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베드로의 신앙고백과 나사렛 예수(Ⅳ)
<지난 호에 이어서>
VIII. 역사적으로 나타난 정치적 메시아 사상
역사적으로 많은 군중들은 고난의 종의 사상보다는 영광의 메시아 사상에 매료되어 왔고, 예수의 사상을 그렇게 오해하였다. 예수가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후 유대의 열심당은 로마 점령세력에 대하여 반란을 일으켰고, 그 결과로 주후 70년에 예루살렘은 로마군에 의하여 함락된다. 그리고 주후 2세기에는 시몬 바르 코크바(Simon Bar Kokhba)가 반란을 일으킴으로, 유대인들은 세계 각지로 유배되고, 이 유대 지역의 이름이 팔레스타인이라는 지명으로 바뀐다. 이들은 모두 정치적 메시아 사상을 실현하고자 한 자들이다.
예수 이후 근 2세기 동안 기독교인들은 로마의 지하동굴인 카타콤(Catacomb)에서 숨어 지내면서 신앙생활을 하였다. 카타콤(Catacomb)은 헬라어 ‘카타콤베’(‘낮은 지대의 모퉁이’란 뜻)에서 유래한 말이다. 1세기부터, 개종한 유대인으로 간주되었던 기독교도들은 종종 로마 영토에 살고 있던 유대인들과 같은 방식으로 바위 무덤에 매장되었다. 성 베드로가 바티칸 언덕에 있는 커다란 공동묘지에 묻혔고 성 바울이 ‘오스티엔세 길’에 있는 공동묘지에 묻힌 것도 이러한 연유이다. 2세기부터, 로마의 기독교도들은 지하에 공동 매장 공간을 두는 유대인들의 풍습을 물려받았다. 카타콤은 지하 동굴에 마련된 기독교 초창기 성도들의 피난처요, 예배처인 동시에 공동 지하 묘지를 뜻한다. 깊이 10-15m, 폭 1m, 높이 2m 정도의 지하 통로를 종과 횡으로 뚫고 계단을 이용해 여러 층으로 이동할 수 있게 만들어졌다. 직분별로 묘실이 구분되어 있기도 하며, 벽면에는 물고기 그림 등 많은 벽화가 새겨져 있다. 나폴리, 소아시아, 아프리카 등지에 많은 카타콤 유적지가 발견되고 있는데, 특히 로마 아피아 가도 주변의 카타콤이 유명하다. 초대교회 신자들은 콘스탄틴 황제의 공인이 있기까지 근 2세기 동안 로마의 박해를 피하여 이 지하공동묘지(Catacomb)에서 신앙생활하였다.
콘스탄틴 황제가 기독교로 귀의하면서 로마는 주후 313년 밀라노 칙령을 통하여 기독교를 공인하게 된다. 로마제국이 기독교화되면서 기독교는 이 지상 위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제도적 교회로 대체하였다. 스위스의 개혁신학자 브룬너(Emil Brunner)가 말한 바 같이 로마제국의 기독교 공인은 한편으로는 기독교가 서구 역사의 주류가 되도록 하는 크나큰 영향을 끼치도록 했으나, 다른 한편으로는 교회가 지닌 영성을 제도화함으로써 교회의 영적 공동체 모습을 변질시킨 것도 사실이다. 11세기 성지 예루살렘이 이슬람에 의하여 함락되자 성지 회복을 목적으로 당시 교황 우르바누스 2세의 요청으로 서구 기독교계가 군대를 동원하여 십자군 전쟁이 일어났다. 4차례나 있었던 십자군 전쟁도 하나님의 나라를 이 지상에서 추구하려는 영광의 메시아 사상에 지배된 것이었다.
16세기 종교개혁 당시에는 재세례파들이 정치적인 혁명을 일으켜서 독일 뮌스터(Münster)에 새 예루살렘을 세우고자 하였다. 19세기에는 자유주의 신학이 이 세상에 인간의 이성과 도덕에 의한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고자 하면서 예수의 사상을 인본주의적 평화의 나라로 해석하였다. 그리고 20세기 후반에 들어와서는 해방신학과 혁명신학이 하나님 나라를 정치적인 민중해방을 통하여 이 지상에 실현하고자 하였다. 한국에서도 1970년대 당시 군사정권에 대항하여 사회적 인권과 정의를 부르짖으면서 민중신학이 시작되었다. 당시 권위주의적 군사정권 아래 한국사회의 민주화와 인권 신장에 민중신학은 공헌을 하여 한국교회의 사회적 책임에 관하여 좋은 이미지를 남겼다.
그러나 민중신학은 베드로가 한 예수에 대한 인격적 신앙고백보다는 사회적 관심에 치중함으로써 교회의 정체성 문제를 야기시켰다. 더욱이 오늘날 한국에서 민주화가 실현된 이후 민중신학은 한계를 맞고 있다. 그리고 보수주의 기독교인들은 집단적으로 구국기도회, 각종 궐기대회를 열면서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고자 한다. 그러나 이것은 나사렛 예수의 진정한 하나님 나라의 메시지를 잘못 이해한 것이다. 하나님 나라는 이러한 사회정치적인 운동을 통하여 이루어지지 않고 “주는 그리스도시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베드로와 같은 신앙고백의 반석 위에서 이루어진다. 이 반석 위에 그리스도의 교회는 세워지고 교회는 말씀의 선포를 통하여 이 지상 위에서 사랑과 평화의 헌신의 조용한 변혁적 누룩운동을 통하여 단편적(斷片的)으로 이루어진다.
IX. 종교 개혁자 루터를 통한 베드로 신앙고백의 새로운 발견
예수께서 베드로에게 주신 천국의 열쇠는 제도적인 열쇠가 아니라 신앙의 열쇠요 약속이었다. 그런데 역사적으로 로마 천주교는 이것은 베드로가 제도적으로 받은 것이고 그 이후 로마 천주교가 이를 교황이 세습하는 것으로 주장하여 왔다. 이것이 중세 천 년 동안의 신앙적 암흑기인 것이다. 로마 천주교 신부(神父)였던 루터는 스스로 경건에 힘쓰다가 “자비로운 하나님을 발견하지 못하고” 진노하시는 하나님을 피하고 “은혜로우신 하나님”을 발견하기 위하여 노력하다가 절망에 빠졌다. 그러나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는 로마서 1장 17절의 말씀을 통하여 베드로의 신앙고백 이후 근 1천5백 년 동안 묻혀있었던 신앙고백을 다시 발견한 것이다. 칭의(稱義, justification)는 인간의 종교적 공로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에서 나를 대속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를 믿는 믿음을 통하여 하나님으로부터 선사된다. 그것이 루터가 발견한 종교개혁의 근본착상이었다. 종교개혁의 역사적 의미는 베드로의 신앙고백을 다시 발견한 것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칭의(稱義, justification) 신앙은 바로 예수가 메시아이심에 대한 바른 신앙고백에 근거하기 때문이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다”라는 신앙고백 위에 먼저 우리 개인이 그리스도인이 되고 제도적 교회가 진정한 교회가 되는 것이다. 제도적 교회는 그 안에 역사적 예수를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요 그리스도”라고 신앙고백 하는 신자들을 유형적으로 그리고 무형적으로 포함하고 있다. 오늘날 이신칭의의 신앙을 고백하는 종교개혁 전통의 교회는 ‘역사적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베드로의 신앙고백 위에 세워져 있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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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프로필 글쓴이 : 김영한 (기독교학술원장 / 숭실대 명예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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