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예수교장로회연합회 교회동역자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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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0-02-07 19:36  기사 출력하기 글쓴이에게 메일보내기
 

구별됨에 대한 침묵


교회의 네 가지 속성은 유일성, 거룩성, 보편성 그리고 사도성이다. 유일성은 모든 교회가 하나란 뜻이고, 거룩성은 교회의 구별됨을 뜻한다. 교회가 하나라는 말은 교회는 오직 한 분 하나님을 믿고, 하나의 신앙고백을 가지며, 하나의 세례로 태어나며, 오직 하나의 몸을 이루고 한 분 성령님으로부터 생명을 얻기 때문이다. 그뿐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는 오직 하나의 교회를 세우셨다. 이 교회를 참으로 교회 되게 하는 것은 교회의 거룩성이라 할 수 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거룩하기를 요구하신다. 레위기 11장 44절에서는 “나는 여호와 너희의 하나님이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몸을 구별하여 거룩하게 하고…” 하셨다. 거룩함은 신앙과 성경의 축이 되는 범주를 규정하며 서로 관련된 두 차원을 가진다. 하나는 존재를 규정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행위를 규정한다. 전자는 존재론적 질문 곧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혹은 그의 본성은 무엇인가와 관계되고, 다른 하나는 윤리적인 질문 곧 하나님은 어떻게 행동하시는가 또는 그가 수행하시는 행위는 무엇인가와 관계된다. 거룩이라는 말이 하나님과 관련하여 쓰일 때는 그의 특별한 존재 양태를 표현한다. 그러므로 거룩한 하나님이라 표현하는 것은 전적인 타자, 전적으로 다른 궁극적 차원을 말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 세계의 연장이 아니다. 그는 전적으로 다른 실체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거룩해진다는 말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구속 곧 죄 사함을 받아 그의 거룩에 참여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거룩은 하나님의 인격의 핵심이다. 이 하나님의 거룩하심은 그의 사랑과 의와 구원의 능력이 우리 가운데서 사랑하고, 의롭고, 구원하는 그의 함께하심의 능력이다. 주님께서 가르치신 기도에서의 ‘거룩하게 하옵시며’에서 거룩은 다른 것과 같지 않은 것임을 의미하며, 다른 사람들에게서 구별됨을 뜻한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거룩하기를 명하시는데 우리는 하나님의 그 요구대로 거룩한가? “너는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에게 말하여 이르라 너희는 거룩하라 이는 나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 거룩함이니라”(레 19:2). 성경이 말하는 “거룩”이라는 말을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로서는 거의 표현 혹은 설명이 불가능하다고 할 수 있다. 문자적으로 ‘구별되다’는 말로 충분하지 않다. 그렇다고 ‘선’이라 할 수만도 없다. ‘하나님을 위해 구별된 것!’ 그것도 충분하지 않다. 그냥 ‘거룩’이라는 단어가 우리의 경건한 믿음으로 감지되는 그 어떤 성스러움에 담겨 있는 이미지라고나 할까?

어떻든 교회는 거룩해야 한다는 명제 앞에 우리가 있다. 말로 명확하게 표현할 수는 없을지라도 오늘의 교회가 성경이 말하는 대로 거룩한가? 거룩의 의미는 분명하지 않을지라도 오늘의 교회가 거룩하지 않다는 말에는 동의할 수 있을 것이다.

폴 위셔는 그의 저서 “현대교회에 대한 10가지 고소장” 여덟 번째로 이 거룩에 대해 언급한다. 그는 이 거룩을 그냥 구별됨으로 표현한다. 그러면서 오늘의 교회들이 이 구별 됨에 대해서 침묵하고 있다고 고소한다.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함께 메지 말라 의와 불법이 어찌 함께하며 빛과 어둠이 어찌 사귀며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어찌 조화되며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어찌 상관하며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어찌 일치가 되리요 우리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성전이라…(고후 6:14〜16상)

오늘날의 교회는 거룩한 삶에 대한 진지한 가르침이 거의 없다는 것이 위셔의 지적이다. 성도라고 하는 사람들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거룩한데 실제의 삶은 그렇지 못한 경우가 많다. 일반 성도들뿐만 아니라 목회자라는 사람들 가운데서도 말과 행실이 다른 이중적인 경우를 많이 본다. 더 나아가서 아예 말조차도 불신자들과 별반 다르지 않은 경우를 종종 보게 된다. 히브리서 기자는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따르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 했다. 이는 거룩에 있어 전혀 성장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이 우리의 삶에 역사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하나님이 우리 삶 가운데 역사하지 않으신다면 우리는 그분의 자녀가 아니라는 뜻이다. 사도 바울은 우리에게 이렇게 권면한다.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그러기 위해서는 이 세대를 본받지 않아야 할 뿐 아니라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를 분별해야 한다는 것이다.

위셔는 이렇게 강조한다. “하나님의 능력이 삶에 임하시기를 바라십니까? 그렇다면 하나님을 알기를 소원하십시오! 그리고 세상과 구별되십시오” 그러면서 이렇게 지적한다. “오늘날 교회는 세상으로부터 구별되어야 한다는 사실에 침묵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침묵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우리의 응답을 요구합니다.”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함께 메지 말라”, “빛과 어두움이 어찌 사귀며”,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어찌 조화되며”,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어찌 상관하며”, “그들 중에서 나와서 따로 있으라.”
그렇다고 세상을 등지고 수도원으로 들어가라는 말이 아니다. 그들의 부정한 것과 어둠과 마귀의 궤계와 불신자의 삶과 세속으로부터 나와야 한다. 우리는 세상에 살지만 세상에 속하지 않은 자들이다. 어쩌면 ‘거룩’이란 ‘세속’이라는 말과 반어적 의미로 쓰일 수 있다. 교회의 거룩은 전적으로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은 내면적이고 근본적인 거룩이다. 이 근본적인 거룩이 교회로 하여금 교회 되게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피로 인한 이 그리스도인의 내면적인 거룩이 자연스럽게 그 삶으로 표현됨으로써 교회의 거룩이 세상에 드러난다고 할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세속화해 가는 유럽 사회를 향해서 그 대안으로 성화를 제시한 한 신학자의 제안은 곱씹어 볼 만하다 할 것이다.

글쓴이 프로필
글쓴이 : 문효식 목사 (전 국제신학대학원대학교 교수·부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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