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비판과 정리 3 (15~24장)
본 연재는 <한국크리스천신문> 교회개혁 특별기획 좌담회를 지면으로 옮긴 것으로, 이번 좌담회에는 박용기 원로연구원(성경신학학술원, ‘성경신학총서(The Bible Theology Series)’ 저자)과 박홍기 박사(성경신학학술원 연구원), 성경신학학술원 연구생 다수와 배윤리(한국크리스천신문 객원기자) 권사가 참여하였다
1.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은 ‘회개’를 어떻게 왜곡했는가?
객원기자 이번 좌담회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제15장부터 24장까지 다시 정리하면서 신앙고백서의 치명적인 오류가 무엇인지 요약하겠습니다. 제15장에는 ‘생명에 이르는 회개’를 취급하고 있습니다. ‘신앙생활에 필요한 요건’이라는 회개(悔改)는 성도 대부분의 삶을 지배하고 있음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자기 의지로 뭔가 잘해야 천국 갈 수 있다고 여기는 수많은 신자에게 회개는 반드시 해야만 하는 종교적 의식으로 굳어져 있습니다. 특히 70년대부터 지금까지 오순절의 부흥집회에서 ‘회개하고 예물 드리는’ 코스는 한국 교회를 정말로 영혼과 몸을 모두 망쳐 놓았습니다. 이러한 비성경적인 회개 몰이의 진원지를 찾아가다 보니 우리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도 결정적인 오류의 원인을 제공하고 있었다는 사실에 많이 놀라기도 했습니다. 또한 거짓 종교 지도자들 자신은 죄에서 자유로운 것처럼 하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대속 사역’의 위대함을 뒤집어 버리는 이러한 비성경적 회개를 무지몽매하고 두려움에 떨고 있는 성도에게 강요하여 다시 절망으로 몰아서 협박까지 하는 것은 사단의 행태로 보입니다.
S연구생 대부분 교인들은 왜 회개를 해야 하는지도 생각하지 않고 그냥 종교적 의식으로 남들이 하니까 따라 하는 것이 전부입니다. 거짓 목사들은 하나님 앞에서 회개하라고 하고선 회개에 대한 응답과 처방을 자신이 내려주는 어처구니없는 일이 일어납니다. 더 심각한 것은 많은 목사들이 무지해서인지 의도적인 것인지 자신이 하나님께 ‘중보기도’를 해준답시고 메시아 역할을 대행합니다. 그리고 결국 ‘하나님께 빈손 들고 오면 안 된다’고 헌금을 요구합니다. 대제사장 예수 그리스도의 중보기도는 온데간데없습니다. 종교개혁 1세기를 지나면서 개혁파 교회는 천년 묵은 적그리스도적 적폐였던 중세 로마 가톨릭의 ‘고해성사’로 다시 돌아가 버렸죠.
성경신학학술원 원로 신앙고백서의 모든 오류는 결국 미숙하고도 오류투성이인 계시관, 성경관에서 비롯됩니다. 이미 전에 다루기도 했지만, 가령 마태복음 3장 2절과 4장 17절에서 세례 요한과 예수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에서 회개는, 유대교에서 벗어나 신령한 천국의 주로 오신 그리스도 예수께로 돌이키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구약 본문에 몇 번 정도 나오는 ‘회개’도 장차 오실 메시아에 대한 언약으로 귀결됩니다. 회개의 명령자와 주관자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이며 오직 그의 주권과 은혜가 결정합니다. 신약교회 모든 성도는 성령 감동으로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을 성령의 능력으로 깨닫게 되면서 세상에 속한 모든 것을 버리고 오직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만 진리의 자유함을 누리는 것이 회개의 본질입니다.
이 신앙고백은 반복적으로
회개를 요구하여 그리스도의
영원한 대속 사역을 왜곡했다!
2.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은 ‘선행’을 어떻게 왜곡했는가?
객원기자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제16장에는 ‘선행(善行)’ 문제가 나왔습니다. ‘선행’은 성도의 교회 생활을 다루는 서신서에 많이 나옵니다. 유익한 좌담회를 위해 제16장 선행에 대하여 1항부터 7항까지를 다시 간단히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우선 1항은 선행의 조건으로 성경적 근거를 둬야 하며 맹목성과 가장(假裝)한 것도 경계합니다. 2항은 신앙의 열매와 증거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일어나며, 3항에는 선행이 성령의 감화로 가능하다고 하면서 ‘태만’은 우리가 경계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4항은 다시 하나님께서 요구하는 것 이상을 인간은 할 수도 없다고 하며, 5항에서는 선행은 성령으로부터 나온 것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말했다면 자연스러운 결론은 선행은 전적으로 보혜사 성령의 은총이라고 해야 하는데, 6항에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행은 나중에 ‘상(償) 받기’ 위한 조건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7항은 선행을 하는 데 게으르면 하나님이 노하신다고 하여 인간의 자유의지를 강조합니다. 1~2항은 은혜로, 3항은 인간의 자유의지로, 4~5항은 다시 하나님의 은혜로, 6항은 다시 인간의 자유의지로, 7항은 하나님의 은혜와 함께 인간의 의지를 혼합하고 있습니다.
이 신앙고백은
성령의 은혜로 시작한 선행을
자유의지가 완성한다고 왜곡했다!
성경신학학술원 원로 선행에 대한 신앙고백은 정말로 성경진리에 대한 혼돈을 초래하고 있음을 다시 확인하게 됩니다. 지금 기자님이 지적한 대로 은혜로 시작해서 행위로, 성령으로 시작해서 율법으로 마치고 있습니다. 16세기에 시작한 개혁파 신학의 성경 중심의 사상이 한 세기를 지나 얼마나 훼손되고 인본주의와 로마 가톨릭과 유사한 구원관으로 퇴락했는지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무한하신 은혜를 깨닫게 하는 것도 성령의 사역이고, 성도에게 선행이라는 열매를 맺게 하는 것도 성령의 사역이며, 하나님께 의로운 행위가 되게 하는 것도 성령의 능력입니다. 따라서 선행은 하나님께서 은혜의 선물로 주신 믿음의 행위이며 성령의 열매입니다.
3.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은 ‘궁극적 구원과 은혜’를 어떻게 왜곡했는가?
객원기자 우리는 제17장 ‘성도의 궁극적 구원’에서도 논리적 일관성이 결여된 채 은혜로 시작해 인간 자유의지 강조로 끝내는 경우를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1항과 2항은 영원한 구원의 최종 단계는 하나님의 예정에 근거한다고 하지만 3항은 사단에 속한 세상의 죄악에 의해 나태함이나 공포에 처하므로 시험에 빠진다고 지적하면서 은총과 은혜도 어느 정도 빼앗기고 하나님의 진노와 성령의 근심을 야기해 일시적으로 심판을 초래한다고 합니다. 이렇듯 무책임하게 궁극적 구원의 명확성을 흐려놓고 고백문을 마치고 있습니다.
H연구생 개혁파 교회가 영원한 구원의 확신을 강조하려고 했다면 성경에 더욱 철저한 뒷받침을 두었어야 했는데, 이 부분이 실패하면서 인간의 자유의지를 강조하게 되었죠. 개혁파 교회의 절대 유일의 표지인 하나님 말씀 성경에 철저하지 못하면 기독교 교리의 핵심인 하나님의 영원한 예정에 나타난 하나님의 절대주권성과 그의 무한한 은혜에 대해 참담한 결과를 낳는다는 사실을 다시 강조하고 싶습니다. 문서설 횡행과 이단 속출 그리고 성도들의 혼미한 생활 등으로 처참하게 무너지는 교회 상황의 근본 원인은 성경 진리에 대한 외면과 무지와 왜곡에 있다는 것을 다시 강조할 수밖에 없어요. 이 상황에서 신앙고백을 강조한다는 것은 인간의 자유의지와 인본주의를 조장하는 것은 당연한 결과입니다.
이 신앙고백은
‘궁극적 구원’과 ‘은총론’의 기초인 예정론을 왜곡하고 있다!
4.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은 ‘율법관’을 어떻게 왜곡했는가?
Y연구생 앞서 비판한 인간의 자유의지를 다시 비판한다는 뜻에서, 신앙고백서 제19장의 ‘율법’도 다시 비판적으로 정리할 수 있겠습니다. 고백서는 ‘율법’을 인간이 스스로 지켜야 할 ‘하나님의 법’으로 보았습니다. 특히 십계명을 ‘도덕적 율법’으로 보고 인간의 의무라고 했습니다. 성경적 근거로 창세기 2장 16~17절과 창세기 1장 26절을 들면서, 이 구절을 인간에게 자유의지가 있다는 근거로 말하고 있었습니다. 참으로 빗나간 성경 해석이었죠. 성경권위의 본질을 왜곡하는 대표적 인용이었습니다. 다시 정리하면 창세기 1장 26절의 언약은 창세기 1장 28절에서 성취되는 구조이며, 창세기 2장 16~17절은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준 것이 계시 기록의 목적이 아니라 창세기 1장 28절의 자손과 땅 그리고 통치 언약이라는 세 가지 ‘삼대언약(三大言約)’을 이루어 가실 하나님의 주권적 방법을 제시하신 것입니다. ‘먹는 날에는 죽으리라’는 언약의 말씀을 많은 사람들은 ‘아담이 먹으면 죽고, 먹지 않으면 산다’라고 오해하고 있습니다. 즉 아담이 먹지 않을 수도 있었는데 아담이 자유의지를 가지고 선택을 잘못해서 타락했다고 가르치고 또 그렇게들 알고 있습니다. 이는 그야말로 표면적 서술에 지나지 않습니다. 창세기 1장 28절을 하나님의 주권적 방법으로 이루어가기 위해 언약 성취의 주권과 은혜가 오직 하나님께 있다는 진리를 계시하기 위해 피조물인 아담을 ‘불순종’ 가운데 가두기 위해 창세기 2장 16~17절에서 ‘먹는 날에는 죽으리라’고 언약하신 것입니다. 이처럼 최초의 인류에게 준 율법은 삼대언약을 수립하신 하나님께서 자신의 주권과 은혜로 그 삼대언약을 성취하기 위한 구체적 섭리 방법입니다. 그 구절이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준 근거로 보려는 해석은 정말로 성경 기록 본래 목적의 왜곡이라고 봅니다.
이 신앙고백은 ‘율법’을 교권주의 양산과 자유의지 실현의 수단으로 전락시켰다!
S연구생 명령문도 아닌 성경 첫 부분에 나타난 하나님의 일방적 언약마저 인간이 지켜야 할 ‘율법’으로 왜곡하고, 인간은 자유의지를 가지고 있다는 ‘부분 타락’ 교리를 만들어, 인간은 마음만 먹으면 선과 악을 실천할 수 있다는 인간 중심적 생각들을 이미 370년 전 개혁파 교회가 만들었다는 사실이 새삼 충격적인 사실로 들립니다. 그래서 개혁파 교회가 개혁자 칼빈을 따라 율법을 국가법, 의식법, 도덕법으로 나누고 세 번째 도덕법은 성도들이 자신의 자발적 의지로 실천할 수 있다고 참으로 위험한 판단을 내려, 이후 개혁파 교회의 전통을 ‘율법주의’로 흘러가게 했다고 봅니다. 그 증거가 바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이고, 그 구체적인 법들이 당회와 노회 그리고 총회의 정관이 되었다고 봅니다. 말로는 교회의 머리가 여호와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라고 하지만 모든 집행은 소수의 특정 종교 세력들 중심으로 만든 법과 제도에 따라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의 비성경적 율법관이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인본주의적 교권 집단의 희생물이 되도록 그 빌미를 제공했다는 사실에 대해 다시 한번 놀라게 됩니다.
5.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은 ‘신앙 양심의 자유’와 여러 성도 생활을 어떻게 왜곡했는가?
성경신학학술원 원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은 고백서 작성 처음부터 창세기 2장에 나오는 하나님 중심의 ‘선’과 ‘악’에 대해 분명하게 정리하지 못했다고 판단합니다. 창세기 3장에 나오는 사단이 하와에게 유혹했던 말,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과 악을 안다’는 상황에 대한 깊은 통찰을 하지 못했다고 봅니다. 아담과 하와를 에덴동산에서 추방하는 이유에 대해서도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선악을 아는 일에 하나님과 같이 되었다’고 분명하게 지적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과 같이 선과 악을 안다는 것은 여호와 하나님 기준의 선과 악에 대해 피조물이 순응하여 복종하는 것이 아니라 거역하게 되는 상황입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대속 사역이 없다면 인생으로 산다는 것 자체가 여호와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이 전부입니다. 인간에게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판단을 내리고 행동할 수 있는 독자적 ‘자유의지’란 없으며 단지 죄의 종노릇 하는 ‘노예의지’만 있을 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가 한국 교회의 타락과 불법, 부패와 부정을 방조하거나 묵과하고 특히 교회 부패의 가장 큰 온상인 종교권력자들에게 교회와 성도를 마음껏 유린할 수 있는 법적 근거를 한 세기 이상 제공해 왔다는 것이 통탄스러울 뿐입니다.
H연구생 신앙고백서 제21장에서 우리는 ‘종교적 예배와 안식일’에 관한 내용을 확인했습니다. 이른바 개혁파 교회의 ‘예배관’인 셈이죠. 예배의 대상과 방법, 예배 중보자, 기도, 예배, 특별 예배 등 모든 고백에 인간의 자유의지가 전제되어 있다는 점입니다. 그렇다면 이후의 신앙고백에 나타나는 성도들의 신앙생활과 관련된 모든 조항들은, 앞서 인간이 율법을 지켜야 하고 지킬 수 있다고 주장한 것처럼, 마찬가지로 인간 스스로 판단해서 신앙생활을 잘해야 한다는 인간 의지론을 부추기는 결과가 됩니다. 인간이 마음만 먹으면 예배 행위를 할 수 있다고 가르치거나, 예수 그리스도의 같은 지체를 보고 목사라고 해서 예배하라고 명령하거나 강요하는 것은 미신적인 이방종교이지 성경적 예배는 결코 아닙니다. 더 참담한 것은 ‘성경권위’마저 제사 행위(예배)의 한 순서로 전락시키는 교회 강단의 상황은 정말로 개탄스러울 뿐입니다. 오직 하나님께서 회복해 주시길 간절함만 커질 뿐입니다.
객원기자 인간의 자유의지를 전제하고 성경을 탈맥락적으로 무책임하게 인용하여 성도들의 신앙생활을 혼동으로 몰아간 것은 신앙고백서 제22장 ‘합법적 맹세와 서원’, 제23장 ‘국가의 위정자’ 그리고 제24장 ‘결혼과 이혼’에도 여전히 적용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어느 곳을 향해서도 맹세하지 말라’(마 5:34-36)고 하셨습니다. 이와 반대로 맹세와 서원을 하겠다는 말은 하나님으로부터 독립된 자신의 자유의지가 있다는 점을 전제합니다.
K 연구생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는 성령의 내주(內住)하심과 성령의 소욕, 성령의 열매와 성령의 주관하심에서 모두 인간의 자율성과 자유의지를 전제합니다. 신앙고백서 제23장 ‘국가의 위정자’와 제24장 ‘결혼과 이혼’의 문제에도 인간의 자유의지를 전제합니다. 하나님의 주권과 은혜를 무색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정치와 권력의 주관자와 주체 문제, 결혼과 이혼의 주관자와 주체 문제에서 신앙고백서는 결국은 인간의 자유의지에 의한 판단으로 결정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모든 국가 권력과 가정(家庭)은 전적으로 주 예수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 곧 천국을 계시하는 방편이며 수단적 가치입니다. 구약의 바벨론 제국이나 페르시아 제국 혹은 다른 제국들의 등장과 소멸은 모두 하나님의 정하신 뜻을 이루는 수단이며 여호와 하나님의 살아계신 증거입니다. 최선의 권력이든 최악의 권력이든 모두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의 증거입니다. 이 말은 권력에 순응한다는 것으로 오해하면 안 됩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국가권력을 통해 자신의 존재와 능력을 그의 자녀들에게 계시하신다는 사실입니다. 결혼과 이혼의 문제도 같은 맥락에서 이미 다룬 적이 있습니다. 세상에서 육신의 일로 드러나는 남녀 결혼과 이혼 등 일체의 모든 사건에서 그 본질은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 되신다는 사실입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언약하신 대로 강림하신 보혜사 성령께서는 사도 바울처럼 결혼하지 않는 ‘은사’를 비롯해 모든 성도 각자에게 가장 알맞은 방법으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지체임을 확인해주고 있습니다. 부부와 가족사의 일체 모든 희극과 비극의 역사는 온전히 주 예수 그리스도의 통치 방식에 속해 있습니다.
이 신앙고백은 성도들에게 자유의지와 율법주의를 조장하여 신령한 예배를 우상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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