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예수교장로회연합회 교회동역자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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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6-03-31 17:21  기사 출력하기 글쓴이에게 메일보내기
 

종교 건축과 기독교 건축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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넷째 나라는 강하기가 철 같으리니 철은 모든 물건을 부숴뜨리고 이기는 것이라 철이 모든 것을 부수는 것같이 그 나라가 뭇 나라를 부숴뜨리고 빻을 것이며 왕께서 그 발과 발가락이 얼마는 토기장이의 진흙이요 얼마는 철인 것을 보셨은즉 그 나라가 나누일 것이며 왕께서 철과 진흙이 섞인 것을 보셨은즉 그 나라가 철의 든든함이 있을 것이나 그 발가락이 얼마는 철이요 얼마는 진흙인즉 그 나라가 얼마는 든든하고 얼마는 부숴질만할 것이며 왕께서 철과 진흙이 섞인 것을 보셨은즉 그들이 다른 인종과 서로 섞일 것이나 피차에 합하지 아니함이 철과 진흙이 합하지 않음과 같으리이다 (다니엘, 2장 40절~43절 개역성경)
최근 중동 사태와 관련하여 세계인의 이목이 되는 미국의 백악관에서는 전쟁 관련 메시지를 연일 TV 방송을 통해 전달하고 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할 점은 TV 화면의 배경으로 등장하는 백악관 건물이다. 이 건축물은 신고전주의 건축(Neoclassical architecture) 양식으로, 18세기 후반부터 19세기에 이르기까지 유럽과 미국에서 유행했던 건축 양식이다. 이 양식은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건축을 이상적인 모델로 삼아 재현한 것이다. 그렇다면 과거 기독교 국가의 이미지를 지녔던 미국이 왜 자국의 상징인 백악관을 고대 이교도 신전과 유사한 형태로 건설하였을까? 이에 대해 그들은 이 건축 양식이 다신교를 믿었던 고대인들의 종교성과는 무관하며, 고대 로마의 공화정 정신을 이어받은 오늘날 민주주의 국가 권력의 상징성을 띤 건축물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러한 건축 양식은 이 건물이 지어질 당시 종교적인 배경을 고려해 보면 다소 이질적으로 느껴질 수 있다. 특히 로마가 기독교를 공인한 이후 교회당 건축 역사 속에서 알 수 있듯이 일부 이교도 신전을 개조해 사용했었던 흔적도 앞서 나열한 사례와 다르지 않음을 볼 수 있다. 건축 유산은 시대를 막론하고 항상 그 시대의 역사와 문화를 대변해 왔다. 그러므로 로마 시대 전반적인 건축물들을 고찰(考察)하면서 이교도와 기독교 사이에서 오늘날까지 유전되어 온 종교 건축이 역사와 문화를 대변하는 건축 사상의 시대적인 착오가 무엇인지 로마사를 통해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이에 따라 이번 호부터는 현대 기독교 교회당 건축 양식에 지대한 영향력을 끼친 그리스를 지나, 이를 계승 발전시키고, 도로와 법 등의 정치와 문화 등에서 다양한 수식어를 남긴 로마로 시선을 옮겨 살펴보고자 한다.


로마 건국 신화, 국민의 정체성과 정통성 고취를 위한 신화적 전통

대부분의 나라들은 민족의 정체성을 국민에게 확립하기 위해 그들의 역사와 연계시켜 건국 신화를 기록해 왔다. 우리나라에 단군 신화가 있듯이, 로마 역시 제국의 기원을 전하는 두 가지 건국 신화가 있다. 로마 신화의 배경은 BC 1194년에서 BC 1184년까지 약 10년간 그리스 연합군과 트로이 사이에 벌어진 트로이 전쟁(Trojan War)에서 시작하고 있다. 이 전쟁에서 그리스군은 목마를 이용한 계략으로 트로이를 함락(陷落)시켰다.
이때 멸망한 트로이에서 탈출한 사람들 가운데 트로이 왕의 사위인 아이네아스(Aen-eas)가 있었다. 그는 일족(一族)을 이끌고 이탈리아반도로 이동하여, 티베르스강(Tiber River)이 도시의 중심부를 흐르는 라티움(Latium) 지방에 정착하여 제2의 트로이를 건설했다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이러한 것을 대개 ‘트로이 계승 건국설’이라고 한다.
또 다른 전승에 따르면, 아이네아스의 후손인 로물루스(Romulus)와 레무스(Remus) 쌍둥이 형제가 건국의 시조가 되었다는 ‘로물로스 건국설’이 있다. 이들 형제의 출생 배경은 다음과 같다. 아이네아스의 후손들은 트로이에서 이주하여 라티움 지방의 알바롱가에서 도시국가를 세웠다. 얼마간에 세월이 지난 후, 이 나라의 아이네아스의 후손인 왕 누미토르의 왕좌를 동생 아물리우스가 빼앗았다. 그리고 왕위를 유지하기 위해 형의 두 아들을 죽이고, 딸 레아 실비아를 베스타 여사제로 만들어 대(代)를 끊어 후손이 태어나지 못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레아 실비아는 전쟁의 신 마르스의 사랑을 받아 임신하여 태어난 이가 바로 쌍둥이 형제이다. 훗날 로마인들도 그리스인들처럼 이렇게 신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조상, 즉 자신들이 신의 후손임에 대해 대단한 자부심이 있었다.
쌍둥이 형제가 태어난 사실을 알게 된 아물리우스는 조카들의 성장 후에 후환이 두려워 로물루스와 레무스를 티베르스강에 버려 익사하도록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마침 그때 홍수로 인해 강이 범람하여 신하들은 쌍둥이 형제를 바구니에 담아서 강에서 떨어진 무화과나무 아래에 버리고 떠났다. 그때 주변에 있었던 암늑대가 와서 우는 아이들을 데려다 암늑대의 젖을 먹이며 키웠다고 한다. 얼마 후 이 아이들은 목동에게 발견되어 마을로 내려와 사람들과 함께 살면서 강인하게 성장하였다고 한다. 훗날, 이 쌍둥이 형제가 자라 청년이 되었을 때 자기들의 출생의 비밀을 알게 되어 숙부 아물리우스를 몰아내고 조부 누미토르에게 왕권을 회복시켜 주었다.
이후 쌍둥이 형제는 알바롱가에 머물지 않고 자신들이 버려졌었던 땅 팔라티누스 언덕으로 돌아가 새로운 도시를 세우고자 하였으나, 신성한 땅의 경계를 두고 갈등 끝에 로물루스가 레무스를 죽이고 BC 753년 로마를 건국하였다고 전해진다. 로마인들은 건국 신화에서 로물루스의 행동에 대해 혈육보다 국가의 법이 위에 있다는 것을 로마 신화를 통해 전하고자 했던 핵심적인 메시지를 후대들에 각인시키기 위한 전설의 사건으로 생각했다. 흥미로운 것은 암늑대의 젖 먹는 쌍둥이 관련 신화는 앞서 나열한 것보다 시기가 앞선 주변 국가 에트루리아 석판 유물에서도 발견되었다는 점에서 로마인들이 이러한 신화를 가져와 자기들의 신화에 녹여서 기록하였다고 추측해 볼 수도 있다. 로마 건국 신화는 역사라기보다, 신화적인 요소와 결합된 로마라는 국가 안에서 국민의 정체성과 정통성을 고취(鼓吹)시키기 위해 만들어진 신화적 전통이라고 말할 수 있다.


로마의 왕정 시대, 세력 균형의 방식과 상호 의존적 관계를 형성하다

로마의 건국(BC 753년) 당시 주변에는 강력한 세력들이 자리 잡고 있었다. 북쪽에는 에트루리아, 남쪽에는 그리스 식민 도시들, 서쪽에는 카르타고가 있었다. 훗날 로마사에 중요한 인물로 인정받는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르(Marcus Tullius Cicero, BC 106년~BC 43년)는, 로물루스가 티베리스강 유역, 지중해 해안에서 약 30km 내륙에 위치한 로마를 선택한 점을 높이 평가하였다. 이는 도시의 지리적 조건이 로마의 팽창에 유리한 조건을 형성해 주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러한 환경의 작은 부족 국가에 불과했던 로마는 어떻게 거대한 제국으로 성장할 수 있었을까?
로마의 초기 정치 형태는 왕정(BC 753년~BC 509년)이었다. 이 시기 정치 구조는 왕(Rex: 왕의 호칭)과 100명으로 구성된 왕의 자문기관 원로원(Senatus) 그리고 로마 시민의 전체 모임 민회(Comitia)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는 권력을 나누어 상호 견제적 구조로 되어있었다. 왕의 선출 방식은 원로원에서 한 사람을 왕으로 추천하면 민회의 승인으로 결정하는 세력 균형의 방식이었다. 초기 로마의 지배자 왕은 최고 권력과 권위의 상징이 되기도 했었다.
로마는 이 당시 신분 구조 사회로 정치·종교·군사·재판 등 공적인 업무들을 담당했고 대지주(大地主)였던 귀족과 농업·축산업·상업을 주로 종사하였던 평민으로 나누어져 있었다. 평민 중에도 상당한 부를 축적한 계층이 존재하고 있었다. 로물루스는 이러한 구조 사회 속에서 국가 유지와 공동체의 원활한 소통을 위한 방법으로 귀족과 평민의 잠재적인, 서로 극적 대립을 피할 방법을 구상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그는 귀족은 평민의 보호자 ‘파트로누스(patronus)’가 되어야 한다고 했다. 반면 평민은 귀족을 예우해 주는 피보호자 ‘클리엔스(cliens)’ 가 되어야 한다는 제도를 세웠다. 다시 말하면, 귀족은 평민의 보호자가 되고, 평민은 귀족에게 충성과 존경을 표하는 상호 의존적 관계를 형성하도록 한 것이다. 이러한 정치 및 사회 제도는 로마의 초기 안정과 발전의 토대를 마련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왕정 시대 건축은 도시국가의 초석을 다지는 시기

로마 왕정 시대의 건축은 도시의 초석(礎石)을 다지는 시기였다. 로마는 소규모 마을 단위에서 시작하여 점차 도시국가의 기반을 세워나갔다. 이 시기 건축의 특징은 북쪽에 있는 에트루리아 문명의 선진 토목 기술을 수용했다는 점이다. 당시 로마인들이 도시를 건설하기 위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비교적 지대가 낮고 습지인 이곳의 배수 문제였다. 그래서 그들은 BC 600년경에 클로아카 막시마(Cloaca Maxima)라는 거대한 하수도를 건설하였다. 이 하수도 유물에서 로마 건축의 상징인 초기 아치(Arch)의 기초적인 양식을 엿볼 수 있다. 그리고 도시 건설에 필요한 부지를 확보한 다음 이곳에 고대 그리스 폴리스(Polis)의 심장부 역할을 하였던 ‘아고라(Agora)’와 유사한 ‘포룸 로마누스(Forum Romanum)’를 조성했다. 이곳은 오늘날 토론의 장을 뜻하는 ‘포럼(Forum)’의 어원이 되었으며, 로마 공공 생활의 중심지가 되었다.
왕정 시대 신전은 목재와 진흙 벽돌로 짓고 화려한 테라코타(구운 점토)로 장식했다. 로마는 북쪽 에트루리아 건축가들을 초빙하여 왕정 말기에 착공하여 공화정이 선포되는 해(기원전 509년) 거대한 성소 ‘유피테르 옵티무스 맥시무스 신전(Temple of Jupiter Optimus Maximus)’을 완공했다. 로마의 일곱 언덕 중 가장 험준한 카피톨리누스 언덕(Capitoline Hill) 꼭대기에 세워진 이 신전은 ‘가장 선하고 위대한 유피테르의 신전’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이곳은 로마 군대가 전쟁에서 승전고(勝戰鼓)를 울리며 개선 행진(Triumph)을 마치는 마지막 장소였으며, 장군들은 유피테르(Jupiter) 신에게 감사 제사를 올렸다. 또한, 로마의 국고(금고)와 도서관 역할도 겸했다고 전한다.

<다음 호에 계속>

글쓴이 프로필
글쓴이 : 이오현 편집국장 ((주)한국크리스천신문, 장안중앙교회 장로)
이메일 : donald257@nat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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