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의 성경적 오류를 진단하다
본 연재는 <한국크리스천신문> 교회개혁 특별기획 좌담회를 지면으로 옮긴 것으로, 이번 좌담회에는 박용기 원로연구원(성경신학학술원, ‘성경신학총서(The Bible Theology Series)’ 저자)과 박홍기 박사(성경신학학술원 연구원), 성경신학 학술원 연구생 다수와 배윤리(한국크리스천신문 객원기자) 권사가 참여하였다.
1. 여호와 하나님께서 세우신 최초의 언약은 ‘창세기 2장 17절의 행위언약’이 아니라, ‘창세기 1장 28절의 은혜언약(삼대언약, 三大言約)’이다.
객원기자 지난 호(161호)에 다루었던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제7장 ‘하나님의 언약’의 문제점을 정리하면서 좌담회를 시작하려고 합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이 전제하는 심각한 문제인 ‘자유의지’에 관련된 부분을 다시 정리하면서, 제8장 ‘중보 그리스도’로 나아가고자 합니다.
박홍기 연구원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의 제1장 성경관부터 살펴본 결과, 이 신앙고백서는 인간의 독립된 자유의지를 사상의 토대로 삼는 ‘알미니안주의’로 흘러간다는 것에 심각함이 있습니다. 지엽적으로 보면 ‘언약(言約)’ 개념을 회피하고 상대적 관계가 돋보이는 ‘계약(契約)’이라고 번역한 것은 한국의 장로교 헌법 수립자들의 무지이거나 아니면 어떤 다른 의도가 있다는 점도 엿보입니다. 인간의 자유의지를 어떤 방식으로든 묵인 내지 부각시켜 개혁파 신학의 원천인 ‘성경말씀의 신적 권위’와 ‘하나님의 절대 주권성’을 약화시키고 있다는 것이죠. 인간의 자유의지에 근거해서 언약을 찾다 보니 인간에게 독립된 자유의지를 주는 것처럼 보이는 창세기 2장 17절을 최초의 행위언약으로 본 것이죠.
그런데 창세기 2장 17절도 자세히 보면 인간의 의지를 찾아볼 여지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 언약 수립 자체가 여호와 하나님의 일방적 선언으로 된 것이지 인류시조 아담에게 상의한 바가 전혀 없습니다. 그리고 ‘먹는 날에는 죽으리라’는 언약은 ‘인간이 먹으면 죽는다’는 뜻이 결코 아닙니다. ‘먹는 날이 있고, 먹는 날이 되면 죽는다’는 여호와 하나님의 일방적 선언일 뿐입니다. 성경신학적으로 간단히 정리하고 갔으면 합니다. 창세기 2장 17절은 최초의 언약도 아니며, 인간과 하나님의 상호 계약도 아니며, 여호와 하나님의 일방적 선언이며 언약입니다. 정리가 필요한 부분은 창세기 1장 28절에서 자손·땅·통치 언약과 창세기 2장 17절의 먹으면 죽으리라는 언약이 상충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모두 언약입니다. 즉 모두 반드시 이루어져야 할 것입니다. 그 해결이 바로 창세기 3장 15절입니다.
정리해보겠습니다. 창세기 1장 28절에서 여호와 하나님이 세우신 삼대언약은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그런데 창세기 2장 17절은 이 삼대언약(三大言約)을 이루는 수단입니다. 즉 여호와 하나님이 언약했으며 인간의 행위와 상관없이 그 언약을 이루시는 것임을 계시하는 수단입니다. 그래서 창세기 2장 17절도 이루어집니다. 이른바 ‘전적 타락’ 사건입니다. 여기서 끝나서는 안 됩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창세기 3장 15절에서 창세기 1장 28절을 결코 취소하지 않습니다. 비록 하와에게는 잉태와 출산의 수고가 따르고, 아담은 땅도 저주받고 땀도 흘려야 하지만 창세기 1장 28절의 삼대언약을 취소하지 않습니다. 이처럼 은혜언약을 통해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가 은혜 되도록 하는 섭리 수단과 방편이 바로 창세기 2장 17절의 이른바 ‘행위언약’이며, 이 두 가지는 창세기 3장 15절에서 완벽하게 이루어지면서, 여호와 하나님은 세우신 언약을 반드시 보호하시는 ‘신실하신 분’임을 계시하고 있다고 봐야 합니다. 창세기 1장 28절과 창세기 2장 17절 그리고 창세기 3장 15절은 어떤 경우에서라도 인간의 독립된 자유의지를 열어놓는 부분이 없다는 것을 다시 강조하고 싶습니다.(이에 대해 박용기 저, 『성경강론 1』, 성남: 진리의말씀사, 2018의 주석에 매우 잘 나타나 있습니다.)
성경신학학술원 원로 지금 연구원님이 설명한 것을 좀 더 보완할까 합니다. 제가 주창하는 ‘언약성취섭리사적 성경신학(聖經神學)’에서 매우 중요한 부분을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창세기 1장 28절은 인간의 독립된 의지를 전제한 ‘문화명령’이 결코 아닙니다. 삼대언약의 내용이 자손과 땅 그리고 통치, 즉 문명국가와 통치 개념인데 ‘문화(文化)’라는 용어도 어울리는 개념은 아닙니다. 화란 개혁파 전통의 치명적인 약점이라고 봅니다. 창세기 1장 28절이든 창세기 2장 17절이든 모두 여호와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맺으신 언약입니다. 그 목적은 인류를 위한 것이 아니라 여호와 계시 즉 여호와 하나님의 존재와 능력과 속성을 선포하는 데 있습니다. 또 하나 매우 중요한 사실은 이러한 언약이 모두 장차 오실 메시야에 대한 언약이라는 사실입니다. 즉 인간이 독립적으로 실천하는 데 있어서 그때마다 도덕적 법칙처럼 사용해서는 절대 안 된다는 것입니다. 구약의 어떤 부분은 메시야 언약이고 어떤 부분은 우리가 해야 하는 것이라는 성경에 대한 태도 자체가 ‘성경권위’에 대한 도전입니다. 요 5장 39절이나 눅 24장 44절 두 부분만 보더라도 예수님께서 구약을 모두 자신에 대한 언약 사건임을 증거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창세기 1장 28절을 은혜언약의 수립으로, 창세기 2장 17절을 은혜언약의 성취 수단으로, 창세기 3장 15절을 은혜언약의 확증과 보증으로 봐야만 ‘하나님의 언약’ 교리가 성경적 고백이 된다!
P연구생 두 연구원의 비판을 듣고 보니 ‘언약’ 개념에 대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은 결국 인간의 자율성을 옹호함으로써 본래의 개혁파 정신을 훼손한 결과를 초래한 것으로 보입니다. 150여 명의 유수한 신학자와 학자와 목사들이 5년 6개월 간 일천 회 이상 모여 작성한 것이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이라고 알고 있는데, 그 내용에 보이는 비성경적 내용은 정말로 딱하기 그지없습니다. ‘오직 성경만’으로 교회를 세워가는 일에 전념하고자 했던 일이 사람의 마음대로 될 수 없다는 냉혹한 결과를 보는 것 같습니다. 정말로 진리보호는 인간이 아니며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로만 가능함을 거듭 확인하게 됩니다.
2. ‘중보자’ 그리스도를 ‘참 인간’으로 표현하는 것은 성경적인가 ?
객원기자 자유의지를 열어놓고 알미니안주의로 향하는 것은 이 신앙고백의 치명적인 비성경적 부분으로 보입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계속 이어진다고 보는데요, 제8장 ‘중보 그리스도’에 대한 고백은 어떤지 의견을 주시길 바랍니다.
성경신학학술원 원로 기독론과 관련해서 쉬운 얘기는 아닙니다만 매우 중요한 부분이라 꼭 지적하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전통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참 하나님’이며 ‘참인간’이라고 하는 점에 대한 비판입니다. ‘참 하나님’(요 17:3; 요일 5:20)이란 개념은 성경에 나오는 개념입니다. 그런데 ‘참 인간’이란 말은 성경에도 없으며, 이러한 용어를 만든 의도가 무엇인지 짚어야 한다고 봅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요한복음 전체의 내용으로 주장한다면, 말씀이신 예수님은 하나님입니다(요 1:1). 인성을 입었다고 해서 그분의 본성이 훼손당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곧 신성이 그 본질입니다. 그래서 ‘참 하나님’과 ‘참 인간’을 대등한 개념으로 사용하는 것은 용납할 수 없다고 봅니다.
마태복음에서 요한복음까지 보면 구약의 언약대로 오신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본성으로 보면 하나님입니다. 처녀 잉태에서부터 부활하여 승천하시는 예수님은 하나님입니다. 성결의 영으로 보면 육신의 몸으로 잉태되었을 때도 그 본성은 신성이신 하나님입니다. 다만 죄 있는 육신의 몸을 입으시면서 죄를 전가 받으신 것은 분명합니다. 죄를 전가 받았다는 말과 죄성을 가진 존재가 되었다는 것은 분명히 구분해야 합니다. 죄를 전가 받았다는 말에는 본성이 신성이신 부분이 전혀 훼손당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죄성을 가진 존재가 되었다는 말은 예수님이 죄인이 되었다는 말이 되므로 신성이 훼손당한다는 성경적이지 않은 결과를 초래합니다. ‘참 인간’이란 말은 인간이지만 인성이 아니라는 자기 모순적인 말이 됩니다. 예수께서는 본성이 신성이신 하나님이시며, 육신을 입으신 것은 죄인이 되신 것이 아니라 어린 양(‘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처럼 죄를 전가 받으신 것입니다. 죄를 전가 받으신 것은 그 죄를 심판하여 처리할 분이 오직 본성이 하나님인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로마 가톨릭처럼 마리아가 성령으로 잉태된 예수님을 낳았기 때문에 마리아가 거룩하다고 숭배하는 것은 예수님이 잉태부터 육신으로 죄를 전가 받았다는 것을 모르기 때문에 발생하는 무지의 소치라고 봅니다. 죄성을 입은 육신을 본성이신 신성과 억지로 섞으려고 하다 보니 ‘참 인간’이란 개념이 만들어졌다고 봅니다. 그리고 죄성을 입지 않은 어떤 한 부분의 육신이 있는 것처럼 예수님을 ‘참 인간’으로 규정하고, 육신을 가진 인간들도 예수님처럼 열심히 공로를 쌓으면 하나님께 의(義)가 된다고 강조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참 인간’은 예수 그리스도의 죄 전가 받으심을 바르게 이해하지 못한 결과이며 또한 예수 그리스도의 본성도 오해한 결과적 표현이라고 봅니다.
예수께서 누가복음 18장 18~19절에 자신을 ‘선한 선생님’이라고 부르는 관원에게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일컫느냐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다”고 답하신 적이 있습니다. 이 말씀에 보듯이 육신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은 분명합니다. 죄를 전가 받은 예수님도 눈에 보이는 육체를 ‘선하지 않다’고 하십니다. 이 말은 육신에서 어떤 ‘참 인간’의 단서를 가져올 수 없다는 것입니다. 동시에 인간의 어떠한 육신의 노력도 결코 의로운 것은 없습니다. ‘참 인간’을 강조하면서 인간이 독립된 자유의지를 가지고 하나님께 어떤 행위를 하면 하나님 앞에서 어느 정도 의로운 행위가 된다는 발상은 예수 그리스도의 완벽한 속죄 사역을 부정하는 결과를 초래합니다. 그리스도가 의로운 사역을 완성하신 것은 오직 그분의 본성이 신성 곧 하나님이기 때문에 오직 그분만 가능한 것입니다. 인간의 경우와 본성적으로 질적으로 전혀 다른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어떤 한 부분을 보고 인간인 우리도 예수님처럼 육신의 몸을 가지고 예수님을 따라 하겠다는 발상은 예수님의 본성 이해의 치명적 오해의 결과입니다. ‘참 인간’이란 말은 비성경적이므로 사용하지 말아야 하는 개념이라고 봅니다. 그렇지 않으면 예수께서 죄 있는 육신의 몸을 입으시고 육체로 오심을 부정하는 치명적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참 인간’은 비성경적 표현이며, 본성이 하나님이심을 확증하지 못한 미숙함의 결과이다!
박홍기 연구원 ‘참 인간’에 대한 발상을 보면 예수님의 본성에 대한 성경적인 충분한 이해가 부족해서 생긴 필연적 결과로 보입니다. 성경신학 원로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를 ‘참 인간’으로 지칭한다는 것은 예수님의 본성이 신성 곧 하나님이심을 완벽하게 증명하지 못한 결과로 보입니다. 사복음서에서 신성을 본성으로 확증하지 못하면 예수님은 같은 인간으로서 ‘우수한 도덕 선생’으로 간주할 수밖에 없습니다. 가령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제8장의 5항에 보면 ‘주 예수는 완전한 순종과 영원하신 영을 단번에 드렸다’고 합니다. 여기서 ‘인성’의 여지는 전혀 없습니다. 완전한 순종이 되는 것은 어디까지나 예수 그리스도의 본성이 신성이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지 인간의 몸으로 순종했다고 해서 인성이 한 것처럼 말하고 ‘참 인간’이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본성은 그만큼 약화됩니다. 육의 몸을 입으신 것과 함께 죄를 전가 받으셨으므로 ‘참 인간’을 만들어 하나님께 인간으로서 순종했다고 말하면 예수는 그야말로 ‘인간 예수’가 됩니다. 우리 인간을 ‘미숙한 인간’으로 보고 예수님을 우리 인간보다 좀 나은 ‘참 인간’으로 만들어 하나님과 인간을 화목 시키는 ‘중개인’ 정도로 본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본성에 대한 심각한 왜곡입니다.
무한한 능력을 가지고 계신 하나님께서 뭐가 아쉬워 중보자를 만들겠습니까? 중보자는 인성에 무게를 둬서는 안 됩니다.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라고 할 때는 최소한의 인성 개입이 일어나서는 안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은 전적으로 신성에 의해서만 가능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존재와 사역은 하나님으로서 그 본성은 신성이어야 합니다. 이른바 타락했기 때문에 중보자를 보내 구속한다는 구속사 중심의 신학에서는 중보자를 그야말로 인간 중심적으로 만들어냅니다. 우리의 공로가 부족하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가 인간으로 와서 우리와는 다른 어떤 인간적 능력으로 했다고 봅니다. 구속자 중심의 신학은, 기독론의 측면에서 보면, 신성이신 예수 그리스도 본성을 인간화하는 치명적 결함을 가지고 있습니다. 제8장 중보자의 7항을 보면 그리스도는 ‘신성과 인성을 따라 행한다’고 했는데, 이 자체가 그리스도의 본성을 오해하는 증거가 됩니다. 7항 끝부분에 ‘한 품성에 적합한 것이 다른 성품으로 지칭된 몸에 나타난다’고 합니다. 이 역시도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을 대등하게 놓고 생각하는 발상의 결과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어떤 사역의 본질도 인성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아들로서 순종을 할 수 있는 동력은 예수님의 신성 곧 예수님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신성과 인성이 무질서하게 나타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복음서 이해에 대한 미숙함의 결과로 보입니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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