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예수교장로회연합회 교회동역자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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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8-01-09 22:37  기사 출력하기 글쓴이에게 메일보내기
 

일곱, 성경진리 확산의 수단 -인문주의(humanism)의 상반된 두 얼굴


23 곧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으실 것과 죽은 자 가운데서 먼저 다시 살아나사 이스라엘과 이방인들에게 빛을 선전하시리라 함이니이다 하니라 24 바울이 이같이 변명하매 베스도가 크게 소리하여 가로되 바울아 네가 미쳤도다 네 많은 학문이 너를 미치게 한다 하니 25 바울이 가로되 베스도 각하여 내가 미친 것이 아니요 참되고 정신차린 말을 하나이다(계 26:23~25).

1. 16세기 종교개혁의 준비:
  르네상스에서 인문주의로

앞의 본문을 잠시 살펴보자. 로마 황제 네로가 임명하여 유대에 파견한 총독 베스도와 사도 바울 사이의 논쟁 내용이다. 사도 바울은 예수가 그리스도이시며 고난받고 죽으셨지만 부활하셔서 이스라엘과 이방인의 구세주가 되신다고 증언했다. 이에 베스도 총독은 사도 바울이 공부를 너무 많이 한 결과 미쳐서 하는 소리라고 비난했다. 이에 바울은 물러서지 않고 응수한다. 미쳐서 정신 나간 말이 아니라 진리이며 제대로 정신이 박힌 주장이라고.

로마 지성인 베스도 총독의 눈으로 볼 때 결코 용납할 수 없는 말이다. 십자가에 처형당한 죄수가 다시 살아났고 이 세상 황제는 로마의 황제가 유일하며 그가 세상의 ‘빛’인데 또 다른 빛이 있다는 말은 결코 이해할 수도 용납할 수도 없는 말이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에 근거한 주장과 세상의 상식은 결코 만날 수 없다는 말이다. 나아가 세상의 상식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의 권위가 확증된 다음에야 비로소 자기 자리를 찾을 수 있다는 말이다. 우리는 이러한 명제를 1517년 종교개혁 이전에 일어났던 유럽 지성사의 중요한 사건 ‘르네상스’와 ‘인문주의’와 관련해서 다루어 보고자 한다. 그리고 이러한 서유럽 지성사의 의의는 오직 성경권위가 이끌어간 종교개혁의 정신 속에서만 그 의의를 찾을 수 있다는 점을 다시 한번 상기해 보고자 한다. 

일반적으로 문예부흥(文藝復興)이라 칭하는 원어는 프랑스어 ‘르네상스(Renaissance)’이다.  하지만 엄격히 말하면 그렇지 않다. 본래 14세기 인문주의 시인이었던 페트라르카(Petrarch)가 동시대 선배 단테 알리기에르의 시(詩)가 너무 존경스러워 찬사를 보내면서 고대 로마 시작품의 ‘재탄생(renascita)’이라고 표현했다. 이 말을 19세기 학자들이 인문주의의 문예(文藝) 현상들을 말하기 위해 프랑스어 ‘르네상스’를 사용한 것이다. 그리고 인문주의(humanism)란 말도 종교개혁 정신에서 조명하면 정리가 필요하다. 15세기 후반 르네상스 운동의 영향을 받은 대학에서 중세 신학 과목에 반발하여 새로운 과목을 개설한다. ‘후마나니 리테라이(humanae litterae)’라고 칭하며 신학관련 과목이 아닌 고대 그리스-로마의 문학 작품을 취급한 과정이었다. 이런 활동에 전념하는 자들은 자타(自他) ‘인문주의자(후마니스타, humanista)’라고 불렀다.(352)

이렇게 시작한 인문주의는 근대에 접어들면서 의미가 더 선명하게 된다. 이 배경에는 종교개혁(the Reformation) 사건이 있다. 중세 로마 가톨릭에 대한 반항에서 출발하는 인문주의는 후에 결국 종교개혁의 성경권위 회복운동에 대해서도 반대하는 자들이 된다. 즉 신본주의(神本主義)의 반대어로 사용하는 말로서 ‘인본주의(人本主義)’로 이해해도 무방하다. 인문주의와 인본주의는 영어 번역에서 모두 ‘휴머니즘(humanism)’으로 번역한다. 물론 중세 로마 가톨릭의 사상과 제도에 반항하여 시작한 인문주의 초기 운동가 중에는 성경 번역을 접하면서 종교개혁 운동으로 방향을 잡은 종교개혁자들도 있다. 이후에 인문주의자들은 성경권위를 앞세운 종교개혁자와도 자신을 분리해서 인문주의자 혹은 인본주의자라는 색깔을 더욱 선명하게 한 것이다.

그런데 서방에 일어난 인문주의 운동에 결정적인 사건이 있다. 바로 1453년 동로마제국의 멸망이다. 동로마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에 있었던 많은 헬라어 사용자 신학자들과 철학자들이 서방으로 대거 망명한 사건이다. 이들을 통해 전해진 플라톤의 원전들과 고대 그리스-로마 작품들이 쉴 새 없이 라틴어로 번역되었다. 플라톤의 원전 번역은 중세 문화를 위협하며 흔들어 놓았다. 현실세계를 중시하며 이 지상에 정교한 방식으로 건축물을 비롯한 온갖 양식의 조형물을 중시하는 스콜라철학에 대한 전면적 불신이 일어나게 되었다. 그리고 플라톤의 고전 부활은 중세 이전의 기독교로 눈을 돌리게 하는 자극제가 되기도 했다. 나아가 중세 로마 가톨릭의 교황 권위 이전의 기독교 즉 사도들이 기록한 성경 즉 성경 ‘원전(原典)’에 대한 관심을 증폭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인문주의 운동에 일어난 변화는 근대 지성에 큰 변화를 주었다. 번역을 정확하게 하기 위해서 필요한 작업인 단어 선별 즉 개념 이해가 매우 중요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글의 스타일 문제, 문장 구성의 전략 그리고 글자체까지 고려하게 된다. 예를 들면 우리가 알고 있는 이른바 필기체인 ‘이탤릭체’는 이 당시에 생겼다. 왜냐하면 빨리 필기할 수 있는 새로운 서체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다방면에서 영향을 준 인문주의자들의 고전 문예부흥 운동은 장차 유럽 전역으로 인쇄되어 보급될 하나님의 말씀 ‘성경’ 전파의 중요한 첩경(捷徑)을 준비하고 있었다.     

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부분적으로 하던 것이 폐하리라(고전 13:10).


2. 인문주의의 반란:
  ‘원전으로 돌아가라(Ad fontes)!’

종교개혁과 관련된 인문주의의 가장 중요한 자극은 역시 모든 문헌의 진실 여부와 그 정확성이 과연 있는지를 반드시 묻게 되는 고증 절차의 정착이다. 그런데 원전의 중요성에 불을 붙인 사건은 역설적이게도 있지도 않은 원전을 조작하고 날조한 사건 때문이었다. 이른바 중세 최대의 거짓말로 탄로 난 ‘코스탄트누스의 기진장(寄進狀)’ 사건이다. 4세기 동로마제국의 황제 콘스탄티누스가 당시 서방의 교황 실베스터 1세에게 기독교 세계 전체 지배권을 수여했다는 말을 조작해낸 것이 탄로났다. 그리고 14세기와 16세기의 교황들은 이것이 역사적 사실인 것처럼 성당 안에 프레스코화를 그렸다.(359) 거짓말에 거짓말을 더한 셈이다. 이것은 문헌에 대한 역사적 진정성 확인 문제와 그리고 문헌에 대한 권위 부여의 기준이 무엇이어야 하는지를 반드시 고민하게 하는 지적 풍토를 정착시켰다.

문헌의 권위 문제에서 인문주의자들을 놀라게 한 사건이 또 있었다. 바로 히에로니무스의 라틴어 번역(the Vulgate)에서 일어난 해프닝이다. 서구 유럽을 다니다 보면 모세의 동상이 가끔 나온다. 그런데 모세의 머리에 뿔이 있다. 그 뿔을 달게 한 장본인이 히브리어 구약 성경을 잘못 번역한 불가타 라틴어 성경 때문이다. 출애굽기 34장에 나타난 십계명을 받은 모세의 얼굴 광채를 ‘두 개의 뿔’이라고 번역한 것 때문에 모세 동상에 뿔이 있다.(360) 라틴어 번역에 대한 불신과 함께 성경번역 전체에 지대한 관심이 증폭되었다. 성경 번역 문제가 뜨거운 쟁점이 되면서 당시 유럽 지성계의 관심사는 이렇게 요약된다. ‘원전으로 돌아가라(Ad fontes)!’



(우리는 이 원전 회복의 정점에 서 있으며, 성경권위 회복을 성경의 원저자이신 보혜사 성령께서 회복하신 증거를 ‘성경신학(The Bible Theology)’에서 찾고자 하는 것이다.)


18 내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듣는 각인에게 증거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이것들 외에 더하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재앙들을 그에게 더하실 터이요 19 만일 누구든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에서 제하여 버리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생명나무와 및 거룩한 성에 참여함을 제하여 버리시리라(계 22:18~19)

<154호에 계속>

글쓴이 프로필
글쓴이 : 박홍기 박사 (주필 철학박사 미국 오이코스대학교 교수)
이메일 : jayouda@hanmail.net

‘하나님’ 이름 계시 [2]
하나님 이름 계시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