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예수는 열심당원(Zealot)이었던가?(Ⅲ)
III. 평화주의자 그리고 인종 무차별, 보편주의자 예수
2. 인종 무차별, 보편주의자 예수
<지난 호에 이어서>
예수는 가버나움에 주둔한 수비대의 비유대인 군인 백부장의 믿음을 보시면서 이방인 백부장의 믿음을 칭찬하신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보지 못하였노라”(마 8:10). 예수는 믿지 않는 유대인들에 대하여 질책을 가하시면서 앞으로 동서로부터 많은 인종들이 복음을 믿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게 될 것을 시사하는 인종 무차별 보편주의자였다: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동서로부터 많은 사람이 이르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천국에 앉으려니와, 그 나라의 본 자손들은 바깥 어두운 데 쫓겨나 거기서 울며 이를 갈게 되리라”(마 8:11-12). 예수는 불법을 행한 유대 종교지도자들은 하나님 나라에서 쫓겨 나가고 동서남북으로부터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믿음을 가진 이방인들이 하나님 나라의 잔치에 참여하게 될 것을 말씀하신다: “너희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모든 선지자는 하나님 나라에 있고 오직 너희는 밖에 쫓겨난 것을 볼 때에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리라. 사람들이 동서남북으로부터 와서 하나님의 나라 잔치에 참여하리니, 보라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도 있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될 자도 있느니라”(눅 13:28-30).
폴 존슨은 그의 저서 『유대인의 역사』(I)에서 다음같이 피력한다: “그는 폭도의 지도자나 민주주의자 혹은 게릴라 두목과는 거리가 멀다. 오히려 그는 신학자이자 희생당한 피해자이며 삶과 죽음을 통해 모범을 보인 선생이다”(Paul Honson, A History of the Jews(I), 『유대인의 역사』(I), 287)
마태는 예수의 말씀 “동서로부터의 사람”이라고 기록한 데 반하여 누가는 이를 더욱 “동서남북으로부터 온 이방인”으로 확대하여 기록하고 있다. 여기서 예수는 유대 민족주의가 아닌 하나님 나라의 복음 앞에서 복음을 믿는 지구촌의 모든 사람들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유대 나라가 아닌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이 저들의 하나님이 되는 하나님 나라 보편주의를 가르치고 계신다.
IV. 원수 사랑 가르친 예수: 원수 응징의 무함마드와 차이
1. 예수의 원수 사랑: 비보복 역설
나사렛 예수는 전통적인 보복의 윤리에 반(反)하여 비보복의 윤리를 역설하였다. 예수는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탈리오(Talio)의 법칙에 반(反)하여 자신의 독특한 비보복의 윤리를 가르치신다: “또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 또 너를 고발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마 5:38-40). 예수는 더욱더 적극적으로 원수에 대한 사랑의 윤리를 가르치신다: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신 23:6; 스 9:12)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마 5:43-44). 원수를 사랑하고 우리를 박해하는 자에 대한 기도의 가르침은 예수 윤리의 독특성이다.
“원수를 미워하라”는 계명은 구약성경에는 없다. 예수 시대의 유대교 내부의 당파싸움에서 비로소 그러한 계명이 나타난다. 쿰란 문서에 “모든 빛의 아들을 사랑하고 모든 어두움의 자식들을 미워하라”는 요구가 나온다. 예수는 그 시대의 가르침을 넘어서서 자신의 독특한 사랑의 계명을 가르치셨다. 사랑할 때 비로소 하나님 아버지의 아들딸이 된다는 것이다: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려주심이라”(마 5:45). 이러한 예수의 비보복과 사랑의 윤리는 당시 유대교 전통에서 찾아볼 수 없고 나사렛 예수에서만 찾아볼 수 있는 그의 유일한 독특성이다.
2. 무함마드(Muhammad)의 원수 응징 사상: 오늘날 이슬람 IS의 무차별 폭력
지금 전 세계에서 일어나는 살인·폭력 테러의 70~80% 이상은 이슬람에 의한 것이라는 분석이다. 이슬람에 의한 폭력 테러는 중동 지역뿐만 아니라, 태국, 필리핀, 인도 등 아시아권과 미국과 유럽 등지에서도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다. 원리주의 이슬람은 ‘종교의 이름’으로 살인과 테러를 일상적으로 범하고 있는 것이다. 그 근본원인은 이슬람의 ‘경전’과 ‘교리’에 있다.
이슬람의 창시자 무함마드(Muhammad)는 포교를 시작하던 초기에 메카에 있었다. 그때는 우상숭배자들 틈에서 유일신교를 선포하자니 반대와 핍박이 심했다. 추종자들도 소수였기 때문에 기독교와 유대교인들을 자신의 추종자로 끌어들이고 핍박을 면하기 위해 평화적 메시지들을 전했다: ‘종교는 강제로 하지 말라’(꾸란 2:256), 혹은 ‘너희에게는 너희의 종교가 있고 나에게는 나의 종교가 있을 뿐이다’(꾸란 109:6), ‘너희가 다 알라(Allah)를 배신해도 알라께서는 너희와 볼 일이 없으신 분이다’(꾸란 39:7), ‘기독교인들이나 유대교인들이나 구원받을 것이다’(꾸란 2:62)라는 계시가 내려왔다는 것이다.
그러나 핍박이 심해지자 그는 622년 메디나 지역으로 근거지를 옮겼다. 이를 히즈라 혹은 헤지라라고 한다. 그곳에서 2년이 채 안 되어서 정치적, 군사적 통치권을 쥐게 된 무함마드의 태도는 돌변하게 된다. 무함마드는 메디나에 온 이후에 계속되는 계시를 통하여 쿠라이쉬 부족의 상인들을 상대로 칼을 들고 약탈과 전쟁을 하게 되었다. 무함마드가 받은, 전쟁에 관한 계시는 ‘칼의 계시’라고 불린다.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어디에서든지 이교도를 발견하면 그를 붙잡아라. 포위하여 죽여라. 그리고 모든 매복 장소에서 기다려라’(꾸란 9:5). 그의 가르침은 비무슬림에 대하여는 증오, 보복과 폭력으로 바뀐다. 이슬람의 경전인 ‘꾸란’에 보면, ‘이슬람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죽여라’(꾸란 9:5), ‘배신자는 죽여라’(꾸란 4:89), ‘이슬람을 거부한 기독교인, 유대교인들은 가장 사악한 피조물이고 영원토록 지옥 불에서 고통을 당하리라’(꾸란 98:6)는 계시가 내려왔다는 것이다. ‘전쟁은 너희들이 싫어할지라도 너희에게 과하여진 의무니라’(꾸란 2:216). ‘종교가 오로지 알라만의 것이 될 때까지 싸우라’(꾸란 8:39). ‘다신교도를 발견하는 즉시 죽여라’(꾸란 9:5)라는 내용들이 들어 있다. 이런 종류의 구절이 꾸란에 109구절이 된다. 무함마드는 70여 차례 전쟁을 치렀으며, 그 가운데 직접 군대를 지휘한 것도 27차례나 된다.
계속되는 전투에서 세(勢)를 확장한 무함마드는 이슬람을 전하기 위하여 각 지역으로 선교사를 파송했다. 시리아 남부의 알타흐로 보낸 15명의 이슬람 선교사들이 지역 주민들에게 살해당하자, 무함마드는 3,000명의 이슬람 병사들을 보내어 보복했다. 무함마드는 칼을 들고 아라비아반도를 통일했다. 그러므로 오늘날 IS 등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의 폭력에 대하여 친이슬람 인사들이 아무리 이슬람교를 변호하고 옹호하기 위해서 ‘평화의 종교’(위장 교리: 타끼야(Taqiyah))라고 선전해도 그 말은 설득력이 없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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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프로필 글쓴이 : 김영한 (기독교학술원장 / 숭실대 명예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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