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 헌법(憲法) 비판 1
1.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 헌법(憲法)은 어떻게 만들었는가?
본 연재는 <한국크리스천신문> 교회개혁 특별기획 좌담회를 지면으로 옮긴 것으로, 이번 좌담회에는 박용기 원로연구원(성경신학학술원, ‘성경신학총서(The Bible Theology Series)’ 저자)과 박홍기 박사(성경신학학술원 연구원), 성경신학학술원 연구생 다수와 배윤리(한국크리스천신문 객원기자) 권사가 참여하였다.
객원기자 안녕하세요. 원로들을 비롯하여 좌담회에 이렇게 참석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그동안 진행한 좌담회는 장로교 신앙고백의 핵심을 담고 있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에 대한 비판을 통해 비성경적이며 불법적인 고백문 조항을 면밀하게 살펴보았습니다. 장로교 헌법의 뿌리인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문이 현재 한국 교회의 부패와 혼란의 중심에 일조하고 있다는 점들은 매우 충격적이었습니다. 이번 좌담회부터는 그 연장선에서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 헌법’에 대한 성경신학적 비판을 진행하려고 합니다. 이번 호는 장로교 헌법이 어떻게 만들어졌으며, 어떻게 구성되어 있고 나아가 얼마나 성경적 근거가 희박한가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P연구생 한국 장로교가 사용하는 헌법은 우리가 이미 살펴본 바와 같이 웨스트민스터 헌법(1649년)에 기원을 두고 있습니다. 그리고 1788년 미국 장로교 뉴욕 총회는 웨스트민스터 헌법에 권징(勸懲) 조례를 첨가해서 헌법을 개정하여 채용했습니다. 이 헌법을 한국 장로교는 1917년 제6회 총회에서 다시 수정하고 추가하여 현행 장로교 헌법을 만들었습니다. 나라 잃은 일제 강점기 치하에서 교회 총회가 수립된 것은 매우 뜻있는 사건이었다고 봅니다. 하지만 장로교 헌법이 성경 권위에 대한 중요성은 강조했지만 정작 헌법의 각론(各論)과 조항들이 얼마나 성경에 근거를 두고 제정되었는지를 살펴보면 허술하기 짝이 없습니다. 지금부터 102년 전에 제정한 한국 장로교 헌법을 현재 많은 장로교 교단들은 그때마다 필요에 따라 임의로 개정하면서 성경 권위보다 더 높여 놓고, 한국 교회와 순진한 성도들을 비성경적 교권(敎權)으로 의도적이든 비의도적이든 ‘신앙 양심의 자유’를 유린해 왔고, 지금은 그 헌법으로 자행하는 불법이 극에 달하고 있습니다. 장로교 헌법 제정 역사를 잠시 살펴보면서 이렇게 부패한 한국 장로교 특히 교회 지도자들의 불법을 헌법이 옹호하고 있다는 사실에 정말로 많이 놀랐습니다.
SH연구생 처음에 제정한 웨스트민스터 헌법과 현행 장로교 헌법의 내용을 잠시 비교해 보면, 헌법 제정의 방향이 성경 진리를 지키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소수의 교권 집단들이 교회와 교인을 관리·통제하고 성도의 자유를 억압하는 방향으로 굳어졌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1643년 웨스트민스터 헌법에서는 ‘1)예배모범-2)장로회 신경-3)대요리문답-4)소요리문답-교회 정치’였습니다. 이것을 1788년 미국 뉴욕 총회에서는 소수의 교권을 강화한 ‘권징(勸懲) 조례’를 추가합니다. 제 생각에는 권징이라는 말은 정말로 없어져야 할 비성경적 개념이라고 봅니다. ‘권선징악’의 준말인데, 이는 한국 교회 현실에서는 성경 권위보다는 목사의 권한으로 결정할 수 있도록 장로교 헌법이 보호해 주고 있습니다. 교회 분쟁이 생기면 일반적으로 세속 법원에 서로 고발합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의 문제를 세상 법정의 판사봉에 맡긴다는 것 자체가 부끄럽기 짝이 없지만 현실입니다. 어쨌든 뉴욕 총회는 성경 권위가 아닌 세상의 교회를 목사들 위주로 관리ㆍ통제하기 위해 개정을 합니다. 대한예수교장로교(초기 명칭은 ‘조선예수교 장로회’)는 1917년 제6회 총회에서 현행 방식으로 개정하면서 성경 진리 전파와 수호보다는 교권 강화 방향으로 흘러가게 됩니다. ‘신조-정치-헌법적 규칙-권징 조례-예배 모범’으로 굳어집니다. 정치가 전제 역할을 하고 정치 권력이 헌법 규칙을 관할함으로써 성도들에 대한 권징을 마음대로 할 수 있게 했습니다. 그리고 권징으로 통제할 수 있는 권한을 강화하여 예배의 주도권을 목사들이 주관하게 되고 이러한 행태는 현행 교회 건물 내부의 강단(講壇) 구도에서 목사를 상석(上席)으로 하는 좌석 배치에도 드러납니다.
Y연구생 저도 조금 살펴보았는데, 1934년에 수정판이 나오고 1954년 6.25 전쟁 이후 제39회 총회에서는 ‘정치’가 수정됩니다. 그리고 이 헌법을 사이에 두고 표면적으로 보면 진리 문제처럼 보였지만 장로교는 이후 분열의 역사를 걸어오게 됩니다. 고신, 통합, 합동, 합신, 대신 등등 현재 장로교 분파는 정확하게 파악되지 않을 정도로 교단들이 난무하고 있습니다. 성경 권위를 지키기 위해 교단들이 각자 분투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이제는 누가 봐도 장로교 교단이 사용하는 헌법은 목사 중심의 천문학적 재산 관리와 목사의 자리보전을 위한 수단이지 성경 권위 수호를 위한 것은 결코 아니라고 봅니다. 총회 헌법의 역사에서 살펴보았듯이 이미 일제강점기와 6.25 동란을 거치면서 목사 위주의 교회법이 굳어져 버렸습니다. 그리고 일시적으로 성경 권위 문제로 통합과 합동이 진리 투쟁을 하는가 싶었지만 그것이 핵심은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역사비평과 문서설의 도전을 막기 위해서는 신학교와 같은 연구기관을 통해 고민과 연구에 집중하여 성경의 논리적 통일성과 구조의 완벽함을 제시했어야 했는데 ‘성경은 정확무오한 하나님 말씀이다’는 구호만 반복하면서 헌법을 강화하여 이단과 정통, 주류와 비주류를 갈라 왔습니다. 교회 수와 교인 수가 많은 교단이 마치 정통이고, 성경대로 가르치고 성경대로 믿으려는 자들에 대해서는 오히려 ‘이단’이라고 정죄하는 그야말로 ‘적그리스도’의 불법을 자행(恣行)하고 있다고 봅니다.
장로교 헌법(憲法)은 성경적 근거가 매우 취약한 웨스트민스터 헌법에 기초한다!
2.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 헌법을 ‘사도신경’으로 시작하는 것은 적절한가?
박홍기 연구원 지금 장로교 헌법을 비성경적이라고 강도 높게 비판할 수 있는 배경과 근거를 우리는 이전에 살폈던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에서 확인했기 때문에 자신 있게 비판할 수 있다고 봅니다. 세속의 권력보다 더 상식 이하의 법을 개정해 오면서 목사 지배 중심의 법을 점점 강화하여 성도들 위에 제왕처럼 군림하는 반면, 성도들은 점점 무지해지고 있습니다. 성도들의 경우를 보면 성경 진리에 근거해서 목사들의 불법적이고 비성경적인 가르침을 지적하고 비판하는 능력은 점점 더 퇴보하고 있습니다. 진리에 대한 순수성은 목사나 교인들의 관심에서 더욱 멀어지고 있으며, 교인들의 처지로 보면,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성경 진리를 정확하게 배울 수 있는 여지는 점점 사라지고 있습니다. 수백 개의 신학교가 난무하고 수천 명의 목사들이 활동 중이라고 하는데, 성경 권위는 점점 추락하고 있습니다. 정말로 다시 한번 한국 교회 성도들에게 왜 교회에 가는지 묻고 싶습니다. 성경 진리를 통해 주 예수 그리스도와 여호와 하나님을 깨닫고 각자 받은 은사인 신앙의 양심에 따라 사람의 본분인 영원하신 하나님을 경외하며 산다는 장로교 본래의 이념은 온데간데없어지는 상황입니다. 이런 점에서 이제 시작하는 좌담회를 통해 한국 장로교의 헌법을 성경에 근거해서 비판한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라고 봅니다. 더는 헌법이 성경 권위 위에 군림할 수 없도록 치밀한 비판이 이루어지길 원합니다.
성경신학학술원 원로 이 좌담회가 지난번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비판에 이어서 한국 장로교 헌법을 비판적으로 접근하고 나아가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확정하는 데 매우 유익한 매체가 되리라 기대합니다. 물론 우리는 항상 명심해야 한다고 봅니다. 우리가 성경을 근거로 한국 장로교 헌법을 비판하고 헌법에서 파생하는 교권의 불법성을 지적한다고 해서 우리만 진리의 주체이고 우리가 교회 개혁의 주체가 되겠다는 자기모순에 빠지지 말아야 한다고 봅니다. 개혁파 한국 교회는 정말로 처참하게 참담한 퇴락의 길을 가고 있습니다. 이것은 여호와 하나님의 무서운 진노와 심판임이 틀림없습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더욱 성경 진리에 몰두하고 각자 자신에게 주신 은사와 사명을 겸손하게 감당하여 수행하기 원합니다. 저 역시 60여 년 동안 성경 권위에 대한 연구에 몰두하며 살아왔으나 늘 자신을 경계합니다. 제 연구의 주인이 제가 아니라 바로 ‘여호와 하나님’이라는 사실입니다. 누구를 비판하고 누구에게 한 수 가르쳐 주고 내 제자로 삼으려는 것을 항상 경계합니다. 이번 장로교 헌법 비판도 그렇게 진행했으면 합니다. 성경 진리를 사랑하는 우리의 목표는 인간 중심적인 비판과 개혁 자체가 아니라 살아계신 여호와 하나님의 존재를 이 시대 모든 상황에서 깨닫는 것이 되어야 한다고 봅니다. 제가 소극적으로 대처한다고 비판할 수도 있지만 성경진리는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본 주어와 서술어는 어디를 보더라도 한결같습니다. ‘여호와가 하신다’ 입니다.
조금 전에 장로교 헌법 구성을 누군가 지적했습니다. 좀 더 첨언하고자 합니다. 우리가 보는 헌법 책(2000년 개정) 서문에 보면 ‘철저한 칼빈주의 정신’을 따르고 ‘웨스트민스터 헌법 기본 원리’를 따라 ‘신본주의, 성경 중심주의’를 표방하며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치리권을 행사하는 정치’를 해야 한다고 명시하고 있습니다. 개혁파 교회와 신학의 노선을 명시하는 너무 명확한 개념들이죠. 그런데 이러한 정신은 곧 무너집니다. 그 이전의 헌법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명분만 칼빈주의, 신본주의, 성경 중심이라고 하고 헌법 구성과 각 항목에서 취급하는 내용을 보면 성경 권위를 확립하는 데는 거의 기여를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오히려 성경 진리를 교권으로 차단하고 훼손하고 왜곡하는 많은 조항이 장로교 헌법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헌법 구성과 관련해서 하나 더 지적하겠습니다. 먼저 ‘사도신경’이 나옵니다. 제가 알기로는 누가 왜 작성했는지 명확한 근거가 없고 내용 면에서도 기독교 진리 전체를 선명하게 담고 있지 않은 것이 사도신경입니다. 그런데 이 고백은 예배 의식의 고정된 형식으로 굳어져 있으며, 교단별로 신경도 변경해서 사용하고 있습니다. 목사를 비롯한 소수의 교권주의자는 마음대로 교회 제도와 의식(儀式)과 법을 바꾸면서 성도들이 교회 개혁 주장을 하면 교회 헌법으로 치리하는 형국입니다. 그러한 의식 중의 하나가 사도신경인데 ‘사도 전승’을 강조하면서 로마 가톨릭이 교황제 옹호를 위해 악용하듯이 개혁파 교회도 그러한 불온한 의도를 숨기도 있다고 봅니다. 말이야 사도들의 신앙고백이라고 하지만 전혀 그 근거가 없으며 사도들의 신앙고백은 복음서와 다른 신약성경이지 어떻게 사도신경이 교회 생활과 헌법에 기초가 될 수 있다는 말인가요.
저는 사실 이러한 사도신경이 성경 전체의 뜻을 담기에는 부족하다고 생각해서 다음과 같은 ‘교회에 대한 신앙고백’을 ‘기독교지도자협의회’에 제출한 바 있습니다. 사도신경과 비교해 보면서 성경 중심적 신앙고백이 왜 필요한지 제가 제시한 것이 성경적인지 아닌지 독자들이 같이 고민해주길 바라는 마음에서 외람되지만 제시해 보겠습니다.
교회에 대한 신앙고백
교회의 머리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음에서 부활 승천하신 후에/ 언약의 말씀대로 보내신/ 진리의 보혜사 성령을 통해/ 창세전 영원한 때에 구원하기로/ 예정하신 자들을 성령의 능력에 의해/ 말씀으로 거듭나게 하시고/
성경을 깨닫게 하여/ 처녀 몸에 나신 예수님이/ 구약의 언약대로 오신 그리스도이심을/ 확실히 깨달아 알고 믿게 하심으로/ 전능하신 하나님이 언약의 말씀대로 성취하시는/ 여호와이심은 물론 그 존재하심과 속성들을/ 깊이 깨달아 알고 경외하며 섬기게 하시고/
그들로 그리스도 안에서/ 서로 사랑의 교제를 나누며/ 함께 선한 일을 도모하게 하시고/ 마음과 뜻을 다해 주신 은사를 실행케 하심으로/ 교회의 체제를 갖추어 선한 싸움에 응전케 하셔서/ 최후로 거두실 교회의 승리를 통해/ 그리스도 자신은 물론 여호와 하나님의 영광을/ 지으신 온 세계에 영원토록 선포하신다.
장로교 헌법 서두에 배치한 ‘사도신경’은 폐기해야 할 중세 로마 가톨릭의 잔재다!
박홍기 연구원 신앙 후배의 한 사람으로 인간적으로 원로께 감사드립니다. 사도신경을 단지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적 대안까지 제시해 주셔서 말입니다. 저는 장로교 헌법 구성에서 사도신경의 배치 문제를 역사적 맥락에서 하나를 간단히 짚어보고자 합니다. 조금 전 어느 연구생이 말씀하신 대로 사도신경은 누가, 어떻게, 어떤 과정으로 작성했는지 분명하지 않습니다. 제목에 사도(使徒)를 넣었다고 권위가 저절로 생길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 성경 진리의 핵심을 얼마나 담고 있는지가 더 중요하다고 봅니다. 원로께서 앞서 분명하게 지적하셨고 대안까지 제시하셨기 때문에 저는 참고로 사도신경의 역사를 잠시 소개하겠습니다. 역사적으로 보면 로마 교황이 통치하던 중세 10세기경 신성로마제국의 초대왕 오토 대제(Otto der Große)가 이 신경을 서방교회의 공식 예배 의식의 고백문으로 사용하도록 명령했습니다. 그러니까 세상 권력이 사도신경을 적절한 신앙고백서라고 판단하여 결정한 셈이 됩니다. 그 이후 로마 가톨릭교회는 의식(儀式)이나 미사에 이 고백서를 유럽 교회들이 모두 사용하도록 법제화했으며, 종교개혁 시대는 물론 그 이후 루터교를 비롯하여 개혁파 교회들 그리고 영국 성공회도 이러한 전통에서 아직 벗어나지 못한 상태에 이르렀습니다. 물론 한국 교회도 이 전통을 그대로 물려받았으며 이제는 각 교단이 임의로 사도신경을 개정하여 제사 행위와 같은 ‘예배 의식’에 이것을 사용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강조하고 싶은 것은 이 사도신경은 종교개혁 이후 성경 권위를 주창했던 개혁파 교회들이 말끔하게 청산했어야 할 로마 가톨릭의 잔재였으며 부적절한 전통이라고 생각합니다.
객원기자 사실 사도신경 다음에 나오는 ‘대한예수교장로회 신조(信條)’도 꼭 비판해야 한다고 봅니다. 다음에 참석하실 때는 신조의 구성과 내용을 면밀하게 비판해 주시길 바라며 기독교의 신조가 왜 필요하며 어떤 과정으로 만들어져야 성경적인지 함께 준비해 주시길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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