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의 성경적 오류를 진단하다
본 연재는 <한국크리스천신문> 교회개혁 특별기획 좌담회를 지면으로 옮긴 것으로, 이번 좌담회에는 박용기 원로연구원(성경신학학술원, ‘성경신학총서(The Bible Theology Series)’ 저자)과 박홍기 박사(성경신학학술원 연구원), 성경신학 학술원 연구생 다수와 배윤리(한국크리스천신문 객원기자) 권사가 참여하였다.
좌담회 13
객원기자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제21장은 ‘종교적 예배와 안식일’에 관한 내용입니다. 모두 7항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종교적 의식(儀式)을 중심으로 개혁파 신학의 ‘예배관’을 취급하고 있습니다. 1항은 예배의 대상이신 참 하나님과 그에 대한 예배 방법, 2항은 예배 중보자의 중요성, 3항과 4항은 기도와 그 방법, 5항은 예배에 필요한 의식과 절차, 6항은 예배 장소, 7항과 8항은 특별한 ‘예배일’로서 안식일과 그것의 준수 강조로 이어집니다.
오늘 주제는 모든 교회 성도들의 신앙생활과 직접 관련된 매우 실제적인 사안들로 보입니다. 많은 성도들이 우상숭배에 가까운 비성경적인 의식적 행동이나 무당들의 풍속(巫俗)에 가까운 행위를 여호와 하나님께 이른바 ‘예배’드리는 행위로 착각하고 있습니다. 로마 가톨릭을 개혁하자고 시작했던 신교(新敎) 곧 개신교 ‘예배 행위’는 구교(舊敎)와 별 차이가 없거나 더 타락하는 면도 많은 것이 현실입니다. 오늘 좌담회를 통해 살펴볼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제21장 ‘종교적 예배와 안식일’ 내용을 보면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가 이 정도일까 싶을 정도로 충격적입니다. 왜냐하면 370년 전에 작성된 이 고백서의 개혁파 교회의 예배관이 바로 오늘날 타락한 비성경적 예배 행위를 열어놓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늘 좌담회를 통해 비판과 대안을 제시하는 뜻있는 자리가 되기를 기대합니다.
박홍기 연구원 전적으로 동감합니다. 그리고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제21장 ‘종교적 예배와 안식일’ 고백문을 보면, 지금까지 수백 년 동안 이렇게 저렇게 점점 비성경적 예배로 흘러오는 원천이 바로 여기에도 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한마디로 개혁파 교회의 예배관은 그 당시부터 ‘개악(改惡)의 역사’로 평가하고 싶습니다. 예배관의 오염으로 점점 무속화와 의식화, 제도화와 형식화하는 비성경적 예배가 난무하는 한국 교회의 한가운데서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마치 광야에서 금송아지를 만들어 여호와를 대신하고 또한 예레미야 당시 아들을 몰렉 우상에게 태워 죽이면서 여호와 하나님께 잘못한 게 없다며 뻔뻔하게 변명하는 그 현장의 재현을 보는 것 같습니다. 물론, 비판에 앞서서 여호와 하나님의 진노가 나에게도 예외가 아님을 명심하면서 좌담회에 임하고 싶습니다.
그런데 오늘도 참석하고 계신 성경신학학술원 원로께서 25년 전 『무엇인가 II』(1994)에서 ‘예배란 무엇인가’를 성경 전체의 맥락에서 정리해주신 바 있습니다. 요즘 우리는 기독교지도자협의회를 중심으로 성령께서 교회를 성경의 원리에 따라 주관해 가시는 일들을 보고 있습니다. 그중에 하나가 바로 의식과 제도와 형식으로 왜곡된 비성경적 예배의 철폐와 극복 그리고 성경적 예배의 대안 제시의 사건입니다. 성경강론 중심으로 말씀 중심의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 즉 ‘영적 예배’(롬 12:1)에 대한 기독교 문화가 펼쳐진다는 것은 너무나 기쁜 일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우선 『무엇인가 II』에서 밝힌 ‘예배란 무엇인가’를 오늘 있을 좌담회 전체 방향과 관련해서, 저자도 여기 함께 참석해 주셨으므로, 잠시 정리해 보는 것이 유익하다고 봅니다. 예배(禮拜)는 한마디로 ‘희생과 봉사’로 이루어집니다. 희생은 쉽게 말하면 제물이 피를 흘려야 한다는 것이며, 봉사는 그러한 피 제사의 희생을 성경에서 제시한 대로 그대로 실천하는 행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구약시대 피 제사는 제물과 제단과 제사장이 있어야 가능한데, 이 모든 것은 그리스도로 오신 예수께서 제물과 성소(聖所)와 대제사장이 되셔서 모든 희생과 봉사의 주체로서 성취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과 봉사로 완성하신 제사를 성령께서 강림하셔서 세상과는 구별된 ‘거룩한 산 제사’ 곧 ‘영적 예배’를 통해 교회와 성도를 통해 주관해가고 계십니다. 세상 죄를 지신 어린양으로 오신(요 1:29) 예수께서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셨으며(마 20:22) 자신은 영원한 성전이 되셨습니다(계 21:22). 예수께서 십자가 죽음으로 제물이 되셨으며, 부활하심으로 성전을 완성하셨고 그리고 승천으로 대제사장이 되셔서 모든 모형적 예배를 영원한 제사로 완벽하게 성취하신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신약시대 성경적이며 진정한 예배의 진실입니다. 사도들 이후 신약교회는 보혜사 성령에 의해 감동으로 기록된 이러한 영원한 제사의 진리를 깨닫게 됨으로써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고 믿음의 분량만큼 주신 은사(恩賜)를 가지고 교회와 성도를 위해 희생하고 봉사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이며 ‘영적 예배’(롬 12:1)라고 봅니다. 성령께서 진리를 깨닫게 하심으로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것이 곧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는 실천으로 확증되게 하신다고 봅니다. 따라서 신약교회 시대에 특별한 장소와 시간, 의식과 형식을 구별하여 헌금을 강조한다면,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제사를 왜곡하고 부정하는 일이며 나아가 여러 이익을 계산해서 그것을 의도적 그리고 상습적으로 실천하고자 한다면 ‘적그리스도’에 가까워지는 악행이라고 봅니다.
P연구생 지금 연구원님의 긴 설명을 듣고 있자니 우리 한국 교회가 얼마나 부패한 예배를 하고 있는지 슬프기만 합니다. 한국 교회는 점점 로마 가톨릭으로 돌아가거나 아니면 그보다 더 부패한 면모를 여지없이 드러내고 있습니다. 교회 건물을 제사 드리는 성전(聖殿)으로, 연보(捐補)를 제물(祭物)로, 목사를 제사장으로 바꾸어 예수 그리스도의 ‘단 번의 영원한 제사’를 왜곡하고 있습니다. 가정보다는 교회 건물 안에서, 성경공부보다는 예배참여를, 집사나 권사나 장로보다는 목사가 예배(제사 행위)에 더 적합한 것으로 일상화하고 있습니다. 일상화한다는 말은 인간적 상식과 관습에 따라가는 세속주의가 그만큼 팽배하다는 뜻이며, 비성경적이 된다는 말과 같겠지요. 더 기막힌 것은 특별한 예배 의식을 한답시고 ‘은사집회’라는 것을 열어 거의 무속 행위에 가까운 판을 벌여 놓고 방언이나 예언 혹은 계시나 환상 체험을 재물과 함께 거래하는 정말로 타락의 극치를 보이는 일도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이 성경에서 말하는 예배가 무엇인지를 모르기 때문에 속이기도 하고 속기도 하는 우리의 상황입니다.
성경신학학술원 원로 지금 말씀하시는 것들을 들어보니 신약시대의 예배에 대한 성경적 의미를 이해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생각이 또 듭니다. 연구원이 반복해서 강조했던 ‘하나님이 기뻐하는 거룩한 산 제사’ 곧 ‘영적 예배’의 의미를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제사에 근거하여 모든 생활에서 깨닫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여호와 하나님을 인정하고 찬양하며 감사하는 ‘삶 자체’가 바로 신약교회 시대의 예배임을 다시 강조하고 싶네요. 이러한 ‘영적 예배’를 성경 진리로 무장할 때에만 비성경적 예배인 율법주의와 우상화와 기복주의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봅니다. 제가 25년 전에 정리했던 ‘예배란 무엇인가’의 결론에서 구약시대 예배(제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드리실 영원한 제사의 모형과 그림자이며, 신약시대 영적 예배는 ‘영원한 예배’의 선취(先取) 모습이라고 한 바 있습니다. 즉 신약교회의 사도와 성도들의 삶 자체가 예배 생활이며 이는 장차 천국에서 만왕의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무궁토록 여호와 하나님께 영광과 찬송을 하게 된다는 매우 중요한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러한 천국 생활로서 영원한 예배가 이미 예수 그리스도 당시부터 확정되어 시작되었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는 사마리아 수가에서 만난 여인에게 예루살렘을 비롯해서 어떤 특별한 공간에서 예배를 하지 말라고 금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너무나 유명한 말씀인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신령과 진정’은 ‘성령 안에서 그리고 진리 안에서’의 뜻입니다. 예배와 관련해서 그 뜻을 조금 더 풀어본다면, ‘보혜사 성령께서 깨닫게 하시는 진리를 통해 매사에 하나님 아버지를 사랑하며 살아가는 삶 자체’가 바로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는 것이라고 봅니다.
S연구생 이제까지 성경 중심적 예배에 대해 나눈 것을 토대로 신앙고백서 제21장 1~2항을 먼저 평가하고 그다음 3~4항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1항에서는 하나님을 예배하는 최선의 방법은 하나님 자신이 제정하셨다고 하면서 인간이 고안한 방법이나 사단의 지시에 따르면 안 되고 성경에서 말하는 방법에 의해서 해야 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성경에서 ‘예배 방법’을 제시한다고 할 때 이것이 만약 구약의 율법을 지금도 해야 하는 방법처럼 말하는 것이라면 큰 문제가 있습니다. 인용한 성경 근거 구절을 보면 구약의 신명기를 인용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큰 문제가 있습니다. 구약이 요구한 일체 모든 제사(예배)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모두 성취하셨습니다. 우리가 할 수도 없고 해서도 안 된다고 봅니다. 그리고 신약시대에 특별한 ‘예배 방법’을 찾는다는 것은 더더욱 시간과 공간, 의식(儀式)과 형식과 제도를 모두 폐하신 그리스도의 영원한 제사를 왜곡하는 것이라고 봅니다. 2항을 보면 예배 대상은 오직 삼위 하나님이시며 그리고 예배를 가능하게 하는 중보자는 오직 그리스도 한 분밖에 없다고 합니다. 큰 문제가 없어 보입니다. 문제는 3항에서 또 드러납니다. 기도는 종교적 예배의 ‘한 특별 요소’로 취급하고 있는데, 성령의 도우심이 필요하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것은 말이 되지 않습니다. 성도의 어떤 삶이든 성령의 교통하심이 없는 순간이 없습니다. 보혜사 성령께서 성도의 모든 삶을 주관하시기 때문에 성도의 모든 삶 자체가 여호와 하나님께 드리는 ‘거룩한 산 제사’이며 ‘영적 예배’가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4항에서 말하는 ‘합법적인 기도’ 혹은 ‘합당한 기도’도 문제가 있다고 봅니다. 합당한 기도의 주체는 우리가 아닙니다. 기도의 주체는 오직 성령 하나님이십니다(롬 8:26). 이렇게 보면 3항과 4항의 기도는 ‘의식(儀式)’적이고 ‘형식’적인 제도로서의 기도를 말합니다. 종교 예배의 특별한 한 부분을 부각하거나 절대화하면 반드시 비성경적으로 흐르며 그리스도의 영원한 제사는 왜곡됩니다.
Y연구생 계속해서 5~7항을 살펴보면 예배의 의식화와 형식화는 그야말로 ‘성경권위’마저 제사 행위(예배)의 수단으로 전락시키고 있습니다. 성경을 읽는 것, 읽는 내용을 경청하는 것, 이것이 어떻게 특별한 시간에만 해당합니까? 성령께서 시간과 여유를 주시면 감사하게 그 시간에 말씀을 읽거나 들을 수 있는 것으로 만족할 뿐이지 어떤 특별한 예배 행위를 종교적 의식처럼 돋보이게 하기 위해서 성경을 읽거나 경청하거나 설교를 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로마 가톨릭과 다를 바가 뭐가 있겠습니까? 전적으로 보혜사 성령의 사역인 성경 말씀 선포가 종교적 의식을 위한 도구로 전락하고, 성례(세례식과 성찬식) 역시도 의식과 형식으로 왜곡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서약이나 맹세라는 특별한 시간을 마련한다든지 금식을 한다든지 하는 이 모든 것들은 ‘그리스도의 영원한 제사’를 왜곡하는 비성경적 행태들입니다. 6항에서도 말이 되지 않은 자기모순을 보입니다. 예배 장소에 얽매이지 않아야 한다고 말하면서 동시에 혼자 하는 기도나 가정에서 예배하는 것보다 ‘공동집회’에서 하는 것은 더 엄숙해야 한다는 모순을 범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7항에 가면 공동집회 날을 구분하는데 ‘안식일’이라고 합니다. 안식일 날짜가 구약에는 일주 중 마지막 날인데 신약에는 일주 중 첫날로 바뀌었을 뿐이라고 합니다. 정말로 이 말은 안식일에 주인 되시며 모두 죄악의 권세를 물리치시고 성도에게 참 안식을 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제사를 뒤집는 망언이라고 봅니다. 어떻게 ‘주의 날(주일)’을 구약의 안식일 날짜만 바뀐 것으로 본단 말입니까? 그리스도의 제사 이후 주 예수 그리스도가 통치하지 않는 날이 없고, 그리스도 안에 있다면 항상 안식을 누리고 있는 삶입니다. 주일(통상 일요일)을 특별한 날인 안식일로서 주일을 지키라는 것은 율법주의로 돌아가자는 말입니다. 비성경적이며 날을 우상화하는 어리석은 주장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7장 마지막에는 안식일인 주일에 이른바 예배(제사)하는 곳(일명 ‘성전’)에서 하는 행동이나 자선 행위는 더 특별하다고 말합니다. 이것도 말이 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에게 속한 안식일이 주일이라면, 주일날 예배하는 장소인 ‘성전’에서는 그리스도께서 모든 제사 행위를 완성했으므로 심령의 안식을 누리며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사역을 철저하게 배우고 생각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봅니다.
성경신학학술원 원로 안식일과 주일은 완전히 다른 개념입니다. 구약의 안식일이 주의 날로 바뀌었다고 하는 성경 내용은 없습니다. 어설픈 논리로 성경을 왜곡하고 어리석은 성도들을 혹세무민하는 말입니다. 성경은 분명히 특별한 날이나 절기를 절대로 지키지 말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월삭이나 안식일을 인하여 누구든지 너희를 폄론(貶論)하지 못하게 하라”(골 2:16). 그리고 “이제는 너희가 하나님을 알뿐더러 하나님의 아신 바 되었거늘 어찌하여 다시 약하고 천한 초등 학문으로 돌아가서 다시 저희에게 종노릇하려 하느냐 너희가 날과 달과 절기와 해를 삼가 지키니 내가 너희를 위하여 수고한 것이 헛될까 두려워하노라”(갈 4:9~11). 그 외에도 많은 성경적 근거가 있습니다.
성경진리 중심의 교회라고 하더라도 만약 어떤 특별한 행위를 위한 제도나 형식이나 규범을 만들어 놓으면 잠시 후에 반드시 우상화와 무속화, 세족주의와 기복주의로 변질될 수밖에 없습니다. 교회생활 혹은 신앙생활에서 시간과 장소, 형상과 환경을 특별히 구별하는 행위는 정말로 철저하게 경계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서는 손으로 지은 전에는 계시지 않는다고 강조했습니다. 성도가 모이는 장소로서 교회당일 뿐이지 그 이상 어떤 의미를 부여해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신약교회의 ‘영적 예배’란 보혜사 성령께서 주관하시는 성도들의 삶 자체입니다. 때때로 육체를 가지고 살아가야 하기 때문에 육신의 소욕이 드러나는 것은 분명한 현실입니다. 하지만 성령의 소욕에 의해 보호받은 성도들의 삶은 어떠한 죄와 허물로도 진노와 형벌로 끝날 수는 없습니다. 성도들의 본질은 전적으로 여호와 하나님께서 창세전에 주신 신령한 복에 근거를 두고 있으며, 지금은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제사를 통해 영원한 안식을 누리며 하나님을 찬양하는 삶이 영적 예배의 본질입니다. 따라서 이러한 성도들의 영적 예배를 무시하고 특별한 형식이나 의식을 만들어 집행하는 것은 유치하기 이를 데 없는 처사입니다. 신약교회 시대에 형식적이고 의식적이고 제도적인 제사를 거행한다는 것은 히브리서의 진리를 정면으로 대적하는 범행(犯行)입니다. 성령의 소욕에 의한 영적 삶으로서의 신령한 예배만이 우리에게 남아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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