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예수교장로회연합회 교회동역자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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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4-10-22 10:42  기사 출력하기 글쓴이에게 메일보내기
 

신정론의 담론(談論) -Ⅳ


여호와께서 온갖 것을 그 씌움에 적당하게 지으셨나니 악인도 악한 날에 적당하게 하셨느니라(잠언 16장 4절. 개역성경)

지난 호에는 악의 기원에 대해 성경에서 근거를 찾아서 살펴보았다. 창세기 1장 2절 ‘흑암’, 4절, 5절 ‘빛과 어두움’, 2장 9절, 17절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는 ‘악’이 창세기 3장 6절 선악과를 따 먹는 사건 이전에 이미 존재했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다. 그동안 전통신학자들이 펼쳤던 신학 이론, 즉 인간의 자유의지에 의한 선악과 사건으로 말미암아 악이 출현했다는 주장이 명백한 오류라는 것을 성경에서 확인해 보았다. 그리고 앞서 언급한 잠언 16장 4절은 악인도 여호와 하나님께서 정하신 뜻에 따라 악한 날에 쓰시기에 적당하게 지으신 자들이라는 의미로 말씀한 것이다. 그러므로 악인이 하고자 하는 모든 계획도 여호와 하나님께서 창세전에 예정하신 뜻을 이루기 위한 계시이다. 또한, 에베소서 3장 11절 “곧 영원부터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예정하신 뜻대로 하신 것이라”는 말씀도 하나님께서 창세전 영원하신 작정 가운데 예정하신 뜻을 따라 택한 자들을 부르셨다는 의미이다. 이러한 근거로 선과 악은 창세전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 속에 내포하고 있는 계시의 한 방편임이 틀림없다.
그런데도 예나 지금이나 기독교 지도자와 신학자들은 인간 타락 이전에 악이 있었다는 것에 대해 회피한다. 왜냐하면, 이들은 일반적인 종교의 신처럼 착하신 하나님으로 보았고, 선과 악이 대립하는 이원론적인 사상으로 정립한 전통신학의 경로에서 이탈하면 이단자로 낙인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러한 기독교 지도자들의 가르침을 받는 사람들은 인도자가 어디로 인도하는지도 모르고 앞서가는 자의 뒤만 보고 따라가는 양의 무리와 같은 신세가 될 수밖에 없다. 다시 말하지만, 기독교는 반드시 절대주권에 의한 일원론적인 신학 사상에서 오직 여호와 하나님만이 전지전능한 유일신임을 인식해야 한다. 유치하게 하나님은 ‘선’, 사단은 ‘악’을 다스리면서 서로 대립하는 그러한 신으로 보아서는 안 된다. 그래서 이번에는 이천 년 교회사에 막대한 혼란을 준 선(善)하신, 즉 착하신 하나님의 ‘선’과 ‘악’의 개념을 성경신학(The Bible Theology)은 어떠한 관점에서 정의하고 있는지 알아보려고 한다.
보편적인 기독교 신학과 철학은 인간의 도덕성에 따른 윤리적인 측면에서 절대가 아닌 상대적인 가치평가를 가지고 선과 악을 평가한다. 그러나 성경에는 하나님의 절대 주권에 따른 이성 판단으로 하나님 기준에서 ‘좋으심’을 ‘선’, ‘싫으심’을 ‘악’이라고 정의한다. 이러한 개념들은 철학 사상이나 이원론적인 신학 사상을 배제한 순수한 성경에 의해 신학을 정립하는 데 있어 첫 디딤돌로서 매우 중요한 개념들이다. 그래서 성경에서 더 분명한 근거를 찾아 확인시키기 위해 자세히 살펴보려고 한다.
그 좋은 예로 창세기 2장 9절, 17절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는 히브리어 표기로 ‘עֵץ הַדַּעַת טוֹב וָרָע(에츠 하다아트 토브 바라아)’라고 한다. 여기에서 ‘עֵץ(에츠)’는 ‘나무’, ‘דַּעַת(다아트)’는 ‘지식’, ‘טוֹב(토브)’는 ‘선’, ‘רָע(라아)’는 ‘악’을 의미한다. 이 문구에서 관심 있게 볼 부분은 ‘טוֹב(토브)’ ‘선’과 ‘רָע(라아)’, ‘악’이라는 단어이다. 먼저 ‘טוֹב(토브)’의 뜻이 ‘선’이라고 하는데 이것이 일반적인 사람들이 알고 있는 ‘착할 선’인지 아니면 다른 의미가 있는지를 알아보기 위해 성경에서 다른 구절을 찾아보려고 한다.
창세기에 하나님께서 엿새 동안 천지를 창조하시면서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는 문장이 있다. 이는 “וַיֵּרֶא אֱלֹהִים כִּי-טוֹב(바이예라 엘로힘 키 토브)”로 표기하며 각각의 단어별 뜻은 ‘וַיֵּרֶא(바예레)’는 ‘그리고 보았다’, ‘אֱלֹהִים(엘로힘)’은 ‘하나님’, ‘כִּי(키)’는 ‘~때문에, ~라는 것’, ‘טוֹב(토브)’는 ‘좋음, 좋다’이다. 여기 ‘좋다’는 히브리어로 ‘טוֹב(토브)’라고 하는데 이는 ‘선하다’, ‘완전하다’, ‘조화’, ‘의도’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한 것이 선하고 완전하며 조화롭게 의도한 목적에 부합하여 자충족(自充足) 하셨다는 것에서 “좋았더라”고 하셨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스스로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한 것’이며 ‘좋은 것’이었다. 이 측면에서 ‘선악과’에서의 ‘선’과 ‘좋았더라’에서 ‘좋다’는 히브리어 ‘טוֹב(토브)’로 동일하게 표기하고 있어 본질적인 의미는 같다. 그래서 우리가 그동안 알고 있었던 도덕적으로 ‘착할 선’을 차원이 다른 ‘좋을 선’으로 봐야 하며, 더불어 하나님께 내재되어 있는 ‘좋으심’을 ‘선’으로 정의해야 한다. 그리고 앞서 언급한 ‘선’과 ‘선한 것’의 의미는 다르다. 곧 ‘선’은 하나님의 입장에서 ‘좋으심’ 그 자체이고, ‘선한 것’은 좋으신 대상을 말한다.
다음은 히브리어 ‘רָע(라아)’라는 ‘악’에 대해 살펴보려고 한다. 악은 앞서 언급된 바와 같이 인간 타락 이전에 아니 창세전에 하나님 작정(로고스 Logos) 속에 있었다. 이러한 증거를 이사야 45장 7절 “나는 빛도 짓고 어두움도 창조하며 나는 평안도 짓고 환난도 창조하나니 나는 여호와라 이 모든 일을 행하는 자니라 하였노라”에서 찾아볼 수 있다. 히브리어 원문은 “אֲנִי בֹּורֵא אֹור וּבֹורֵא חֹשֶׁךְ, עֹשֶׂה שָׁלֹום וּבֹורֵא רָע; אֲנִי יְהוָה, עֹשֶׂה כָּל-אֵלֶּה.(아니 보레 오르 우보레 호셰크, 오세 샬롬 우보레 라아; 아니 야훼, 오세 칼 엘레)”이다. 이 구절의 의미는 ‘빛’과 ‘어두움’과 ‘평안’과 ‘환난’은 서로 대립적인 관계로 보일 수도 있으나 모두가 여호와 하나님께서 창조하시고 주관하신다는 뜻이다. 이 문장에서 주목해야 할 어휘 중 음영으로 표시한 רָע(라아)는 악 또는 환란의 뜻인데 한국어 성경에는 환란으로 번역되어 있다. 그러므로 ‘악’도 하나님께서 창조했다고 증거하고 있다. 악 ‘רָע(라아)’는 본질적으로 ‘좋으심’, ‘선’과는 상반되는 ‘싫으심’, ‘악’이다. 그러므로 여기서는 하나님께 내재되어 있는 ‘싫으심’을 ‘악’으로 정의해야 한다. 그러면 하나님의 ‘싫으심’의 대상이 되는 ‘싫으신 것’, 하나님 보시기에 ‘악한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그 예로 창세기에서는 하나님 스스로의 형상을 따라 만드신 아담이 ‘선과 악을 아는 것’ 그 자체를 말한다. 다시 말하면 아담이 에덴동산에서 하나님께서 금하신 선악과를 먹고 ‘선과 악을 아는 것’ 그 자체를 싫어하는 것을 말한다.
결론적으로 선과 악의 개념은 모든 신학 사상을 정립하는 시발점에 있어서 아주 기초이면서도 신앙의 방향성에 있어서 핵심적인 분야이다. 선과 악의 정의와 이해는 각 종교나 철학 체계의 본질을 드러내는 중요한 요소로 작용하며, 이것은 시금석(試金石)의 역할을 한다. 그래서 앞부분에서 열거한 논거들을 간략하게 요약해 보려고 한다. 선과 악은 창세전에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Logos 로고스) 가운데 ‘좋으심’의 ‘선’과 ‘싫으심’의 ‘악’이 관념적으로 존재했고 천지창조 때는 좋으신 것과 싫으신 것의 대상인 ‘선악과’를 인간 타락 이전에 창조로 계시하셨다. 이러한 것을 성경신학(The Bible Theology)적인 관점에선 ‘선(좋으심)’과 ‘악(싫으심)’이 ‘관념적 실재(觀念的 實在)’라면 ‘좋으신 것(선한 것)’과 ‘싫으신 것(악한 것)’은 구체적 실재(具體的 實在)라고 한다. 덧붙이자면 하나님은 절대이성기능에 의한 가치판단 결과에 따라 절대감성기능으로 좋아도 하시고, 싫어도 하시며, 절대의지기능에 의하여 취사선택(取捨選擇)을 하시는 전능자이다.(에베소서 1장 5절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이러한 것으로 볼 때 과거부터 현재까지 기독교 신학이 오류인 ‘착할 선’의 하나님이 아니라 ‘좋을 선’의 하나님으로 개념 변화가 있어야 현재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는 사고, 사건들이 해석될 수 있다. 그러나 대개 사람들은 앞의 개념적인 것들을 인정하려고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대개 보편타당성이 있어야 믿으려고 한다. 그런데 이 보편타당성도 기준점을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달라질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신학자, 교회 지도자들은 다양한 인본주의적 목회를 위한 기술이 아닌 지난날 종교개혁자들이 외쳤던 것처럼 오직 성경만이 기준점이고 해답이 있음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이번에는 선과 악의 관념적인 것에 대한 정의에 알아보았다. 계속해서 다음 호에는 구체적 실재, ‘좋으신 것(선한 것)’과 ‘싫으신 것(악한 것)’이 무엇과 연결되는지에 대해 담론하려고 한다.
<다음 호에 계속>

참고문헌    박용기, 『율법과 죄 그리고 은혜』, 『성경강론 8권』(진리의말씀사)

글쓴이 프로필
글쓴이 : 이오현 편집국장 ((주)한국크리스천신문, 장안중앙교회 장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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