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의 성경적 오류를 진단하다
본 연재는 <한국크리스천신문> 교회개혁 특별기획 좌담회를 지면으로 옮긴 것으로, 이번 좌담회에는 박용기 원로연구원(성경신학학술원, ‘성경신학총서(The Bible Theology Series)’ 저자)과 박홍기 박사(성경신학학술원 연구원), 성경신학 학술원 연구생 다수와 배윤리(한국크리스천신문 객원기자) 권사가 참여하였다.
객원기자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제15장은 ‘생명에 이르는 회개’를 다루고 있습니다. 대개 회개(悔改)는 통상 ‘신앙생활에 필요한 요건’이라고 합니다. 역시 신앙고백서에서도 회개가 신앙생활에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을 전제합니다. 한국 교회 교인들 대부분도 회개는 반드시 해야만 신앙생활이 가능하고 천국에도 갈 수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종교적 의식으로 전락하여 습관적으로 기도를 하는 것을 보면 반드시 회개 내용이 들어가 있습니다. 그렇게 회개하지 않으면 기도 자체가 성립하지 않는 것으로 종교적 관습으로 굳어져 있습니다. 기도하게 되면 회개는 무조건 필요하며 또한 정기적으로 회개기도 시간을 따로 마련해서 회개를 강요하는 집회를 열기도 합니다. 그런데 모든 인류의 경우가 죄와 허물로 죽은 처지에 있는 똑같은 사정인데 누가 누가에게 회개하라고 하거나 회개의 증거물로 사죄 헌금(獻金)을 내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야말로 구속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대속 사역을 무참(無慘)하게 짓밟는 일이 현재 일어나고 있는 한국 교회의 상황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고려하면서 신앙고백서 제15장의 회개에 대한 평가와 비판 나아가 성경적 대안까지 제시해 주시길 바랍니다.
S 연구생 신앙고백서에 대한 비판적 접근을 하고자 합니다. 우선 회개와 관련된 문제를 하나씩 짚어야 할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지금 교인들이 하고 있는 회개의 경우, 누구한테 무엇을 어떻게 얼마나 해야 하는지 참으로 자기 멋대로입니다. 그냥 종교적 의식에 따라서 맹목적인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물론 회개에 대한 성경적 근거를 확인하는 것과는 거리가 너무 멀어요. 성경과 거리가 멀다는 말은 성경에서 말하는 회개와 무관하다는 말도 되겠죠. 물론 하나님 앞에서 회개하라고 하지요. 그래서 많은 교회들이 회개 시간을 갖습니다. 그리고 이 회개에 대한 응답여부에 대해 주로 목사가 ‘처방’을 내립니다. 여기서부터 문제는 더욱더 심각하게 진행됩니다. 어떤 목사들은 무지해서 혹은 어떤 목사들은 의도적으로 자신이 하나님께 ‘중보기도’를 해준다고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빈손 들고 오는 것을 즐거워하지 않는다’고 말하면서 결국 ‘사죄 예물’을 요구하기도 합니다. 중보기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속죄사역으로 완성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목사는 예수 그리스도의 위치에서 자신이 중보기도를 해 주는 그야말로 ‘메시아 대행 업무’를 합니다.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일들이 지금도 한국 교회를 무지의 늪으로 몰아가고 있습니다. 성경적인 올바른 회개만 이해해도 무지의 늪에서 벗어날 수 있고 속지 않는다고 봅니다.
J 연구생 그런데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를 검토해 보면, 벌써 수백 년 된 개혁파 교회가 회개에 대한 성경적인 정확한 안내를 충분히 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신앙고백서에 보면, 회개는 복음의 은혜로 출발합니다. 그러면서 회개는 죄인이 하는 것이고 사죄(赦罪)는 하나님의 은혜의 사역으로 보고 있습니다. 또한 동시에 회개는 의무라고 하며 계속해서 해야 한다고 합니다. 물론 개혁파 교회는 천년 묵은 적그리스도적 적폐였던 로마 가톨릭의 ‘고해성사’에서 벗어나고자 몸부림을 치면서 성경적인 근거를 이곳저곳에서 인용하고 있습니다. 신앙고백서의 내용을 좌담회마다 살펴보았듯이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의 가장 큰 문제는 성경인용에 있다고 봅니다. 이미 신앙고백서를 통해서 하고자 하는 주장을 정해놓고 그에 관련된 낱말이 성경에라도 나오면 전후 맥락과 상관없이 인용합니다. 회개는 일단 무조건 해야만 구원에 이르는 것으로 가정하고 회개를 요구하는 구절을 찾아서 그 근거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물론 회개는 신약성경 처음인 마태복음 3장과 4장에서 세례 요한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드러나 있습니다. 하지만 그 회개가 무슨 뜻인지 바르게 설명하지 못한 상태에서 중세 천 년 동안 로마 가톨릭에서 해 오던 것을 결국 답습하는 꼴이 되었다고 봅니다.
성경신학학술원 원로 신약성경 마태복음 3장 2절과 4장 17절에서 세례 요한과 예수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에서 회개는, 간단히 말하면, 유대교에서 벗어나 실체로 오신 천국의 주인 그리스도 예수께로 돌이키라는 뜻입니다. 구약 본문에 몇 번 정도 나오는 ‘회개’라는 개념도 그 의미를 추적해 보면 모두 장차 오실 메시아에 대한 언약으로 귀결됩니다. 그래서 신약성경 첫 부분에 등장하는 회개는 예수께서 자신이 구약에서 언약하신 그리스도임을 증거하는 내용입니다. 그렇다면 회개의 명령자와 주관자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신약교회 모든 성도는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을 성령의 능력으로 깨닫게 되면서 세상에 속한 모든 것을 버리고 오직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만 진리의 자유함을 누리는 것이 회개의 본질입니다. 이런 점에서 회개는 전적으로 주 예수 그리스도가 주체가 되시고, 보혜사 성령이 주관자 되시며, 회개의 열매 감사는 오직 영존하시는 하나님께만 드리는 신령한 예배 생활의 요건이 됩니다. 그런데 신앙고백서는 이러한 점을 처음에 조금은 언급했지만 결국 뒷부분에 가면 로마 가톨릭의 고해성사와 별다른 차이를 보이지 않는 혼돈의 늪에 빠져버립니다.
사실 개혁파 교회에서는 회개라는 말보다 ‘회심(悔心)’이라는 말을 사용합니다. 세례 요한이 자기 시대에 오신 메시아이신 예수님을 소개하면서 회심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세례 요한 자신은 물로 세례를 주지만, 메시아는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셔서 ‘회심’을 시킨다고 증거 했습니다. 이 회심은 예수께서 자신을 세상에 드러내시면서 자신의 메시아 권능으로 유대인과 이방인 모든 백성 중에서 자신에게 속한 백성을 하늘에서 이미 이루어진 나라 곧 ‘천국’으로 그 백성을 인도하시는 전적인 메시아의 사역입니다. 물론 그리스도 예수께서는 그렇게 약속된 사역을 모두 하셨고, 부활승천하신 후에는 약속하신 보혜사 성령을 보내어 모든 택한 백성을 모아 ‘성령 세례’를 주시고 회심시켜서 어떤 경우에라도 주 예수 그리스도를 떠나지 않게 하시면서 영원토록 보존하고 계시는 것이 현재 어떤 장소와 시간에 구애받지 않는 성도의 신령한 예배의 삶입니다.
박홍기 연구원 원로께서 지금 말씀하신 것처럼 개혁파 신학은 구원의 서정 9단계(소명-중생-회심-신앙-칭의-양자-성화-견인-영화)에서 대개 성화만 빼고 모두 하나님의 은혜로 봅니다. 그런데 이 신앙고백서를 보면 은혜를 점점 약화시키고 있습니다. 정통 개혁파 신학의 입장보다도 더 퇴보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회심과 신앙, 칭의와 양자에 대한 신학적 해명을 성경적 근거로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다는 방증이기도 합니다. 앞서 원로께서 정리해주신 대로 회개는 처음부터 끝까지 주 예수 그리스도와 보혜사 성령의 사역입니다. 그로 인해 성도들은 단지 그의 백성이 되었다는 무한한 은혜에 감사하면서 자신의 허물을 볼 때마다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대속 사역을 찬양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살아계심을 전하며 성경에서 말하는 영원하신 여호와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능력을 영원토록 찬양하는 것이 성도의 본분임을 무엇보다 명심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한국 교회에서 현재 이루어지고 있는 의식적인 기도 내용 중에 회개의 시간이나 회개기도를 위한 집회는 성경적이지 않으며, 그것을 의식화하고 제도화하는 것은 성경진리에서 빗나가 있으므로 ‘비성경적 행위’라고 분명히 지적하고 싶습니다.
객원기자 누가복음 24장 47절에 보면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얻게 하는 회개가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전파될 것’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사실을 보더라도 회개는 예수 그리스도의 약속하신 바가 성취된 것 즉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미 하늘에서 창세전에 정하신 ‘하나님의 사역’이라는 점이 분명하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사도행전 1장으로 이어서 생각해 보면, 이 모든 회개의 주관자는 전적으로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는 보혜사 성령이시며, 회개는 예수 그리스도 안으로 인도하는 전적으로 그의 은혜의 사역입니다. 이런 점에서 성령께서 인도하는 회개는 ‘단회성’이 강합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 사역 혹은 구속 사역은 히브리서에서 확증하고 있듯이 ‘단번에 드리신 영원한 제사’이기 때문입니다. 지금 신약교회나 그 교회 지도자들과 성도들은 성경에 나타난 이러한 사실을 전해주는 것이 전부라고 봅니다. 그래서 신앙고백서에서 말하는 것처럼 회개를 지속적으로 해야 한다는 말이나, 한국 교회의 많은 교회의 목사들이 종교 의식적으로 회개기도를 강제로 시키는 것은 결코 미숙함으로만 정당화할 수 없는 정말로 심각한 비진리의 늪에 빠져있는 경우로 봐야 됩니다.
한국 교회의 반복적 ‘회개’ 요구는
로마 가톨릭 고해성사의 비성경적 적폐다.
S 연구생 지금 신약에 나타난 보혜사 성령의 사역으로 ‘회심’ 혹은 ‘회개’를 말씀하셨는데, 구약에서도 이러한 점을 더욱 확증할 수 있다고 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호와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것, 즉 ‘만군의 주 여호와 하나님’께로 돌아올 수 있는 것은 전적으로 언약대로 성취하시는 여호와의 사역으로만 가능합니다. 결코 자신의 능력으로는 여호와 앞으로 돌아올 수 없었습니다. 가령 이스라엘에서 남유다로 이어지는 이 나라는 여호와 하나님께로 스스로 회개하고 스스로 돌아올 수 없었습니다. 더 정확히 말하면, 여호와께서는 이스라엘 민족이 결코 스스로 ‘회개’할 수 없도록 하셨으며, 여호와 자신이 정한 때와 정한 곳에서 전적으로 자신의 방법대로 주권적으로 회심하고 회개‘하게’ 하셨다고 확신합니다. 이스라엘 국가의 진영을 보면 동서남북에 대적들이 항상 진영을 구축하고 있었으며 끊임없이 이스라엘을 침략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마음 놓고 섬길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동쪽에는 모압과 암몬, 서쪽에는 블레셋, 남쪽에는 에돔, 북쪽에는 아람이 지키도록 하셨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큰 제국들을 정기적으로 등장시켜서 이스라엘 혹은 유대나라를 점령하여 포로로 붙잡아가도록 하셨다가 여호와 하나님이 정한 시기가 되어서 돌아오게 하십니다. 큰 제국들 곧 애굽, 앗수르, 바벨론, 페르시아, 헬라, 로마 등 전부 이스라엘 민족이 마음껏 여호와 하나님을 섬길 수 없게 배치된 나라들입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이 ‘회개’하고 여호와 하나님께로 돌아올 수 있는 것은 전적으로 여호와 하나님의 주권이며 무한하신 은혜라는 사실입니다.
성경신학학술원 원로 하나 더 강조할 부분이 있습니다. 로마서 7장 후반부를 보면 성령께서 바울 사도로 하여금 죄의 법 아래로 사로잡혀 가는 자신을 깨닫게 하고 괴로워하게 하시는 내용이 나옵니다.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자신을 속인다’(11절)고 합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아무리 하나님 앞에서 ‘진정으로’ 회개한다고 해도 그것이 진정한 것인지 아닌지 우리가 판단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목사들이 주제넘게 진정한 회개를 위해서 이렇게 하라 저렇게 하라는 것은 그야말로 비성경적인 소행이 아니면 무엇이겠습니까?
좀 더 생각해 봅시다. 19절에 보면 성령께서는 바울 사도에게 ‘원하는 바 선은 행할 수 없고 도리어 원하지 않는 악’을 행할 수밖에 없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자신을 항상 사로잡는 것’(23절)을 깨닫게 하십니다. 성도들의 모든 행위에 대한 시작과 끝이 우리의 의지에 달려있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회개도 마찬가지입니다. 회개의 시작부터 끝까지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도하지 않으면 결코 그 무엇 하나라도 하나님 보시기에 ‘의로운 행위’가 될 수 없습니다.
오해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회개가 필요 없다는 말이 아닙니다. 회개를 통해 하나님 여호와와 주 예수 그리스도만을 경외하는 것을 깨닫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것을 말하려는 것입니다. 도덕적인 죄 몇 가지를 회개하면서 눈물 좀 흘렸다고 그것을 하나님 앞에서 ‘회개’라고 가르치거나 그것을 하라고 강요하거나 혹은 몇 끼를 굶었다고 크게 회개한 것처럼 만족하는 사람이나 모두 여호와 하나님을 ‘망령되이 만홀히’ 여기는 꼴이 됩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대속 사역을 망령되이 여기는 것이라고 봅니다. 한국 교회 성도들이 ‘회개’ 하나만이라도 성경의 바른 진리로 돌아갈 수 있어도 자유롭고 활력 있는 신앙생활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다음 호에 계속>
|
글쓴이 프로필 글쓴이 : |
원본 찾기 잃어버린 형상을 찾아 |
선교사는 거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