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의 미숙함을 진단하다
본 연재는 <한국크리스천신문> 교회개혁 특별기획 좌담회를 지면으로 옮긴 것으로, 이번 좌담회에는 박용기 원로연구원(성경신학학술원, ‘성경신학총서(The Bible Theology Series)’ 저자)과 박홍기 박사(성경신학학술원 연구원), 성경신학 학술원 연구생 다수와 배윤리(한국크리스천신문 객원기자) 권사가 참여하였다.
1.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의 섭리론은 얼마나 성경적 미성숙인가?
객원기자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제5장 ‘섭리에 대해’에서는 ‘가장 큰 것에서 가장 작은 것에 이르기까지’ 하나님께서 ‘정확무오한 예지’를 통해 통치하신다고 합니다. 그런데 ‘예지(豫知)’를 강조하는 것에 비해 ‘하나님의 창세전 분명한 작정과 예정’에 대해서는 강조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여기에는 하나님이 ‘죄(罪)’의 조성자(造成者)가 아니냐는 질문에 대한 두려움 내지 성경적 확신의 미약함이 그 밑바탕에 깔려 있다고 봅니다. 오늘 좌담회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의 섭리론에 대한 성경적 미숙함과 나아가 창세전 영원한 작정에 따른 경륜에 의해 온 세상을 섭리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인식(認識)의 왜곡에 초점을 맞추면서 시작하고자 합니다.
성경신학학술원 원로 기자님의 질문에서도 어느 정도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의 섭리론의 본질적 문제가 노출되었다고 봅니다. 고백서 작성의 큰 틀을 보면 처음에는 ‘창세전 전택설’에 근거해서 시작합니다. 하지만 후반부에 가면 후택설이나 인간의 자유의지를 열어놓습니다. 이는 성경 이해의 미숙함의 결과로 결국 비성경적이며 인본주의적인 철학적 신관으로 흘러가게 됩니다. 결론부터 분명히 말하면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의 섭리론은 창세전 작정하신 경륜대로 빛과 어두움을 만드시고, 선악과를 에덴동산 중앙에 만드시며, 간교한 들짐승 뱀을 만드시고, 순전하고 정직한 욥까지도 사단에게 일방적으로 내어주는 전능자이시며 절대주권자이신 하나님에 대한 왜곡을 야기하고 말았다고 봅니다. 섭리론에서 반드시 다음 사실을 확고히 해야 합니다. 하나님 여호와께서는 영원한 작정에 근거한 경륜에 따라 세상을 만드신 창조주이시며 전능하신 절대주권자로 영원자존하신 분이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박홍기 연구원 원로께서 지금 지적하신 것처럼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은 하나님을 전능자로 그리고 절대주권자로 성경에서 확증하지 못한 결과로 인해 섭리론의 근본부터 인간의 자유의지를 열어놓는 결과를 초래했다고 봅니다. 그 고백서는 인간의 자유의지를 열어놓으려는 시도를 여러 곳에서 반복적으로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를 인간이 만든 교회 총회의 헌법이나 규칙 그리고 목사 지배 체제 중심의 제도를 불법적으로 만드는 것(예를 들면 제5장 7항, 제7장 6항, 제30장, 제31장 등등)으로 구체화됩니다. 결국 인간의 자유의지를 처음부터 전제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은 여호와 하나님의 충만한 계시인 교회 곧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인간이 함부로 지배하고 통제하겠다는 불법성을 처음부터 보여주고 있다고 봅니다.
객원기자 그렇다면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은 ‘하나님이 죄의 조성자(造成者)냐?’는 질문에 성경적인 확고한 해답을 제시하지 못한 결과, 섭리론 즉 신론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에서 비성경적 결과를 낳고 말았다고 생각됩니다. 5년 6개월 동안 150여 명의 목사들 중심의 위원회가 1천 회 이상 모인 회의 결과로 나온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의 그 중심 주제는 창세전 작정하신 대로 세상과 모든 피조물을 만드신 창조주 하나님으로부터 독립된 인간의 ‘자유의지’를 정당화하기 위함이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결국 인간의 자유의지를 확정하려는 의도로 성경에서 그럴듯하게 보이는 구절들을 맥락과 상관없이 인용하는 그야말로 성경을 ‘사사로이’ 억지 해석하는 불법도 일어날 수밖에 없다는 생각도 연이어 듭니다.
성경신학학술원 원로 섭리를 다루는 제5장의 조항에 보면 만사(萬事)가 제일 원인(原因)에 의해 필연적이라고 하면서 동시에 ‘자유롭거나 우연한 일’이 일어난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기자와 연구원의 지적대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의 성경적 미숙함과 나아가 비성경적 불법성의 중요한 단서를 제공하고 있어요. 성경을 피상적으로 보면 피조물 특히 인간이 자유의지를 가지고 자기 임의로 행동하는 부분들이 많이 등장합니다. 그리고 우연하게 보이는 사건이 발생하는 것처럼 보이는 부분도 있어요. 하지만 ‘의미(意味)’를 중심으로 영존하시는 여호와 하나님 계시 중심의 성경해석(제가 《성경강론총서》 20권에서 증명한 것처럼)을 해 보면 어떤 말씀도 창세전 언약에 근거를 두어야 하고 나아가 인간이 자기 의지를 가지고 행동하는 것처럼 보이는 사건도 모두 창세전 언약을 하나님 자신의 정한 때와 장소에서 절대 주권적으로 성취하시는 내용이란 걸 확인할 수 있습니다.
결국 미숙한 신관 이해는 비성경적 불법적 제도로 나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다시 한번 ‘하나님을 아는 지식’ 즉 ‘신론’에 대한 성경적 확증이 얼마나 중요한지에 대한 경각심을 높이는 계기가 되어야 한다고 봅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은 ‘섭리론’ 4항에서 인간의 ‘죄악성은 피조물에게서만 나온다’고 주장합니다. 흔히 말하는 거룩하고 의로우신 하나님에게서 죄악성이 나올 수 없다는 말이겠죠. 이 말은 영존하시는 하나님 여호와에 대한 심각한 왜곡이 담겨있음을 알 수 있어요. 인간의 상식과 정서의 틀 속에 성경의 하나님을 가둬 버리려는 어리석음을 스스로 자백하고 있다고 봅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은 하나님을 죄의 조성자나 시인자가 아니라고 합니다. 하지만 조성(造成)이란 말은 절대자이신 창조주와 상대자인 피조물의 관계를 분명히 전제하고 이해해야 합니다. 첫날에 빛과 어두움을 나누신 분이 바로 전능하신 창조주 하나님이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악’이 구체적으로 활동하여 인간에게 ‘죄’로 확정되는 사건은 창세기 3장에서 나옵니다. 이때 인류 시조에게 악을 범하게 하고 죄인으로 만드는 불법의 주도는 창조주 하나님이 만드신 처음부터 살인한 ‘들짐승 뱀’이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선과 악의 법을 태초부터 확정한 분도 하나님이시고, 악을 구체적으로 인류의 시조의 내면에 자리 잡도록 절대 주권적으로 확정하는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이는 악의 도구로 만든 들짐승 뱀을 ‘악한 날에 적당하게’(잠 16:4) 사용해서 작정하신 경륜대로 계시섭리를 하시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조성(造成)의 의미를 빛과 어두움의 창조자이며 들짐승 중에 가장 간교한 옛 뱀 곧 사단(계12:9)까지 만드시는 창조주의 전능성과 주권성의 계시의 관점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피조세계의 상대적 ‘죄악성’을 주권적으로 섭리하시는 절대자이심을 성경에서 분명하게 확정하지 못한 상태에서 하나님을 인간 도덕적 기준으로 왜곡하는 결과를 초래한다고 봅니다. 따라서 하나님은 선한 신이고 사단은 악신으로 구분하는 이원론을 초래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죄의 ‘시인자’가 아니라고 했지만, 시인(是認)의 의미를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죄 아래 두겠다는 주권적 섭리의 측면에서 본다면, 이 또한 절대자 하나님의 능력을 계시하는 너무도 분명한 증거가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창조주의 전능성을 계시하는 성경의 첫 부분에 선과 악을 확정해 주는 것은 성경해석상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봅니다. 창세기 3장 이후부터 요한계시록까지 나타나는 여호와 하나님의 속성을 피조물의 상대성과 결코 혼동하지 않게 하겠다는 계시 기록의 특별한 의미도 담겨있다고 봅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의 ‘섭리론’은
하나님의 절대 주권성을
성경으로 확증하는 데 실패했다!
박홍기 연구원 결국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은 성경에 근거를 두고 성경 전체에 나타난 영존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절대 주권적 섭리를 이해하는 데 실패함으로써, 이후 고백서 전체에 걸쳐 ‘죄악’의 문제가 나올 때마다, 절대자 하나님의 전능하신 속성을 배제하게 되고 인간은 자유의지에 의해 자신의 구원을 스스로 이루어야 한다는 성경진리의 왜곡을 야기하고 말았군요. 이렇게 되면 중세 로마 가톨릭의 ‘공로 중심’의 인본주의 구원관으로 다시 예속되는 결과를 피할 수가 없게 됩니다.
그런데 이러한 증거는 그 고백서에 분명하게 나타나 있습니다. 섭리론 마지막 내용에는 갑자기 ‘교회 보호’ 내용이 나옵니다. 하나님께서 죄악성을 포함한 모든 것을 교회에서 유익하도록 처리하신다고 합니다. 이 말은 앞서 말한 섭리론과는 모순됩니다. 모든 하나님의 섭리가 교회에 유익하다면, 세상의 죄악성이나 혹은 지상 교회에서 나타나는 죄악성도 교회에 유익하다는 말이 되어야 한다고 결론을 내려야 논리적 일관성이 있습니다. 세상의 죄악성과 지상의 교회에 드러나는 죄악성을 하나님께서 섭리하신다고는 하지만, 그러한 섭리 과정이 전능하신 하나님의 영광계시 선포라고 분명하게 고백하는 데는 결국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왜냐하면 예를 들어 설명해 보겠습니다. 돌아온 탕자 비유의 경우, 일반적으로 방탕한 아들이 돌아오는 데 궁극적인 목적을 두고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하신 이 비유의 말씀은 우선적으로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성을 깨달게 하시는 하나님의 사역의 능력을 계시하는 데 목적이 있습니다. 비유에 보면 아버지가 아들을 내어보내는 것입니다. 세상 즉 죄악성에 자기 아들을 버리듯이 내어맡기는 주권적 섭리를 하고 있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봅니다. 그러니까 이 비유는 인간이 받는 은혜가 목적이 아니라 절대 주권적 섭리로 죄악성을 포함해서 은혜를 주관하시고 깨닫게 하시는 하나님의 능력과 그 영광을 찬양하게 하는 데 그 목적이 있다는 뜻입니다. 사족을 더 붙이면, 불경건하고 악한 자들도 잠언 16장 4절 말씀처럼 악인을 벌하는 것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악한 날에 악인을 쓰시는 하나님의 능력의 영광을 드러내는 데 궁극적 목적이 있다고 거듭 강조하고 싶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악 자체를 지상의 교회가 자기 능력으로 법과 제도를 만들어 대처하고 방어하고 징계하고 척결하라는 명령이 아닙니다. 어쩌면 상상을 초월하는 인간의 죄악성이 드러나는 바로 그 현장에서도 살아계셔서 역사를 절대 주권적으로 섭리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능력의 영광을 깨닫고 경외케 하시려는 것이 계시 기록의 궁극적 목적이라고 봅니다.
2.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의 ‘허용적 작정’은 얼마나 유치한 발상인가?
J 연구생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은 6장에서 하나님의 악의 섭리(인류 시조의 타락)와 관련해서 ‘허용적 작정’을 말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섭리론에 대한 비판적 분석 과정을 살펴볼 때, 왜 ‘허용적 작정’이라는 말이 나오는지 알 것 같습니다. 인간의 자유의지를 전제하려는 의도가 담겨있는 표현이라고 봅니다. 지금도 일어나는 불법으로 악의 문제 특히 지상 교회에서 드러나는 악행들에 대해 일단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은 하나님이 ‘허용’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인류 시조 아담과 하와에게도 ‘악’을 허용했고 그 이후 지금도 악행이 드러나는 것은 허용하기 때문에 그렇게 된다는 논리적 추론도 할 수 있습니다. 이 말을 좀 더 강하게 말한다면 악은 전능하신 하나님이 허용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일어날 수 없습니다.
성경신학학술원 원로 그런데 문제는 ‘허용(許容)’이라는 말에 담긴 의미입니다. 여기에는 성경 이해의 미숙함과 신론의 섭리론 왜곡이 여실히 드러나고 있어요. 오늘 우리가 함께 확인한 바 있지만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은 어떻게 해서라도 ‘인간의 자유의지’를 명시하려고 합니다. 물론 이것은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이해를 성경 전체에 걸쳐 일관성 있게 해석하지 못한 필연적 결과라고 봅니다. 인간의 도덕적 정서에서 성경을 이해하거나 세상의 우상이나 이방 잡신을 이해하는 방식으로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을 이해하는 데서 생긴 미숙함과 어리석음이라고 봅니다. 그래서 허용이라는 말은 인간이 자유의지를 가지고 스스로 자꾸 죄를 범하려고 하므로 어쩔 수 없이 하나님이 허락해주는 것처럼 이해합니다. 왜냐하면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의 작성자 중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은 죄와 무관한 도덕적 신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입니다. 자유의지를 가지고 인간이 죄를 지으려고 애를 쓰니까 하나님이 어쩔 수 없이 마치 능력의 한계에 부딪혀서 끌려간 경우가 되는 것이 ‘허용’의 의미가 됩니다. ‘허용적 작정’에서 ‘허용적’은 반드시 버려야 하는 말이라고 봅니다. 인류 시조의 타락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작정’하신 대로 성취된 것이며 그리고 형벌도 하나님이 세워놓은 법대로 처리함으로 세상에 절대적 입법자와 유일한 심판자는 오직 여호와 한 분밖에 없다는 것을 계시하기 위함이라고 봅니다.
’허용적 작정‘은
인간의 자유의지를 옹호하려는
인본주의적 발상의 결과이다!
박홍기 연구원 섭리론에 대한 성경적 미숙함이 필연적으로 비성경적 불법성으로 이어진다는 것을 지금 지적하신 ‘허용적 작정’의 허구성으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인간의 자유의지를 강조함으로써 인간들은 자신들의 의지가 반영된 ‘법’을 성경을 빙자하여 만들게 되고 인본주의적 발상에 의해 제정한 그 ‘교회 헌법’을 결국 성경권위 위에 두는 ‘적그리스도’적 발상을 하게 된다는 사실을 직감하게 됩니다. 요한계시록 22장 마지막 부분에서 ‘기록된 말씀 외에 더하거나 제하면 생명나무와 거룩한 성 참여를 허락하지 않겠다’는 말씀이 더욱 분명하게 다가옵니다. 지금 눈앞에 보이는 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과 그에 따른 인위적 성경 인용과 그 결과물인 교회 헌법(정치, 권징조례, 예배모범)은 500년 서양 기독교 전통의 성경권위 확정의 한계와 미숙함과 인본주의적 불법성을 보여주는 명백한 증거가 되고 있다는 확신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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