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예수교장로회연합회 교회동역자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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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5-01-14 10:18  기사 출력하기 글쓴이에게 메일보내기
 

신정론의 담론(談論) 8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 주시되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이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
(에베소서 1장 3-6절 개역성경)

200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심령대부흥회’가 열린다는 홍보물을 동네 골목 전봇대에 붙어있는 벽보나 교회당 입구에 걸어 놓은 현수막으로 자주 볼 수 있었다. 요즘도 간혹 보이긴 한다. 이 시절 부흥회를 마치고 나오는 사람마다 대부분 은혜를 많이 받았다는 인사를 서로들 하곤 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들이 말하는 은혜를 한 번도 느껴 본 적이 없다. 그래서인지 한때는 버림받은 자식, 불택자가 아닐까 하는 의심도 해 보았고, 은혜가 무엇인지 궁금하기도 했다. 성도들로부터 부흥회뿐만 아니라 주일설교 등 각종 집회에서도 은혜받았다는 말들을 종종 듣기도 했다. 그리고 오늘 설교시간에 너무 은혜를 많이 받았다는 성도들의 반응을 들은 설교자가 인자한 모습과 흐뭇한 미소를 짓는 얼굴도 자주 목격했다.

그러나 세월이 흘러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는 은혜를 알고 보니 부끄럽기 짝이 없다. 그들은 설교시간에 성경 몇 구절 읽고 나서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본질은 뒤로 한 채, 뛰어난 화술로 여러 가지 예화, 간증, 개척교회에서부터 교회 건축 과정에서 있었던 일화 등을 말하곤 했다. 또한, 쩌렁쩌렁한 음향 시스템을 갖추어 놓고 목소리 높낮이 조절해가며 강한, 부드러운 어조로 온갖 제스처를 취하며 성도들의 정신을 혼미케 하여 성도들을 울리고 웃기는 설교, 특정 성경 구절로 죄를 자복하게 하거나, 책망하는 등의 설교가 대부분을 차지했다. 이러한 설교에 압도당한 성도들은 무의식적으로 아멘으로 화답하곤 했다. 이들이 말하는 은혜는 인간의 연약한 심성을 자극, 흥분하게 하는 동시에 감정이 북받쳐 오르게 한 다음 심리적으로 안정을 찾게 해 주는 이러한 현상을 대부분 은혜를 받았다고 했다. 또한, 꿈, 방언, 치유 등의 신비한 체험이라고 여기는 극히 정상적이지 않은 행위들을 통해 은혜를 받았다고 말하기도 했던 시절이 한동안 있었다. 지금도 일부 목회자들이 이러한 무속적인 행위를 하고 있다. 성경의 올바른 뜻은 아랑곳하지 않고 말이다.
그래서 이번 호에는 은혜의 본질적인 속성과 목적이 죄와 어떠한 관련이 있는지 알아보려고 한다. 성경에 자주 언급되는 ‘은혜’는 헬라어로 ‘χaριc(charis, 카리스)’라고 한다. 이는 은혜, 호의, 선물, 기쁨 등의 의미를 담고 있다. 은혜의 의미에 따라 성경에서 말하는 은혜는 인간과 하나님 사이에 서로 주고받는 상호작용이 아니라 위의 본문 에베소서 1장 6절의 말씀처럼 기쁘신 뜻대로 예정된 택한 백성들에게 거저 주시는 것, 선물을 말하는 것이다. 대부분의 교회 지도자들은 은혜는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말하지만 실제로는 모순되게 가톨릭의 공로사상에서 비롯된 영향으로 인간이 하나님께 무언가를 드리고, 봉사한 대가로 복을 받는 상호작용으로 오도(誤導)하고 있다. 이에 따라서 먼저 죄와 관계없는 은혜가 무엇인지 살펴보려고 한다.

첫 번째 창세전의 은혜이다. 하나님께서는 시간, 공간, 형상의 세계를 창조하시기 전에 영원하신 작정(로고스(λoγοc)) 안에서 자기 백성들을 예정하셨다. 이는 세상 만물과 인간이 창조되기 전 아무런 대가 없는 은혜를 거저 주신 것이다. 이러한 은혜는 인간의 죄와는 무관하며 사도 바울은 에베소 교회에 보내는 편지글에서 ‘하늘에 속한 신령한 복’이라고 했다.(에베소서 1장 3절 참조) 이와 같은 죄와 관계없는 은혜는 창세전에 주신 영원한 언약이라고 해도 틀림이 없다.
여기서 복은 히브리어로 ‘베라카(הכרב)’라고 하는데 은혜라는 의미도 있다. 그리고 언약은 히브리어로 ‘베리트(תירב)’이다. 이 두 단어는 단순히 어휘적 의미를 넘어 신학적, 관계적 깊이를 함축하고 있다. 왜냐하면, 복은 언약으로 말미암아 주시기 때문이다. 이러한 복을 베풀어주신 은혜에 대하여 성경은 구체적으로 밝혀주고 있다. 위의 본문에서 언급된 은혜는 창세전에 베풀어주신 것이기 때문에 인간들이 인지할 수 없는 고린도전서 2장 7절 말씀처럼 하나님의 감추어둔 비밀이 성도를 구원하시기로 예정하신 은혜의 섭리라는 뜻으로 말씀했다. 에베소서 1장 7절에서 12절까지의 본문에서도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은 창세전에 영원한 때에 기쁘신 뜻대로 구원할 자를 택하여 예정하신 절대 주권자이신 하나님의 은혜를 계시하려는 뜻으로 말씀했다. 따라서 인간에게 있어서 가장 큰 은혜는 하나님의 아들로 선택한 예정 섭리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이러한 은혜는 하나님께서 택한 백성들에게 베풀어주신 근원적이고 본질적인 은혜이다. 참으로 안타까운 것은 성경에서 분명하게 강조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예정 교리를 회피하는 현실의 기독교이다. 하나님의 예정섭리를 부정하는 것은 근원적이고 본질적인 하나님의 은혜를 부정하는 결과를 가져올 수밖에 없다.

두 번째는 인간의 타락 전 은혜이다. 아담이 에덴동산에서 타락하기 전에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주실 복을 언약하셨다. 이 또한, 죄와 상관없이 하나님께서 주실 은혜의 섭리이다. 앞서 밝힌 창세전 하나님의 은혜가 근원적이고 본질적인 은혜라면 타락 전 아담에게 언약하신 은혜는 창조 세계에 빈틈없이 실현될 계시 방편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계시의 방편은 창세기 1장 28절에 기록된 말씀처럼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타락하기 전 세 가지 복을 직접 말씀으로 약속하신 것을 말한다. 그것은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것과 땅에 충만하라는 것 그리고 다스리라는 것이다. ‘성경신학(The Bible Theology)에서는 이러한 것을 함축하여 ‘삼대언약’이라고 한다. 성경신학의 키워드인 ‘삼대언약’은 장차 하나님께서 마지막 아담으로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계시하시고 그가 보내실 보혜사 성령을 통하여 완전하게 이루게 하실 은혜언약인 것이다.
그러나 보편적인 전통 기독교 신학자들은 이를 두고 ‘문화명령’이라고 피력(披瀝)한다. 그래서 모든 인간은 하나님께서 주신 문화명령에 대해 문화창달(文化暢達)의 의무와 사명이 있다는 것이 그들의 주장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명령만 하시고 인간들의 자율의지에 의해 독자적으로 문화창달을 주도해 간다는 것으로 이해된다. 이러한 논리라면 하나님은 무능하고 허수아비와 같은 존재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전능하신 명령자 하나님의 자율의지와 명령을 받은 자인 인간의 자율의지가 상대적으로 존재할 수 없다. 세상 만사 만물의 주권자이신 하나님의 절대적인 자율의지 안에 상대적인 인간은 예속되어 있어 명령과 수행을 모두 전능자 하나님께서만 주관하시는 것이다. 이는 곧 절대주권자, 전능자이신 하나님께서 언약대로 이루시는 여호와로서 스스로 작정하신 뜻에 따라 이루어 가시는 존재이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에게 명하신 삼대언약은 문화명령이 아니라 죄와 관계없이 타락 전에 복으로 명하신 은혜언약이다. 이 삼대언약은 에덴동산의 금과법과 전연 관계가 없고, 아담의 타락과도 아무런 관계없는,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는 ‘선물’, ‘값없이’, ‘거저’ 등으로 표현하신 것처럼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은혜인 것이다. 따라서 절대주권자이시며 창조주이신 하나님께서 피조물인 인간에게 은혜를 베푸시는데 그 어떠한 조건도 원치 않은 것은 당연하다. 그런데 일부 목회자들은 교인들에게 여러 가지 조건들을 내세워 강조하며 가르치고 있다. 어떻게 보면 이러한 행태가 그들이 주장하는 신학에 의한 목회 측면에서 당연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심성이 순수하고 나약한 성도들에게 있어서는 평안한 신앙생활을 해야 하는데, 어렵고 힘든 신앙생활로 몰아넣는 것 같은 모습으로 비칠 수도 있다.

세 번째 모세시대의 율법이 있기 전의 은혜이다. 이 은혜는 에덴동산에서 아담이 타락한 이후부터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율법을 주시기 전까지 인간의 죄와는 전혀 상관없으며 아무런 대가 없이 주신 선물과 같은 은혜이다. 이러한 은혜를 성경에 나타난 일부 사실들을 나열하면 다음과 같다. 아담과 하와가 에덴동산에서 선악과를 따 먹은 범죄로 쫓겨났을 때 가죽옷을 지어 입혀 부끄러운 수치를 가려주신 은혜가 있다. 이는 범죄 했음에도 타락 전에 맺으신 은혜언약을 죄와 관계없이 이루어 주신다는 사실을 보여줬다. 가인과 아벨은 타락한 아담의 아들로서 모두 죄인임에 틀림이 없었다. 그러나 아벨의 제사만 죄와 상관없이 기쁘게 받으신 것은 율법을 주시기 전에 베푸신 하나님의 은혜이다. 노아와 그의 가족도 모세시대 율법이 있기 전에 홍수 심판에서 은혜를 입었다. 아브라함도 창세기 1장 1절에서 3절 본문에 기록된 것을 보면 언약을 통하여 받은 복, 즉 은혜는 자손이 번창할 것과 땅을 정복할 것 그리고 열국을 통치한다는 것이다. 이삭도, 야곱도 역시 마찬가지로 율법이 있기 전에 하나님의 은혜를 입었다.
하나님께서 아담, 노아, 아브라함에게 언약하신 은혜는 내용적인 면에서는 동일하다고 볼 수 있다. 다른 점이 있다면 하나님께서 첫 아담에게 베푸신 은혜언약은 마지막 아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루어 주실 영적인 언약이다. 그러나 아브라함에게 주신 은혜언약은 아브라함의 자손인 이삭과 야곱의 자손을 통하여 이루어 주실 육적인 언약이라는 점이다. 그러므로 여호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명하신 은혜언약은 타락 전에 아담에게 세우신 은혜언약, 즉 삼대언약을 반드시 이루어 주신다는 사실을 믿도록 하시려고 계시하시는 언약인 것이다.
앞서 나열한 내용들을 ‘성경신학(The Bible Theology)’적인 입장에서 정리한다면,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타락하기 전에 베푸신 은혜가 창세전에 근원적, 본질적인 영원한 은혜를 계시하시는 은혜라면, 모세에게 율법을 주시기 전에 주신 은혜는 창조 때 인간인 아담을 만드시고 베푸신 은혜 즉, 삼대언약을 반드시 이루어 주신다는 확증적인 계시의 방편으로서의 은혜이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서 창세전에 베푸신 은혜는 근원적이고 본질적인 측면에서 ‘원형적 은혜’라고 한다. 그리고 인간 타락 전에 베푸신 삼대언약에 대한 은혜는 원형적 은혜에 대한 ‘계시적 은혜’라고 하며,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율법을 주시기 전의 은혜는 ‘확증적 은혜’라고 할 수 있다고 요약하고 있다.

죄와 은혜는 성경을 근거로 앞서 언급하였듯이 창세전 하나님의 작정(로고스(λoγοc)) 속에 내재 되어 있었다. 그러므로 이러한 논리는 신정론을 정립하는 데 있어 없어서는 안 되는 필수적인 근거이다. 그런데 고대, 중세 유럽 기독교 신학자들은 죄와 은혜에 대한 신학의 출발을 창세전이 아닌 대개 인간 타락 이후부터 출발한다. 이러한 것을 토대로 체계화시킨 학문이 ‘구속사신학’이다. 신학의 근원이 성경 여러 곳에서 직접적으로 창세전임을 밝히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이러한 것을 도외시하고 시작한 것이 기독교 신학사에 막대한 오점(汚點)을 남겼다. 또한, 예정론을 주장한 신학자들조차 그 당시 철학적 사상의 한계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신학을 정립하면서 성경 전체의 맥락을 연구하는 데 소홀했던 점이 있었으며, 그 당시 정치, 사회, 문화, 철학사상을 기반으로 과정 연구에만 충실한 나머지의 결과가 오늘날 혼란스러운 신학이 증명하고 있다. 또한, 성경 원어 번역도 제정일치의 국가에 의해 영향을 받았다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그 시대의 제정일치는 기독교가 단순한 종교에서 벗어나 국가와 사회를 형성하는 과정에서 커다란 밑거름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기독교 세계관 확장에는 기여를 했지만 정치적인 도구로 이용당해 내적 갈등을 초래하는 부작용이 더 많았다. 이러한 원인으로 중세 말기 종교개혁과 근대 세속화의 배경이 되었다. 세계적으로 현대 신학을 면밀히 살펴보면 각각의 나라들의 토속신앙과 기독교가 밀접한 관계를 유지함은 물론 기독교가 대부분 나라의 토속신앙에 묻혀 토착화되었다. 우리나라 역시 예외일 수는 없다. 그래서 급속도로 발전하는 오늘의 현실에서 과거 미숙하고 부족했던 신학사상에서 벗어나 제2의 종교개혁 정신으로 재정립할 시기가 도래한 것 같다.

<다음 호에 계속>

참고문헌    박용기, 『율법과 죄 그리고 은혜』, 『무엇인가Ⅰ』(진리의말씀사)

글쓴이 프로필
글쓴이 : 이오현 편집국장 ((주)한국크리스천신문, 장안중앙교회 장로)
이메일 : donald257@nat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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