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종교 건축과 기독교 건축 (11)
내가 본즉 그 숫양이 서와 북과 남을 향하여 받으나 그것을 당할 짐승이 하나도 없고 그 손에서 능히 구할 이가 절대로 없으므로 그것이 임의로 행하고 스스로 강대하더라 내가 생각할 때에 한 숫염소가 서편에서부터 와서 온 지면에 두루 다니되 땅에 닿지 아니하며 그 염소 두 눈 사이에는 현저한 뿔이 있더라 그것이 두 뿔 가진 숫양 곧 내가 본 바 강가에 섰던 양에게로 나아가되 분노한 힘으로 그것에게로 달려가더니 내가 본즉 그것이 숫양에게로 가까이 나아가서는 더욱 성내어 그 숫양을 땅에 엎드러뜨리고 짓밟았으나 능히 숫양을 그 손에서 벗어나게 할 이가 없더라 숫염소가 스스로 심히 강대하여 가더니 강성할 때에 그 큰 뿔이 꺾이고 그 대신에 현저한 뿔 넷이 하늘 사방을 향하여 났더라 (다니엘 8:4~8, 개역성경)
인류 역사상 3대륙 정복, 세계화의 첫걸음인 헬레니즘 시대를 열다
‘헬레니즘(Hellenism)’이란 ‘그리스적인 것’, 곧 그리스어를 공용어로 사용하며 그리스적 문화·사상·종교가 확산되는 현상을 의미한다. 이는 그리스어를 공용어로 소통하고 그리스적인 모든 것이 침략당한 국가의 문화와 동화(同化)되는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드로스 3세(알렉산더 대왕)가 이집트와 페르시아 제국을 정복하면서 그리스 문화와 동쪽의 오리엔트 문화 그리고 아프리카의 이집트 문화를 상호 포용하는 정책을 펼쳤다. 알렉산드로스 3세는 정복지의 문화와 종교를 전면적으로 배제하지 않고, 일정 부분을 존중, 수용하면서 동서양의 문화가 결합한 새로운 문화권이 형성되도록 하였다. 또한, 그리스인과 페르시아인이 대규모 결혼식도 거행하였는데, 이러한 것도 의도적으로 정치와 문화의 융합정책 중 하나였다. 대개 역사학자들은 헬레니즘 시대를 알렉산드로스 3세가 동방원정 이후 사망한 BC 323년부터 이집트 클레오파트라 7세가 로마에 의해 정복당했던 BC 30년까지 약 300년 정도라고 한다. 다시 인류 역사상 유럽, 아프리카, 아시아 3대륙을 정복하면서 세계화의 첫걸음인 헬레니즘 시대를 여는 알렉산드로스 3세의 동방 원정을 조금 더 살펴보려고 한다.
이집트 알렉산드리아, 헬레니즘 도시의 모델이자 상징적인 수도 역할
BC 332년 가을쯤에 알렉산드로스 3세(알렉산더 대왕)는 이집트를 무혈 입성한 후 종교적으로는 신의 아들과 정치적으로 파라오(Pharaoh, 왕)라는 호칭으로 인정받았다. 그리고 BC 331년 알렉산드로스 3세는 이집트 나일강 삼각주(Delta) 서쪽 해안, 지중해 연안에 자신의 이름을 딴 알렉산드리아(Alexandria)로 명명(命名)하여 도시를 건설하도록 하였다. 이곳은 지중해와 나일강 그리고 이집트 내륙을 연결하는 상업, 교통, 문명, 종교 중심으로서 최적의 전략적인 요충지였다. 알렉산드로스 3세 동방 원정 시 곳곳에 수십 개의 알렉산드리아 명칭을 사용한 도시를 건설하도록 하였다. 이는 수많은 점령지 도시와 다르게 그리스적 도시 건설과 토착 사제 세력과 거리 유지 그리고 헬라 문화 지배의 거점 확보 차원이었다고 한다. 이집트 알렉산드리아는 헬레니즘 도시의 모델이자 상징적인 수도 역할을 할 정도로 기획된 도시이며, 지정학적으로 매우 뛰어난 입지를 지녔다. 도시 내 주요 공공건축과 신전들은 그리스의 도리아식(Doric Order) 건축 양식을 따랐다. 이는 이집트 땅에 그리스식 방주, 헬레니즘 세계라는 새로운 장을 여는 기반이 되었다. 훗날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시기에 이곳에서 구약성경 히브리어를 헬라어로 칠십인역(70인역, Septuagint), 번역 작업을 한 장소이기도 하다. 이집트 알렉산드리아는 다른 알렉산드리아 도시들과 달리 오늘날까지도 존재하고 있는 유일한 도시이다.
가우가멜라 전투, 페르시아 제국 멸망을 결정짓는 계기가 되다.
알렉산드로스 3세는 BC 331년경에 이집트를 정복하고 나일강 하구 비옥한 곡창지대에서 생산되는 군량미를 확보한 후 이집트 멤피스를 떠나 이전에 남하했었던 길을 따라 다시 북상하여 페르시아 본토로 진군하였다. 이는 이수스 전투(BC 333년, Battle of Issus)에서 가족을 버리고 패주(敗走)한 페르시아의 왕 다레이오스 3세(Darius III)를 찾아 페르시아 정복을 위한 결전의 길을 떠난 것이다.
한편, 다레이오스 3세는 지난 전투에서 패한 뒤 페르시아 전역에 병사들을 재징집하여 알렉산드로스 3세 침공에 대비하고 있었다. 결국 두 나라는 티그리스강 인근에 있는 가우가멜라 평원, 오늘날 이라크 북부 모술과 아르빌 사이 지역에서 맞붙게 되었는데 이를 가우가멜라 전투(BC 331년, Battle of Gaugamela)라 한다. 두 나라의 병력 규모는 역사 기록에 따라 여러 가지 설이 있으나 대략 마케도니아는 4만 7천 명, 페르시아는 9만에서 12만 명에 이르렀던 것으로 추정한다. 이 전투의 사상자 역시 수치는 명확하지 않으나, 페르시아는 전사자가 2만 명에서 4만 명 정도이며 사상자는 최대 9만 명 안팎으로 추정하고 있다. 반면 마케도니아는 전사자 부상자 합쳐서 1천 명에서 1천5백 명 정도였던 것으로 현대 학자들은 이야기하고 있다. 다른 전투에서 그러하였듯이 이 전투에서 수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마케도니아 군이 압도적으로 승리를 거두었으며, 그 결과 가우가멜라 전투는 페르시아 제국 멸망을 결정짓는 계기가 되었다.
신전 복원 명령은 제정일치(祭政一致) 사회의 정치적인 통치와 밀접하다
페르시아의 왕 다레이오스 3세는 마케도니아 군의 추격을 피해 메디아의 엑바타나(Ecbatana)로 피신했다. 여기 엑바타나는 오늘날 이란 서부 하마단 지역에 해당하며, 자그로스산맥에 위치한 메디아의 옛 수도이자 페르시아 제국의 전략적 후방 거점이었다.
알렉산드로스 3세는 현재 이라크 중부, 유프라테스강 서안의 땅, 비옥한 충적평야(沖積平野: 퇴적물로 만들어진 평야)에 위치한 고대 메소포타미아 문명을 대표하는 도시 바빌론(Babylon)을 향해 진군하였다. 바빌론 성에서는 사제들과 고위 관료들이 알렉산드로스 3세를 맞이하면서 선물 공세와 이집트에서와 마찬가지로 무혈 입성하도록 성문을 열어 도시를 평화롭게 인계하겠다고 제의했다. 바빌론은 메소포타미아 문화가 융성했던 거대한 규모와 장엄한 도시였다. 이러한 도시의 모습을 목격한 알렉산드로스 3세는 깊은 감격과 감탄을 표했다고 전해진다.
그리고 그는 바빌로니아(Babylonia)의 주신 마르두크(Marduk)를 모신 신전 지구라트(Ziggurat), 다시 말하면 신의 임재와 왕권 질서를 상징하는 계단식 신전 건축물인 에테메난키(Etemenanki)를 복원하도록 명령하였다. 바빌론의 도시에 세워진 지구라트 에테메난키는 ‘하늘과 땅의 기초(또는 연결)의 집’이라는 뜻이며, 최상층에는 마르두크 신전이 있고 7층 구조와 꼭대기 신전 그리고 중앙과 양열 세 계단이 있다. 이러한 신전 복원 명령은 제정일치(祭政一致) 사회에서 있어서 정치적인 통치와 밀접한 매우 중요한 일 중 하나이었기 때문이다. 알렉산드로스 3세는 이전 많은 정복 도시에서도 실행하였던 것과 같이 바빌론에서도 문화·정치·종교의 융화 정책 일환으로 신전 제사 의식에도 참여하였다. 또한, 그는 페르시아인 패장에게 총독 자리를 내정하고 중요한 자리에 페르시아 귀족들을 중용하기도 했다. 이는 다레이오스 3세와 그에 따른 행정 체제를 표적으로 삼은 것이지 페르시아인들과는 무관함을 알리는 인사 정치였다.
페르시아 제국의 상징적 심장이 무너지다
알렉산드로스 3세의 다음 목적지는 페르시아 제국의 행정과 재정의 수도 수사(Susa)였다. 이곳 역시 별다른 저항 없이 입성하였다. 그는 이곳에서 은 5만 달란트(약 1.300톤)와 다레이오스 3세가 남기고 간 귀중한 보물들을 전리품으로 손아귀에 넣었다. 엄청난 양의 은은 장기간에 걸친 동방 원정을 가능하게 한 결정적인 재정 기반이 되었으며, 만약 이러한 재원이 없었다면 원정은 더 이상 진전되기 어려웠을 것이다.
마케도니아 군사들은 계속해서 수사에서 남동쪽 약 640km 떨어진 페르시아 제국 왕조 상징의 도시, 페르세폴리스(Persepolis)로 향했다. 페르세폴리스로 가는 길에는 자그로스산맥이 가로놓여 있어 험준한 협곡을 통과해야 했고, 이러한 지리적 특성 때문에 전투 과정에서 상당한 어려움을 겪었다. 특히 페르세폴리스 입성 직전에 벌어진 전투는 페르시아 원정 중에서도 가장 힘든 전투 가운데 하나로 전해진다. 페르세폴리스는 정치적 수도라기보다는 제국의 위엄을 과시하기 위한 제의(祭儀)와 왕실 의전 중심의 상징적 도시였다. 알렉산드로스 3세는 이곳에서 획득한 막대한 재물을 노새 1만 쌍과 낙타 5천 마리에 실어, 수사를 거쳐 일정 시간이 지난 뒤 엑바타나로 옮기도록 하였다. 이러한 조치로 미루어 볼 때, 그는 페르시아 제국의 4대 수도(수사, 페르세폴리스, 엑바타나, 바빌론) 가운데 하나인 페르세폴리스를 새로운 제국의 수도로 삼을 의도는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후 알렉산드로스 3세는 페르세폴리스 궁전을 불태우는 문제를 두고 주변 인물들과 갈등을 빚었다. 그러나 그는 과거 페르시아가 그리스 원정 당시 아테네를 불태운 사건에 대한 복수라는 명분 아래 결국 궁전을 불태우는 결정을 내렸다. 궁전 방화의 계기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존재하지만, 전승에 따르면 승전 연회 도중 불이 붙었다고 한다. 이 화재 사건은 페르시아 제국의 상징적 심장이 무너졌음을 온 세상에 알리는 사건이 되었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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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프로필 글쓴이 : 이오현 편집국장 ((주)한국크리스천신문, 장안중앙교회 장로) 이메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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