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의 성경적 오류를 진단하다
본 연재는 <한국크리스천신문> 교회개혁 특별기획 좌담회를 지면으로 옮긴 것으로, 이번 좌담회에는 박용기 원로연구원(성경신학학술원, ‘성경신학총서(The Bible Theology Series)’ 저자)과 박홍기 박사(성경신학학술원 연구원), 성경신학 학술원 연구생 다수와 배윤리(한국크리스천신문 객원기자) 권사가 참여하였다.
좌담회
객원기자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제22장은 ‘합법적 맹세와 서원’의 고백을 다루고 있습니다. 예배 의식의 한 부분에 맹세를 포함시키면서 고백문을 작성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자신이 지킬만한 ‘맹세’와 ‘서원’을 잘 선택해서 의식적인 예배에 참석하여 의무적으로 고백하라고 하는 논지의 고백문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이는 ‘어느 곳을 향해서도 맹세하지 말라’고 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정반대입니다. 오늘도 성경적 근거를 통해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에 대한 평가와 나아가 모든 성도들이 성경에 근거한 고백을 건전하게 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는 좌담회가 되길 바라면서 시작하겠습니다.
박홍기 연구원 지적하신 ‘맹세’와 ‘서약’에 대한 설명을 듣고 보니 지난 좌담회의 연장선에서 생각을 이어가게 됩니다. 비성경적 예배를 조장함으로써 결국 종교개혁 이전 로마 가톨릭으로 되돌아가는 한국 개신교의 처참한 상황을 떠올리며 좌담회에 임하고자 합니다. 성경 진리에서 벗어난 예배관의 강요와 제도화가 결국 성도 개인의 신앙생활을 혼돈의 늪으로 몰아넣고 있다고 봅니다. 성경진리 수호의 전당인 교회당이 ‘성전’으로 둔갑하고, 영원한 대제사장 예수 그리스도의 제사직 완성의 결과인 만인제사장 원리를 뒤집는 목사의 제사장직 독식과 찬탈, 성도 각자 하나님께 받은 은사에 따른 다양하고 즐거운 연보생활 대신 세상 탐욕의 노예화를 조장하는 헌금 행위가 한국 교회를 멍들게 하고 있습니다. 예배(제사)라는 의식을 조장하여 성경적인 신령한 예배 생활을 왜곡하는 것이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의 서원 내지 맹세라고 평가하고 싶습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맹세’와 ‘서원(약)’에서 가장 큰 문제점은 하나님의 주권과 은혜를 배제하고 ‘인간의 자율적 의지’를 전제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진정한 예배의 유일한 주체는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습니다. 우리의 머리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혜사 성령으로 우리의 모든 삶을 전적으로 주관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사실을 가볍게 여기거나 무시하면 고백서의 맹세나 서약은 결국 하나님의 영원한 은혜를 인간의 자유의지로 뒤집어 버리는 결과를 초래합니다. 하나님이 은혜를 주셨으니 그 은혜를 인간의 의지와 행위로 다시 갚으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부모의 은혜를 갚는다는 말도 함부로 할 수 없는 불손한 말인데) 하나님의 은혜를 갚으라고 말하면서 우리의 계산 방식으로 ‘가격’까지 정하는 맹세까지 시키고 있는 실정이 현대 교회에 만연해 있습니다. 더욱이 하나님 앞에서 하는 맹세는 함부로 아무 데나 해서도 안 되고, 정해진 예배 의식에서 반드시 목사가 보는 앞에서 ‘빈손’이 아닌 금전적 액수까지 구체적으로 정해서 오라고 합니다. 그야말로 하나님의 은혜를 인간이 스스로 갚겠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대속 사역을 한순간 지워버리는 어리석음에 빠진 것입니다.
‘맹세’와 ‘서원’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매우 엄격하게 금하신 불신앙이다!
성경신학학술원 원로 2항에 보면 ‘하나님 이름만 의지해서’ 맹세하라고 합니다. 이것 또한 맹세는 인간이 할 수 있고 마땅히 해야 하는 것을 전제합니다. 성경에 대한 무지이며 진리에 대한 왜곡이라고 봅니다. 마태복음 5장 34~36절을 보면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도무지 맹세하지 말찌니 하늘로도 말라 이는 하나님의 보좌임이요 땅으로도 말라 이는 하나님의 발등상이요 예루살렘으로도 말라 이는 임금의 큰 성읍이요 네 머리도 말라 이는 네가 한 터럭도 희고 검게 할 수 없느니라”고 하시면서 맹세를 매우 엄격하게 금하고 있습니다. 같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누가 누구에게 맹세를 한단 말인가요? 성경적 근거를 제시한 김에 또 하나 소개하죠. 바로 야고보서 5장 12절입니다. “내 형제들아 무엇보다도 맹세하지 말지니 하늘로나 땅으로나 아무 다른 것으로도 맹세하지 말고 오직 너희가 그렇다고 생각하는 것은 그렇다 하고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라 하여 정죄 받음을 면하라.” 그러므로 성도에게 맹세를 가르치고 요구하는 것은 분명 비성경적이며 범죄를 조장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한국 교회의 경우, ‘예배’를 로마 가톨릭의 의식이나 구약의 율법적 제사로 되돌려 놓다 못해 이제는 진리의 전당 교회당에서 맹세를 강요하거나 서원을 구원의 조건이나 세상 복을 받는 조건으로 속이는 지경이 되었습니다. 결국 서원이나 맹세는 한국 교회를 부패의 온상으로 만드는 원인 중에 하나인 ‘재물’로 귀결됩니다.
거짓 지도자들이 마치 신권(神權)을 가진 듯이 성도들에게 명령하고 그 명령에 따르는 신도들이 재물까지 가져오도록 서원이나 맹세까지 하니 이 얼마나 큰 사단의 유혹이겠어요. 이러한 지경에서 성도 한 분 한 분을 예수 그리스도의 지체이며 진리의 동역자로 보기란 불가능하다고 봅니다. 성령께서 각 성도에게 주신 열매 곧 성령의 열매는 반드시 하나님 자녀로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지체를 사랑하게 되어 있습니다. 올바르고 건전한 교회 문화에서 성도 관계가 상하(上下)나 주종(主從)으로 흘러가면 이는 틀림없이 비성경적인 것입니다. 어느 누구도 누구에게 명령하거나 제재하거나 함부로 훈계해서도 안 됩니다. 다만 성경진리에서 벗어날 때 진리의 말씀을 전하여 줄 따름입니다. 물론 이러한 권고(勸告)는 보혜사 성령께서 주의 몸 된 교회를 세워가는 과정에서 반드시 하게 하신다고 약속해 주셨습니다. 사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의 가장 심각한 부분은 바로 성도 생활을 이끌어가는 ‘주관자 성령 하나님’에 대한 무지에 있다고 봅니다. 신앙 고백의 주체를 너무도 당연하게 그러나 너무도 어리석게 바로 인간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고백의 근원이나 정당성이나 목적이나 목표를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권과 은혜의 사역으로 이해하지 못하는 데서 온 큰 문제입니다. 이렇게 되면 소경이 소경을 인도할 수밖에 없겠죠.
S연구생 하나님의 교회와 그 성도에게는 성령의 내재, 성령의 소욕, 성령의 열매, 성령의 주관 등 모두 ‘성령께서’가 유일한 주어이어야 하는데 이 중요한 사실을 망각하고 고백서를 만들고 있습니다. 늘 그렇듯이 맹세와 서약에서도 처음에는 하나님의 은혜를 말하지만 곧이어 인간이 해야 하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복음으로 시작해서 율법으로 마치고 있다고 봅니다. 고백서가 성경 특히 신약성경에 나타난 명령문을 맹세와 서원의 근거로 제시하는 것을 보면 정말로 성경 해석 수준의 미천함을 그대로 보여준다고 봅니다. 성경의 명령은 하나님의 언약 성취를 확증하는 것임을 반드시 전제해야 합니다. 그래서 명령은 앞으로 하나님께서 자신이 반드시 이루어주실 것을 확증하는 언약으로 해석해야 합니다. 그리고 분명히 그것은 ‘성령의 열매’임을 거듭 강조하고 있습니다. 신약성경에 나타난 많은 명령문을 하나님의 자기 존재와 능력의 계시라는 관점에서 이해할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이 명령했으니 인간이 실천할 수 있다고 무모하게 덤벼듭니다. 3항에 가면 세상의 권세도 하나님이 세워놓았으므로 해당 권력에 복종하라고 강요합니다. 단지 그러한 말이 들어간 성경구절만 떼어내어 교회 지도자들은 자신도 수행할 수 없는 명령을 성도들에게 요구합니다. 권세에 관한 문제는 다음 제23장에 나오기 때문에 그때 가서 더 논의하면 좋다고 봅니다.
Y연구생 지금 지적하신 문제를 보니 4항부터 7항까지 근본 문제는 예수 그리스도나 사도들도 금하고 있는 맹세를 인간이 자신의 독립된 의지로 스스로 실천할 수 있는 것을 전제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정작 고백서를 만든 수백 명의 참석자들 자신도 할 수 없으면서 하라고 명령하는 것은 결코 ‘합당한 것’일 수 없다고 봅니다. 맹세나 서약을 했으니 성실하게 지키라고 하며 하나님이 받으시는 서원이 되기 위해서는 의무감을 가지고 자발적으로 열심을 내라고 합니다. 로마 가톨릭에서 했던 독신이나 가난서약 혹은 순종서약은 ‘미신적이며 죄악 된 올무’라고 하면서, 자신이 지킬 만한 것을 신중하게 선택해서 지키겠다고 맹세하라는 것입니다. 정말로 개탄스럽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가는 성도의 삶은 전적으로 성령의 능력으로 시작해서 성령의 능력으로 완결됩니다. ‘성령의 성경 깨닫게 하심-성령의 소욕-성령의 서원-성령의 맹세-성령의 열매-하나님께 영광’. 이 모든 것은 여러 가지가 아니라 모두 성령의 사역 안에는 일어나는 일입니다.
의식적 예배(제사) 행위에 맹세와 서원 요구는 그리스도 대속 사역의 왜곡이다 !
객원기자 이러한 맥락에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제23장 ‘국가의 위정자’ 문제와 제24장 ‘결혼과 이혼’의 문제를 분석하고 평가하도록 하겠습니다.
P연구생 위정자 문제 및 결혼과 이혼 문제는 표면상 서로 다른 문제로 보입니다. 하지만 정치와 권력의 주관자와 주체가 누구이며, 결혼과 이혼의 주관자와 주체가 누구인지를 묻게 되면 이 문제는 기독교 가치관의 관점에서는 동일한 문제점을 함께 지닙니다. 위정자 및 결혼과 이혼에 관련된 가장 중요한 문제는 주관자와 주체 그리고 목적을 과연 ‘성령 하나님’으로 보느냐가 핵심이라고 봅니다. 그런데 성령의 사역은 ‘우연성’이나 ‘돌발성’을 전적으로 배제합니다. 성령께서는 아버지로부터 아들인 그리스도께서 보낸 사역자이시므로 모든 사역이 하나님의 창세전 작정하신 뜻을 성취하시는 사역입니다. 이러한 진리를 전제하느냐 하지 않느냐에 따라 신본주의냐 인본주의냐가 판가름 난다고 봅니다.
제23장 ‘국가의 위정자’에 관한 고백서를 시작할 때 보면 ‘온 세계 주인이고 왕이신 하나님께서 위정자들을 세워서 다스리게 했다’는 명제로 시작합니다. 이 명제는 주어가 선명합니다. ‘하나님께서’로 시작합니다. 문제는 그다음 문장부터 시작합니다. ‘하나님께서 다스리게 하신다’는 사실을 강조하지 않고, 하나님이 세우신 ‘위정자’를 주어로 삼는다는 데서 큰 오류가 시작됩니다. 그래서 위정자가 이렇게 잘 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그리고 위정자 앞에서 교회 종교지도자들이나 성도들은 이렇게 해야 한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세상 역사와 정치와 권력을 주권적으로 사용하고 심판하신다는 사실을 부정하고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결혼과 이혼 문제에서도 신랑과 신부의 주관자가 하나님이란 사실을 강조하지 않고 있습니다. 국가든 가정이든 나아가 교회든 모두 교회의 머리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의 주권적 통치를 받는다는 사실이 대전제이며 목적이며 이상이 되어야 한다고 확신합니다.
성경신학학술원 원로 지금 말씀하신 부분은 저도 매우 중요한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창세전 영원한 작정에 근거해 섭리하시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교회든 국가 위정자든 가정이든 남편이든 부인이든 모두 정하신 대로 그때그때마다 섭리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교회의 통치자로 세우셨으며 만물은 교회 아래 두셨습니다(엡 1:22). 모든 국가 권력과 가정(家庭)은 전적으로 모두 주 예수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 곧 천국을 계시하는 방편들입니다. 방편이라는 말은 일반적으로 말하는 것처럼 ‘중요하지 않다’는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존재와 그 능력을 계시하는 사건인데 가볍게 볼 수야 없지요. 국가 통치든 결혼이든 이혼이든 그 자체로 인간이 주어가 되어 잘 해야 한다는 고백서의 접근 방식은 성경적 근거를 가지고 있지 않다고 봅니다.
위정자의 통치 권력은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 방법에 따라 결정된다!
먼저 위정자의 경우를 보도록 합시다. 예를 들겠습니다. 구약의 바벨론 제국이나 페르시아 제국 혹은 다른 제국들이 선한 일을 했을까요? 악한 일을 했을까요? 바벨론은 남유다를 멸망시켰지만 예레미야가 예언한 하나님의 약속을 이루었으며 또한 다니엘과 같은 자를 총리로 삼아 하나님의 백성들과 율법이 바벨론에서 잘 보존되도록 했습니다. 다시 한 번 물어볼까요? 나쁜 세력인가요? 좋은 세력인가요? 이러한 우리 기준의 선악 판단으로는 결코 답을 내릴 수 없습니다. 하나님 기준의 선악 판단으로 결국 어떻게 사용하시고 심판하시는지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에 달려 있습니다. 선한 위정자를 세우면 교회에 우호적인 자가 되지만 악한 자를 세우면 하나님의 교회를 핍박하는 자가 됩니다. 사람 중심으로 접근하면 결코 설명할 수 없습니다. 제23장 4항에서 교황은 어떤 권세나 사법권을 갖지 못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중세 천 년 동안 로마 교황에 의해 교회를 황폐화시키는 악한 세력으로 사용하시면 인간이 어떻게 이 섭리에서 빠져나올 수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여기서 결혼과 이혼으로 넘어가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신약교회 시대에 결혼이 절대적입니까? 꼭 해야 하나요? 사도 바울이 대표적입니다. 그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로 부르심을 받고 결혼하지 않게 된 것은 하나님께 받은 ‘은사’입니다. 가령 베드로는 자신의 부인을 데리고 다니면서 복음을 전하는 것이 그가 받은 은사입니다. 금방 결혼했으나 남편을 잃고 평생 과부로 사는 성도도 있고, 결혼했으나 어떤 일로 얼마든지 이혼할 수도 있습니다. 이혼을 거듭했다고 해서 그가 저주받은 성도입니까? 제가 이렇게 말한다고 해서 절대 오해하지 말길 바랍니다. 이혼을 하는 것이 성경적이라고 왜곡하지 않길 바랍니다. 지금은 단지 하나님의 교회를 하나님께서 다스리시되 절대적 권한으로 절대주권적 방식으로 그렇게 하신다는 것을 강조하려는 것입니다. 고백서에서 인간이 자신의 자유의지를 가지고 세상에서 잘하면 ‘잘 된다’고 하는 말이 비성경적임을 지적하려는 것입니다. ‘근친결혼’이나 ‘간음’이나 ‘간통’은 결코 권장하거나 묵과할 사항이 아닌 것은 저도 너무 잘 압니다. 그런데 가령 현장에서 간음하다 붙잡힌 여인을 예수께서 용서하신 사건이나 죽기 전에 그리스도 옆에 십자가에 달렸으나 ‘낙원’에 간 강도의 경우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성도들을 어떤 상황에 두시고 어떻게 하나님 자기 백성으로 양육시키고 연단해서 흠 없는 자기 백성으로 다스릴 것인지 그것은 그야말로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에 달려 있습니다. 이렇게 볼 때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제23장과 제24장은 서로 다른 문제를 다루고 있지만, 기독교 세계관과 가치관의 관점에 보면, 교회와 국가와 가정의 유일하신 주권자가 오직 하나님이심을 전적으로 신앙하느냐 그렇지 않으냐가 그 핵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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