흑암권세의 원형과 모체이다.
두 번째 창세기 1장 3절에서 5절까지 “하나님이 가라사대 빛이 있으라 하시매 빛이 있었고 그 빛이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나님이 빛과 어두움을 나누사 빛을 낮이라 칭하시고 어두움을 밤이라 칭하시니라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니라”라고 기록되어 있다. 본문의 ‘빛’은 넷째 날에 창조된 오늘날 우리가 살고 있는 태양계를 말하는 것이 아니고 영적인 ‘빛’으로 오신 그리스도의 영적 형상이다. 요한복음 1장 3절에서 5절까지 살펴보면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와 요한복음 9장 4절에서 5절까지 “때가 아직 낮이매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 밤이 오리니 그때는 아무도 일할 수 없느니라 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세상의 빛이로라”라고 증거하고 있다. 그리고 ‘어두움’은 타락된 세상에서 활동하는 어두운 권세의 영적 형상이다. 그 예로 누가복음 22장 53절에 “내가 날마다 너희와 함께 성전에 있을 때에 내게 손을 대지 아니하였도다 그러나 이제는 너희 때요 어두움의 권세로다 하시더라”라고 말씀하시고 있다. 이러한 증거들을 보면 인간의 타락 이전에 선과 악이 있었음이 창조 첫째 날 과정에서도 드러나고 있다.
세 번째 앞서 인용한 창세기 2장 9절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더라”에서 선악과를 따 먹기 전에 이미 선과 악의 개념이 존재했다는 것을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다. 그것도 보암직, 먹음직스러운 좋은 나무를 동산 가운데 말이다. 그리고 선악과는 인간이 그 실과를 먹으면 하나님이 싫어하심의 악을 알게 되어 영적 죽음에 이르게 하는 나무이다. 또한, 창세기 2장 17절에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시니라”라고 선과 악이 인간 타락 이전에 있었음을 한 번 더 증거하고 있다. 또한, 이 본문에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는 ‘네가 먹는 날에 반드시 죽어야 하므로 네가 죽을 것이다’로 번역해야 한다. 그 어떤 조건문이나 가정문이 되어서는 안 되며 확정문이 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오늘날 기독교의 탄생과 존재에 대한 여호와 하나님의 언약이기 때문이다.
앞서 밝힌 세 가지 증거들을 짧게 요약해서 나열했기 때문에 부족해 보일 수도 있지만 ‘흑암’과 ‘어두움’ 그리고 ‘선악과에 따른 선과 악’의 개념은 아담 타락 이전에 있었기 때문에 인간의 자유의지로 선악과 사건이 비롯되어 악의 기원이 되었다는 것은 어딘가 많이 궁색해 보인다. 그리고 일반 성도들이 이러한 신학을 이해하기에는 쉬운 일은 아닌 것 같다. 왜냐하면 이미 이들은 선하신 하나님은 악과는 동떨어진 것으로 이원론을 기초로 한 신학과 동반되어 고정관념화되어 있기 때문이다. 현대신학은 인간의 타락을 기점으로 범죄에 대한 십자가 사건으로 말미암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에 중점을 두고 대다수가 학문을 다루고 있다. 이러한 신학의 출발로 인해 오늘날 교회당 안팎에 커다란 십자가가 걸려있거나 세워져 있다. 십자가 사건에 관하여 그 속에 담고 있는 의미를 중점적으로 보면서 이 일이 여호와 하나님의 계시의 한 방편으로서 봐야 하는 것에 대해 많이 퇴색해 보인다. 기독교는 특정 형상들을 세워놓고 섬기는 가톨릭이나 여타 종교 그리고 각 나라 민족성에 따른 토속신앙처럼 접근해서는 안 된다고 본다. 어떻게 보면 십자가 사건을 부인하려고 하는 것처럼 오해할 수도 있으나 그것은 아니다. 일반적인 종교들과 다른 기독교는 보다 더 고상하고 고차원적 측면에서 성경을 고찰해야 한다고 보기 때문이다. 성경에 담겨진 방대한 진리의 보화를 작은 지면에 표현한다는 것은 실로 어려운 일이다. 많은 세월이 필요하겠지만 성경의 난제들을 천천히 한 가지씩 말씀의 나눔을 통해 성도들과 서로 교통해 보려고 한다.(박용기, 『성경강론 1』, 『성경강론 18』(진리의말씀사) 참고)
<다음 호에 계속>
|
글쓴이 프로필 글쓴이 : 이오현 편집국장 ((주)한국크리스천신문, 장안중앙교회 장로) 이메일 : donald257@nate.com |
대칭 속에 담긴 창조주의 섭리 |
신정론의 담론(談論) -Ⅱ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