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교회 헌법’의 비성경적 불법성 지적과 대안 찾기
본 연재는 <한국크리스천신문> 교회개혁 특별기획 좌담회를 지면으로 옮긴 것으로, 이번 좌담회에는 박용기 원로연구원(성경신학학술원, ‘성경신학총서(The Bible
Theology Series)’ 저자)과 박홍기 박사(성경신학학술원 연구원), 성경신학 학술원 연구생 다수와 배윤리(한국크리스천신문 객원기자) 권사가 참여하였다.
1. ‘사도신경’과 교회 헌법, 무슨 상관이 있는가?
객원기자 장로교 헌법을 보면 제일 먼저 ‘사도신경’이 나옵니다. 현재 한국의 장로교가 성경권위보다 헌법의 권위를 강조하면서 또한 악용하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를 어지럽히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교회 헌법의 서두에 사도신경이 등장합니다. 왜 사도신경이 먼저 등장하는지, 또한 사도신경은 과연 성경에 기초한 고백문이 될 수 있는 요건을 갖추고 있는지, 역사적으로 과연 성경진리에 충실한 뒷받침이 되어서 작성되었는지도 궁금합니다. 교회 헌법의 비성경적 불법성을 정확하게 지적하고 기독교의 유일한 헌법으로서 성경 진리를 회복하는 일에 사도신경에 대한 평가는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봅니다. 오늘은 교회 헌법 초두에 나오는 사도신경에 대해 깊이 있는 논의가 이루어지는 좌담회가 되길 바랍니다.
박홍기 연구원 매우 뜻깊은 좌담회가 될 것 같습니다. 이를 위해 먼저 사도신경이 만들어진 과정을 간단하게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사실과 관련된 결론부터 말하자면 누가, 어떻게, 어떤 정당한 과정과 성경적 근거를 확보하면서 만들었는지 분명하지 않습니다. 초대 교회 특히 바울의 로마서 수신자인 그 로마교회가 세월이 흘러 로마제국의 수도로서 명성을 얻으면서 동시에 로마교회도 그 권위가 높아졌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하는 신앙고백이 4세기경 영향력을 얻게 되었다고 합니다. ‘사도신경’임을 강조하려고 이 고백문이 베드로부터 12명의 사도가 한마디씩 고백해서 만들어졌다고 하나 이것은 근거가 없는 얘기입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결코 성경권위보다 높거나 앞설 수가 없습니다.
이 고백문은 로마 교황이 통치하던 중세 10세기경 신성로마제국의 초대 왕인 오토 대제(Otto der Große)가 서방교회에 공식적 고백문으로 사용하도록 명령했습니다. 그 이후 로마 가톨릭교회는 각종 의식이나 미사에 사용하고 있으며, 성공회를 비롯하여 개신교에서도 이른바 의식적인 ‘예배’에 조금씩 바꿔가면서 사용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일반성도들은 그것을 왜 하는지, 그 내용이 얼마큼 성도로서 자신의 신앙을 대변하는지 큰 의식 없이 시키는 대로 하고 있는 답답한 실정이라고 봅니다.
사실 종교개혁 이후 개혁파 교회들 특히 장로교 교회사와 관련해서 볼 때, ‘사도신경’은 청산했어야 할 로마 가톨릭의 잔재나 부적절한 전통의 잔재로 보입니다. 현재 대부분의 장로교는 고백문의 한두 부분 (가령 로마 가톨릭은 ‘거룩한 가톨릭교회 Holy Catholic Church’라고 하는데, 예장통합은 ‘거룩한 공회 Holy Universal Church’로 사용함. ‘가톨릭’이라는 용어를 쓰지 않기 위해 다른 단어로 바꾸는 정도로 보임)만 로마 가톨릭과 달리해서 사용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수백 년 된 로마 가톨릭 전통을 가져다가 차용하면서 뭔가 정체성이 다른 것처럼 신앙을 고백한다면 이는 신앙고백부터 부정직하다는 비판을 면할 길이 없다고 봅니다. 다시 강조하지만, 사도신경은 개혁파 교회가 중세 로마 가톨릭의 신학을 넘어서지 못한 결과로 보입니다.
중세 로마 가톨릭의 잔재를
넘어서지 못한
미숙한 고백문인 사도신경!
J 연구생 연구원님의 설명을 듣자니 한국 개혁파 교회의 지도자들과 수많은 성도들이 무감각하게 ‘사도신경’을 이른바 ‘대예배’를 비롯한 각종 의식(儀式)에서 로마 가톨릭처럼 사용하는 것이 매우 심각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성경진리를 통해 여호와 하나님의 살아계신 확증을 통해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 및 여호와 하나님만 경외하고 찬양하도록 하는 기독교의 본질에서 너무나 많이 빗나갔다는 사실이 통탄스럽네요. 그런데 점점 궁금해지는 것이 바로 이것인데요, 이러한 사도신경은 왜 교회 헌법 제일 앞에 둘까요? 의도적이라면 로마 가톨릭에서 아직 벗어나지 못했다는 자기 고백이 된다고 할 수 있고, 별 감각 없이 앞에 배치했다면 성경과 신학에 대한 무지한 까닭이라고 밖에 판단할 길이 없네요.
성경신학학술원 원로 기독교의 법은, 『교회개혁론: 교회는 왜 어떻게 개혁되어야 하는가』(진리의말씀사, 2016)에 밝힌 것처럼, 오직 성경밖에 없습니다. 성경이 곧 교회의 유일한 법입니다. 교회 조직의 모든 원리와 방법이 성경에 모두 분명하게 나와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교회 헌법 자체가 비성경적 불법입니다. 더 정확히 말하면 교회의 유일한 법인 절대진리 성경을 두고 개혁파 교회가 ‘헌법’을 만들었다는 자체가 비성경적이며 인본주의적 발상이라고 봅니다. 거기에다 ‘사도전승’을 운운하며 중세 로마 가톨릭의 잔재인 ‘사도신경’을 헌법 제일 앞에 뒀다는 것은 무지한 까닭이라고 밖에 할 수 없습니다. 서구 개혁파 교회의 미숙함을 한국 교회가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여 그것도 모인 지도자들의 숫자로 우위를 삼은 헌법으로 마치 사도들의 전통을 따르는 것처럼 눈가림한 것이죠. 진정한 사도 전승 혹은 사도들의 고백은 이 또한 모두 신약성경에 분명히 나와 있습니다. 마태복음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차근차근 정확하게 가르치면 특별히 신앙고백을 만들 이유가 없지요. 이유야 어떠하든 성경을 가르치는 것은 등한시하면서 교회를 인위적으로 지배하려고 하니 몇 자의 미숙한 신앙고백을 만들어 무지한 성도들에게 강요한 꼴이 되어버렸다고 봅니다.
사도신경은 성경 전체 주체와
신학의 본질을
담지 못한 유치한 고백문이다!
G 연구생 그런데 사도신경을 보면 내용이 틀린 것이 없습니다. 하지만 조금 전에 연구원님과 원로님의 지적처럼 다분히 미숙하다는 평가가 정확하다고 봅니다. 교회의 절대표지가 성경인데 교회의 신앙고백이 성경 전체의 진리를 반영하지 못한다면, 이것은 오히려 하지 않는 것이 더 낫다고 봅니다. 역사적 과정을 보더라도 개인의 고백을 강요하여 구원을 이루게 하려는 로마 가톨릭의 인본주의적 의도나 성경 전체에 대한 무지에서 나온 신앙고백을 개혁파 교회가 여과 없이 사용했다는 것은 정말로 개탄스럽기까지 합니다. 또한 한국 장로교가 겉으로는 ‘성경권위’를 주창하면서 헌법을 따로 만드는 것도 모자라 그 헌법 제일 앞부분에 중세 로마 가톨릭의 잔재를 뒀다는 것은 도저히 묵과할 수 없네요. 사도신경은 내용상으로는 성경 전체를 반영하지 못해서 미숙하고, 의도적으로는 인본주의와 자유의지를 조장한 고백문입니다. 분명한 해악이라고 봅니다.
2. ‘사도신경’, 왜 헌법 앞에 두었는가?
객원기자 그런데 이렇게 성경 진리를 대변하지도 못하고 나아가 로마 가톨릭의 잔재라고 할 수 있는 사도신경을 개혁파 교회에서 교회 헌법의 제일 앞부분에 둔 이유는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박홍기 연구원 ‘사도신경’은 제목부터 의도적인 것처럼 보입니다. 사도권은 우리와 계급이 다른 어떤 특별한 권한은 아니라고 봅니다. 사도들은 예수님을 직접 따랐던 초대교회 증인으로서 매우 중요합니다. 하지만 바울은 예수님을 직접 따르지는 않았습니다. 그들이 우리와 다른 사역이 있다면 신약성경을 기록한 점이라고 봅니다. 하지만 신약성경 절반을 기록한 바울 사도는 요한계시록의 기록은 보지 못했습니다. 모든 사도들은 각자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신 자신의 사명에 감동한 ‘보내심을 받은 주의 종’들입니다. 사도들이 지금 로마 가톨릭에서 자신들을 성인(聖人)으로 추대하여 세워놓은 동상을 현장에서 본다면 그 사도들이 뭐라고 할까요?
로마 가톨릭은 교황제를 정당화하기 위해 베드로를 제1대 교황으로 추대하고, 그 교황의 전통을 교황들이 이어받고 있다고 조작합니다. 그래서 ‘사도신경’이 만들어질 때도 베드로가 제일 먼저 말했다는 너무도 의도적인 전설도 만들어 놓고 있습니다. 그런데 교회 헌법 앞에 사도신경을 두는 것도 로마 가톨릭의 의도와 다를 바가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헌법이 마치 초대교회부터 형성된 오랜 전통의 사도신경에 근거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게 하려는 것이죠. 열두 사도들이 마치 예수께서 주신 권한을 따라 교회를 다스렸듯이 교회 헌법에 따라 교회를 다스려보겠다는 의도가 드러난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여기에는 사도들을 우리와는 다른 특별한 계급에 속한 자로 보려는 비성경적인 인간관도 반영하고 있다고 봅니다. 만약 앞의 이러한 의도로 헌법을 만들어 교회의 성도들을 지배하고자 했다면 헌법은 당장 폐기해야 한다고 봅니다. 누가 누군가를 종교의 법으로 지배한다는 것은 로마 가톨릭의 인본주의적 정치행태이지 개혁파 교회의 본질과 정신은 결코 아니기 때문입니다.
S 연구생 교회 헌법 앞에 사도신경을 둔 이유가 의도적인 면이 있다는 점에 깊은 인상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점을 개혁파 교회 지도자들이 과연 얼마나 알까요? 그리고 성도들은 이렇게 의도된 조작의 성격이 헌법의 구성 배경이라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참으로 답답합니다. 종교가 맹종의 특성이 있다고는 하지만 한국 개혁파 교회가 의식적이건 무의식적이건 로마 가톨릭의 잔재를 헌법에서 사용한다는 점은 충격입니다.
성경신학학술원 원로 헌법 작성 자체가 비성경적이라고 했는데, 한발 양보해서 헌법을 만든다고 합시다. 서문을 온당하게 쓴다면 교회의 절대표지이며 교회의 유일한 법인 성경에 담긴 진리를 전체적으로 성도들에게 소개하는 내용을 실어야 합니다. 그런데 사도신경의 내용을 보면 성경관과 신관에서 치명적 오류가 있습니다. 성경에서 기록하고 있는 하나님의 이름 ‘여호와’에 대한 고백이 전무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에 대한 고백이 대부분을 자치함으로써 구약의 내용들을 전혀 담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성령 하나님께서 성경 전체를 통해 선포하시는 진리의 말씀에 대한 균형이 깨졌다는 것이 사도신경의 치명적 오류입니다. 조금 전에 누가 지적했지만, 내용상 거짓 진술은 없습니다. 하지만 그 명제가 성경 전체의 진리를 얼마나 담고 있느냐의 초점을 맞추면 미숙해도 너무 미숙하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천 년 이상 반복하다 못해 개혁파 교회까지 맹목적으로 따라 하고 있으니 정말 어디서부터 가르쳐야 하는지, 보혜사 성령 하나님의 돌보심을 간절히 바랍니다. 그리고 저는 이러한 안타까운 심정에서 2016년에 『교회개혁론: 교회는 왜 어떻게 개혁되어야 하는가』를 집필했습니다.
3. ‘사도신경’, 신앙고백의 주체를 왜곡할 우려가 크다 !
박홍기 연구원 고백문의 문장을 보면 주어를 일인칭으로 고백하고 있습니다. 제 생각에는 여기에도 비성경적인 인본주의와 자유의지를 전제로 한 로마 가톨릭의 의도가 반영되어 있다고 봅니다. ‘내가 믿는다’고 교황과 주교 앞에서 고백해야만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로마 가톨릭의 사상이 반영되어 있죠. 기독교 신앙에서 ‘내가’라는 주어는 조심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성령에 의해 중생한 영혼이 독자적으로 믿음을 결코 가질 수도 스스로 양육할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 점에서 사도신경 처음부터 ‘내가 믿는다’는 고백 방식은 ‘은총은 하나님이 주시고 고백은 내가 할 수 있고 내가 해야 한다’는 오해를 일으킬 소지가 다분합니다. 만약 교회 지도자나 성도가 사도신경의 주어를 ‘내가’로 본다면, 이는 몸은 개신교에 있고 영혼은 가톨릭 성당에 있는 꼴이 됩니다.
사도신경은 ‘내가 믿는다’고 함으로써
자유의지를 전제한
로마 가톨릭의 비성경적 신앙고백이며,
신앙고백의 주체가
인간 자신에게 있다는 것을
주입시키며 강요할 뿐이다!
성경신학학술원 원로 신앙고백의 주체 문제는 개신교 신학에서 매우 중요한 원리입니다. 간단하게 정리해 보겠습니다. 먼저 보혜사 성령께서 성경을 바르게 해석하게 하십니다. 그러면 성경에 근거한 신앙(믿음)이 생깁니다. 그리고 올바른 믿음에 기초한 신조가 확립되며 이는 교리로 이어집니다. 그 결과가 성경 전체에 입각한 신학 즉 ‘성경신학’이 수립되어 성경을 보면서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을 배우게 됩니다. 인간의 독자적 의지를 가지고 신앙을 고백하거나 신학을 전개할 수 있다는 발상은 비성경적입니다. 하나 더 말씀드리면 저는 오래전부터 신앙고백이나 신학 수립에 대해서 고민했고 이것을 성경을 통해 해명한 적이 있습니다. 『성경적 기독교』(진리의말씀사, 2010)에서 이 문제를 성경에 근거하여 설명했습니다.
신앙고백은 우리가 독립적 의지를
가지고 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주권적 사역이다!
이 책의 순서를 따라가면 다음과 같습니다. 성령께서 먼저 성령감동으로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게 하십니다. 그리고 여호와 하나님이 어떤 신인지 알게 하시며, 인간 나아가 성도란 무엇이며 누구인지 알게 하십니다. 그리고 역사관이 형성되게 하시면서 세계관을 확립하게 하시고 가치관을 수립하게 하십니다.
500년 전 교황권위를 비판하면서 성경권위 그리고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목숨을 다해 주장하고 실행에 옮긴 종교개혁 사건은 우리 신앙에 매우 중요합니다. 하지만 오늘도 살펴보았지만, 말로만 성경권위를 주장했을 뿐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왜 그 기록이 하나님의 말씀인지, 여호와 하나님의 살아계신 증거인지 확증하지 못했습니다. 그 결과 성경권위는 약화되고 인본주의 신앙고백인 로마 가톨릭의 신앙고백을 따라가는 슬픈 결과를 낳았습니다. 성경권위를 확증하지 못하면, 올바른 신앙고백은 결코 불가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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