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예수교장로회연합회 교회동역자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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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4-07-03 06:43  기사 출력하기 글쓴이에게 메일보내기
 

바람을 몰고 다니는 신


현대인들은 바람에 대하여 비교적 소홀하다. 바람은 불길이나 파도 등을 부채질한다. 인간들은 물이나 불에는 비교적 민감하다. 바람에 대해서는 비교적 무관심하다. 바람은 사방에서 불어온다. 동쪽과 서쪽 그리고 남쪽과 북쪽에서 불어온다. 이것이 바람의 길이다. 사람은 이러한 바람의 길이 어떠함과 임신한 여자의 태 속에서 뼈들이 어떻게 자라는지를 알지 못한다. 설사 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너무도 지엽적이며 부분적이다. 바람 등을 포괄하여 만사를 성취하시는 하나님은 바람을 몰고 다니신다. 이렇게 여기서는 성경에 나타난 바람의 길에 있어서 그 실제를 동서남북에서 확인해 본다. 성경만이 하늘의 사방에서부터 사방의 바람을 이르게 하여 사람들에게 닿도록 한다고 답변하기 때문이다.

첫째, 동풍이다. 이스라엘 백성이 애급에서 탈출하기 전에, 애급 땅에 열 가지 재앙이 있었다. 그 재앙들 중에, 여호와께서 동풍을 일으켜 온 낮과 온 밤에 불게 하였다. 그렇게 함으로써 일어난 것이 메뚜기 재앙이다. 이렇게 하여 이스라엘 백성이 애급을 탈출하게 된다. 그들이 도망하여 나올 때 앞을 막았던 홍해의 그 진실을 누구나 안다. 이때에 큰 동풍을 밤새도록 불게 하신 그분을 아는 것은 단순하지 않다. 지금부터 대략 3500년 전에 불었던 그 동풍의 실체를 증명하는 것은 단순한 결과에만 치중하지 않기 때문이다. 또 요나의 표적은 예수 부활의 예표로서 너무도 중요하다. 예수 자신께서 요나의 일을 자신을 통하여 나타날 표적으로 해설하였다. 요나에게 박 넝쿨과 함께 뜨거운 동풍까지 준비하신 이분을 누가 막을 수 있을까?
둘째, 서풍이다. 앞에서 언급한 메뚜기 재앙에서 동풍과 함께 서풍이 나온다. 성경의 출애굽기는 “여호와께서 강한 서풍을 불게 하시고 메뚜기를 홍해로 몰아넣으셔서”라고 강조한다. 이렇게 동풍을 불게 했다가 돌이켜 서풍을 일으키는 것을 누가 막을 수 있을까!
셋째, 남풍이다. 이 남풍이 동원된 것은 사도행전의 마지막에 잘 나타나 있다. 이 바람의 출현은 바울이 죄수의 몸으로 배를 타고 로마로 가는 과정에서이다. 예수께서 출생하고 출현할 때가 로마시대였다고 하는 것이 우연일까? 지금 언급되는 남풍과 로마시대가 관계없이 완전히 따로 존재하는 것일까? 이 바람의 길을 확인하면서 이러한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다. 바울이 오랜 항해를 하는 중에 부드러운 남풍과 폭풍을 만났다. 이 만남이 우연일까? 남풍이 불어왔기 때문에 이틀 만에 로마에 근접한 지역에 이를 수 있게 되었다.
넷째, 북풍이다. 전도서의 초두에서 “바람은 남으로 불다가 북으로 돌이키며 이리 돌며 저리 돌아 불던 곳으로 돌아가고”라는 안내의 말씀이 등장한다. 이러한 안내는 심오한 영원성을 강조하고자 함에 필요하기 때문이다. 또 에스겔서의 초두에도 “북방에서부터 폭풍과 큰 구름이 그 속에서 불이 번쩍번쩍하여 빛이 사면에 비취며”와 같은 내용이 있다. 이러한 것은 출처의 근본과 방향에 관계되고 있다.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성을 증명해주는 잠언서(25:23)에서도 “북풍이 비를 일으킴같이 참소하는 혀는 사람의 얼굴에 분을 일으키느니라”와 같이 원리적인 진실을 밝혀주고 있다.

결국 동서남북에서 부는 바람은 하나님의 권세이며 영광이다. 이러한 권세와 영광을 드러낼 때에 천사를 동원하기도 한다. 主께서 主의 바람을 일으켜서 바다를 움직이는데 누가 그것을 막겠는가? 이러한 천지만물을 전능한 힘으로 마음대로 하심을 욥기서의 뒷부분에서 강하게 강조하고 있다. 폭풍 가운데서 말씀하셨다. 바람을 主의 천사로 삼아 다니시며 구원받은 백성에게 천사를 붙여 보호하신다. 2024년 무더운 여름에도 바람을 몰고 오신다. 운전이 대단하다.

글쓴이 프로필
글쓴이 : 박근호 목사 (중어중문학박사)
이메일 : yan825@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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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는 자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는 말의 해석 오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