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교회개혁 특별기획 좌담회 3- ‘교회 헌법’의 비성경적 불법성 폭로와 대안 찾기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의 미숙함을 진단하다
본 연재는 <한국크리스천신문> 교회개혁 특별기획 좌담회를 지면으로 옮긴 것으로, 이번 좌담회에는 박용기 원로연구원(성경신학학술원, ‘성경신학총서(The Bible Theology Series)’ 저자)과 박홍기 박사(성경신학학술원 연구원), 성경신학 학술원 연구생 다수와 배윤리(한국크리스천신문 객원기자) 권사가 참여하였다.
1.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의 성경관은 왜 그리고 어떻게 중세의 틀에 갇혔는가?
객원기자 지난 좌담회에서 초대 교회 유산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교회 헌법 전면에 나오는 ‘사도신경’의 지엽성과 편협성에 대해 비판적으로 접근했습니다. 이번에는 1649년에 제정되어 수백 년 동안 개혁파 교회가 지켜온 신앙고백의 정수(精髓)라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에 대해 심층적 분석을 하려고 합니다. 거의 사문화(死文化)되고 있지만, 교회 헌법이 존재하는 한 그 근거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이기 때문입니다.
박홍기 연구원 사문화되었다고는 하지만 (다른 교단들은 말할 것도 없고) 역설적으로 한국 개혁파 교회는 성경에서 멀어진 그 헌법을 더욱 악용하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와 성도를 교묘하게 혹은 노골적으로 농락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나아가 교회를 둘러싼 이권 쟁탈을 벌이며 교회 분쟁을 일으키고 세상 법정에 서로 고소·고발할 때, 교회 헌법을 이용하여 상대방을 궁지와 사지(死地)로 몰아넣으려 합니다. 이러한 행태의 문헌적 근거를 찾아가다 보면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이 있습니다. 물론 그 신앙고백 자체가 교회 분쟁을 야기하는 직접적 원인이 된다는 말은 아닙니다. 그런데 33장으로 되어 있는 그 신앙고백을 보면 이미 입법, 사법, 행정, 교육, 인사, 재정에서 목사가 그 지배 권한을 장악하도록 열어놓고 있습니다. 나온 김에 비성경적 조항을 하나 들어 보겠습니다. ‘제30장 교회의 권징에 대하여 : 1. 주 예수는 교회의 왕과 머리로서 세상의 치리와는 다른 정치원리를 교회 직분자의 손에 맡기셨다. 2. 이들 교직자들에게 천국의 열쇠를 맡기셨고 교직자들은 그 효력으로 말씀과 권징과 방편을 사용하여 죄를 보류 혹은 용서한다. 또 회개치 않는 자에게는 천국의 문을 닫고 회개하는 죄인들에게는 필요한 경우에 따라 복음의 사역에 의해서 또는 책벌 해제에 의해 천국의 문을 열어준다.’ 정말로 ‘성령으로 시작해서 육체(갈 3:3)’로 끝나고 있는 비성경적 독소 조항입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가 개혁파 신앙고백의 결정판이라고 하지만 결국 로마 가톨릭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이러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의 성경적 미숙함을 찾아내어, 더 이상 개혁파 신학과 교회와 그 성도들에게 무지와 폐습을 강요할 수 없도록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성경신학학술원 원로 서유럽을 중심으로 일어난 16세기 종교개혁 이후 한 세기를 지나면서, 개혁파 교회의 급성장이 일어났습니다. 신학교와 대학교 그리고 교회에서는 중세 로마 가톨릭의 불법과 폭압에서 자유로워지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운동의 핵심은 잘 아시다시피 바로 ‘성경권위’였습니다. 그러나 개혁파 교회에서 ‘성경권위에 대한 분명한 확증’을 하지 못한 데서 비성경적 위법과 불법이 만연하게 되었다고 봅니다. 물론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도 ‘성경권위’로 시작하고 있지만,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기록된 모든 말씀이 ‘여호와 하나님의 유일한 신적 권위의 계시’임을 확증하지 못한 미숙한 고백이며 그 유통 기한이 이미 수백 년 지난 것으로 빨리 버려야 합니다. 물론 이러한 주장은 우리가 ‘성경신학(The Bible Theology)’을 통해 성경을 정확무오한 하나님의 계시로 확증했다는 사실을 전제로 하며,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의 확실한 대안을 제시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의
구원 중심의 성경관은
성경을 인간 구원의 도구로
전락시켰다!
J 연구생 그런데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에 보면, 중세 로마 가톨릭의 비성경적 구원론에 맞서기 위해 성경에 나오는 구절을 중심으로 나름대로 성경적 구원론을 지키기 위한 역사적 의의는 있다고 봅니다. 하지만 바로 그 지점이 한계였다고 봅니다. 당시 성경을 ‘구원’에 필요한 지식으로 정의했기 때문입니다.
성경신학학술원 원로 중요한 지적이라고 봅니다. 서유럽 중심의 개혁파 교회의 전통은 결국 성경권위를 인간 구원에 필요한 도구로 전락시켰다고 봅니다. 성경에서 인간의 구원은 한 주제일 뿐입니다. 성경을 통해 무엇보다 먼저 영원히 살아서 존재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존재 확증을 하지 못하면, 성경은 인간 중심적이며 세속적 욕망을 채우는 도구로 전락되고 맙니다. 그래서 종교개혁 이후 중세 로마 가톨릭과 근본적 차별화를 시도하며 성경권위에 근거한 하나님 중심의 신학으로 주 예수 그리스도가 유일한 교회의 통치자 되시는 교회를 수립하고자 했지만 결국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그나마 초대 한국 교회가 성경권위를 외쳤던 개혁파 신학에 속한 교회로 설립되었던 것은 감사한 면이 많습니다. 정말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로마 가톨릭과 인본주의 철학에 기초해서 한국 교회가 세워졌다면 정말로 큰 불행이었겠지요.
박홍기 연구원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제1장 성경에 대하여’에서 성경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가령, 성경 저자는 하나님, 성경 내용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상호 일치됨과 전체의 완전성과 의미의 단일성, 성령의 내적 조명과 종교 논쟁의 최고 심판주는 오직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성령, 계시의 정지(특별계시로서 성경 완성됨), 성경해석의 정확무오한 법칙은 성경 자체(성경은 성경으로 해석함) 등은 하나님 중심의 바른 주장입니다.
하지만 그 이후 개혁파 교회는 앞의 사실을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모두 정확하게 확증하지는 못했습니다. 그리고 중세 로마 가톨릭을 배격하면서 성경을 구원의 원천으로는 삼았지만, 구원의 완성을 위해서 우리가 성경을 지켜야 한다는 인본주의 내지 자유주의의 타협을 열어두게 되었습니다. 또한 성경을 인간의 신앙과 구원에 필요한 법칙으로 규정함으로써 ‘성경권위’ 주장은 결국 인간 행위를 강조하기 위한 막연한 전제로 전추(顚墜)되는 꼴이 되어버렸습니다. ‘교회가 성경을 높이 평가한다, 성경은 예배와 교회 정치를 위해 지켜야 할 법칙이다, 예배하는 일과 교회정치에서 항상 지켜야 할 보편적 법칙이다’는 주장은 중세 로마 교황의 자리에 또 다른 인간의 권위가 들어설 여지를 주고 있다고 봅니다. 사실 성경을 인간이 지켜야 하는 법칙으로 주장한다면, 성경권위는 인간의 자유의지로 잘 지켜야 그 권위가 증명된다는 말이 됩니다. 이는 하나님 말씀의 운동력(히 4:12)을 약화시키거나 성경을 인간 행동의 도구로 치부하는 결과를 열어놓았다고 봅니다. 성경을 성령의 권위로 시작했으면 성령의 권위로 마쳐야 했는데 그렇지 못했으며, 이는 현재 한국의 개혁파 교회가 중세 로마 가톨릭보다 더 부패했다는 비판과 비난을 받는 중요한 이유 중 하나를 제공한 셈이 되어버렸다고 봅니다.
2. 신론과 삼위일체론에서 ‘악’의 문제를 왜 거론하지 않았을까 ?
객원기자 지금까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의 성경관을 인간 구원의 도구화 문제로 보고 비판했습니다. 그런데 성경을 구원론의 도구로 축소하면 신론(神論)에도 영향을 미친다고 봅니다. 영존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영광 계시보다 인간 구원에 도움이 되는 측면에서 성경을 보면 성경은 즉시 수단이 됩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자기 유익을 위해 성경을 삶의 수단으로 삼는 것에 대해 의문이 있었는데, 지금 좌담하는 가운데 ‘성경관’의 중요성이 결정적이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성경이 수단이 되면 하나님에 대한 이해도 구원 중심으로 축소되고 결국 신론도 인간중심의 인본주의로 될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G연구생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제2장 하나님과 성 삼위일체에 관하여’에서 하나님의 속성을 나열합니다. 성경의 낱말을 발췌하여 하나님의 ‘전능성, 절대성, 불변성, 자비성’ 등을 비롯해 30여 개를 서술했는데, 그 특징이 있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의 ‘악’ 섭리에 대한 부분을 의도적으로 넣지 않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은 말하고 있습니다. 이 상황을 정리해 보면, 삼위일체 하나님은 이른바 ‘무한하신 사랑’의 하나님으로 규정하고, 죄와 악은 자유의지가 있는 인간이 범하는 것으로 보려는 것이지요. 그리고 그 죄에 대해서 하나님은 심판하므로, 인간이 스스로 죄를 짓지 말아야 천국에 갈 수 있다는 논리가 만들어진다고 봅니다. 결국 인간의 공로를 주장하는 중세 로마 가톨릭의 전통을 이어가는 꼴이 됩니다. 이쯤 되면 삼위일체론은 인간 구원을 위한 신론이 되어 버리고, 또한 결코 수(數)로 환원할 수 없는 영원하신 하나님에 대해 ‘일(一)’과 ‘삼(三)’의 억지 조합을 만드는 미천하고 조야한 관념론으로 흘러간다고 봅니다.
성경신학학술원 원로 제가 총신대학교에서 공부할 때, 교의신학 신론 시간에 너무나 황당한 적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속성에 대해 ‘공유적 속성’과 ‘비공유적 속성’을 구분하는 것입니다. 첫 느낌에 그리스 신화 중심의 서양 철학의 영향을 받은 결과라는 느낌이 왔어요. 확인해 보니 하나님과 피조물을 이원론으로 놓고 전개하고 있더군요. 한 마디로 가소로운 논증이라고 봅니다. 어떻게 절대자 창조주인 하나님과 상대자 피조물인 인간이 무엇을 공유(共有)한다는 것이 가능하단 말인가요? 하나님의 속성을 이렇게 나누어서 논의하는 것 자체가 너무나 인위적이며 인본주의라고 봅니다. 이것은 마치 숫자(‘삼위일체’)로 영존하시는 하나님을 이해하려는 건방진 시도와 같은 경우라고 봅니다. 하나님을 산술적 이성으로 이해하려는 것이나, 인간중심적인 도덕적 관념으로 ‘공유’와 ‘비공유’를 이성적으로 나누는 일이나 모두 성경을 이해하는 데 해로운 전제라고 봅니다.
’선’과 ‘악’은 영원한 작정에 근거한
창조주 하나님의 절대 주권성의
계시 결과다 !
S연구생: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은 인간구원 중심의 고백으로 성경권위를 망친 천년의 비진리인 중세 로마 가톨릭의 구원 문제와 진리 투쟁을 하는 개혁파 교회의 신앙고백으로 시작했지만, 결국 인간의 자유의지를 열어놓고 성령 하나님의 절대 주권적 역사 섭리를 왜곡하는 결과를 초래했다고 봅니다. 교황권위에서 벗어났지만 성경을 구원의 책으로 축소하므로 결국 성령으로 시작해서 육체로 마치는 경우가 되었다고 봅니다. 또한 ‘악(惡)’의 문제를 하나님의 절대적 능력과 분리함으로써 서양 사상의 전형적 이원론(二元論)적 틀로 만들어버렸다고 봅니다. 사랑의 하나님은 인간에게 선(善)한 것만 주시고, 인간은 자유의지가 있으므로 하나님의 통제를 벗어나 독립적으로 악을 행하는 존재로 전제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생각은 성경과는 전혀 맞지 않는 가설입니다. 마치 그리스 신화에 많은 잡신들이 선과 악을 놓고 이전투구를 벌이듯이, 하나님과 인간이 서로 맞서 경쟁하고 거래하는 모습으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3.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과 절대 주권적 섭리가 ‘자유의지’와 양립한단 말인가 !
박홍기 연구원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제4장 창조에 대하여’를 보면, 창조는 결국 ‘인간의 자유의지’를 확증하는 근거라고 합니다. 절대주권자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에 근거한 창조론에 대해 의도적인 왜곡을 하고 있다고 봅니다. 고백에 따르면 인간은 ‘이성적이고 불멸의 영혼으로 율법 수행의 능력을 갖추고 있으며 자신의 의지의 자유에 따라 범죄 할 가능성이 있다’고 합니다. 인간이 율법 수행 능력이 있는데 그 능력을 자유의지에 따라 잘못 사용했던 것이 문제라고 봅니다. 하나님과 상관없는 일로 설명하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절대 주권적 섭리에서 악에 대한 작정과 정죄와 심판을 하나님과 무관하게 만들면서 인간이 잘못했다는 면을 부각시키고 인간이 잘하면 구원받을 수 있다는 가설을 만들어 내려는 것입니다.
말로는 ‘제5장 섭리에 관하여’에서 ‘가장 큰 것에서 가장 작은 것’까지 모두 창조주를 찬양하게 한다고 하면서도, 하나님은 제일(第一) 원인에만 해당하며, 제이(第二) 원인은 ‘필연적이며 자유롭게 혹은 우연히’ 일어난다는 자기모순을 범하고 있습니다. 이는 그리스 고대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의 가설을 도용한 것으로 보입니다. ‘필연과 우연’이 어떻게 공존한다는 말입니까? 말장난이며 이런 가설을 만드는 의도는 ‘섭리’를 말하면서도 죄악은 하나님과 무관하며 하나님은 죄의 조성자도 죄를 시인하는 자도 아님을 강조하려는 것입니다.
성경적 섭리론(攝理論)은
우연론이나 자유의지를
절대 허용하지 않는다 !
성경신학학술원 원로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은 그렇게 복잡한 문제가 아닙니다. 인간의 상식적 관념이나 수학적 이성의 틀에서 여호와 하나님을 억지로 이해하려고 하기 때문에 자꾸 문제가 됩니다. 영원한 뜻에 따라 작정하시고 우연을 배제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생각하면 피조물의 독립성을 어떻게 거론할 수 있겠습니까?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는 ‘작정론’에서 그야말로 갈팡질팡합니다. 하나님은 자유로운 존재라고 했다가 죄의 조성자는 아니라고 합니다(죄에서 자유롭지 못하게 됨). 인간 의지는 억제하지 않고 인간의 자유와 우연성은 있다고 했다가 영생과 죽음은 예지예정했다고 합니다(인간의 독립된 의지는 없음). 모든 것을 주권적 영광의 찬송을 위해 지었지만, 죄의 조성자는 아니라고 합니다(죄를 통해 드러나는 심판주의 능력이 축소됨).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이 성경관과 영원한 작정에서 이렇게 정리되지 않은 모순으로 출발하는 고백서이기 때문에 이후 개혁파 교회는 점점 이원론과 인본주의 중심의 교리로 전락해 버렸다고 봅니다. 성경에서 사단 혹은 인간이 독립적 의지를 가진 것 같은 장면이 있지만, 그 모든 것은 영원한 작정과 하나님의 절대 주권적 섭리 아래에 있다는 사실을 단지 믿는 것이 아니라 ‘확증’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저와 관련된 일이라서 좀 어색하기는 하지만 ‘성경신학(The Bible Theology)’이 바로 ‘여호와’ 곧 주어의 회복을 확증했다고 봅니다(www.ibt.or.kr 성경신학총서 강의 참조). 영존하신 하나님의 피조세계에서 발생하는 어떠한 사건도 하나님의 주권적 영역을 벗어날 수는 절대로 있을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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