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 강점기의 찬송가 수난사
3·1절을 맞이하여, 『한국 교회음악 수용사』(문옥배 지음, 예솔출판사)를 읽고, 일제 강점기의 찬송가 통제에 대하여 요약하여 글을 쓰고자 한다.
일제는 대한민국 지배 초기부터 한국의 민족성을 말살하여 일본화시킴으로 영구적으로 우리를 식민 통치하려 하였다. 민족 말살과 동화 정책은 일제 식민 통치의 기본 방침이었다. 일제는 출판법을 통해 출판물을 통제하였고, 조선총독부 내에 도서 검열을 담당하는 검열계를 설치하였으며, 불온 문서 단속법과 언론출판 집회결사 등을 단속하는 법을 공포하여 통제를 강화하였다. 또한 종교와 음악은 사회적·문화적으로 큰 영향력을 갖기 때문에 일제의 통제는 종교와 음악에도 가해졌다.
윤치호(1866~1945)는 1905년에 찬송 15곡을 수록한 ‘찬미가’를 출간하였는데, 1912년 ‘치안 방해’라는 이유로 조선총독부에 의해 금서가 되었다. 그 이유로는 ‘찬미가’의 편찬자가 민족지도자라는 점과 제14장에 ‘애국 찬송가’를 수록하여 내용이 민족적이라는 것으로 추정된다. 애국 찬송가의 곡조는 Auld Lang Sine으로 불렀고, 그 가사는 현재의 애국가와 동일한데 작사자는 밝히지 않았다. 찬미가 제4장은 ‘서라 십자가 군사’, 제9장은 ‘그리스도 군사’ 등으로 한국 교회와 기독교인이 십자가의 군병, 그리스도의 군사로서 미래를 이끌 진취성을 표현하였고, 일제에 맞서는 우리 민족을 상징하였다.
조선총독부는 1915년 ‘포교 규칙’을 공포하여 한국 교회를 통제하였고, 종교 통제를 위해 종교단체법을 만들려고 노력하였다. 1898년, 1927년, 1929년에 매번 종교법안을 상정하려고 시도하여, 결국 1939년 제국의회에서 ‘종교단체법’을 통과시킴으로 종교에 대한 통제를 본격화하였다. 교회의 설립은 신고제에서 허가제로 바뀌었고, 교역자의 자격까지도 총독부의 인가를 받아야만 하였다.
일제가 기본적으로 기독교를 통제한 이유는 첫째, 일본의 천황 숭배 및 신사 참배 신앙과 기독교가 공존할 수 없고, 둘째, 한국 교회가 민족운동, 독립운동과 관계를 가진 단체였으며, 셋째, 선교사들이 일본과 적대 관계에 있는 미·영의 서구 제국과 연결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신사 참배 거부의 중심인물이 선교사였고, 선교사들이 경영하는 학교에서 참배 반대운동이 일어났다. 이때 일제는 선교사들의 교권으로부터 벗어나려는 한국 교회를 이용하여 반선교사 여론을 일으켰고, 결국 미국 북장로회 해외선교부는 1936년 한국에서의 교육사업에서 손을 떼기로 결의하였다.
1938년 9월, 일본 경찰이 배석한 가운데 치러진 총회에서 장로교는 신사 참배를 가결하였다. 1943년 장로교는 ‘일본기독교 조선장로교단’으로, 감리교는 ‘일본기독교 조선감리교단’으로 개칭하였다. 침례교가 해체되고, 안식교와 성결교는 자발적 형식으로 해체되었다. 1945년 7월에는 ‘일본기독교 조선교단’으로 전부 통합하여 일본 교회에 예속되었다.
일제에 의해 한국 기독교의 교단 체제가 일본적 기독교화 되는 가운데, 찬송가에도 통제의 손을 뻗쳤다. 1938년 2월 조선총독부의 ‘기독교에 대한 지도대책’을 통하여 찬미가, 기도문, 설교 등을 검열 및 임감(臨監 : 현장에서 지켜봄)에 의하여 엄중히 단속하기에 이르렀다. 1940년에는 지도대책을 강화한 ‘기독교에 대한 지도방침’을 마련하였는데, 여기에도 찬송가의 단속 내용을 담고 있었다. 조선총독부의 이러한 조치 발표 후, 각 교단은 찬송가집을 검토하여 국체에 위배되는 가사 내용을 수정·삭제하거나 찬송가를 금지하는 조치를 취하였다.
감리교는 1941년 당시 사용하고 있던 ‘신정찬숑가’에서 국체에 위배되는 것을 수정하는 정정 공고를 냈다. 즉 19곡은 금지곡으로 부르지 말고, 54곡은 부분 수정이 있으니 그 부분을 확정할 때까지 부르지 말라는 공고였으며, ‘신정찬숑가’를 국체에 부합하게 수정하여 허가 신청 중이라는 것이었다. 19곡의 금지곡 외에 54곡도 수정 부분을 알 수 없어 못 불렀으므로 사실상의 금지곡은 73곡이나 되었다. 1942년 금지곡과 수정할 부분을 확정하여 조선총독부의 출판 허락을 득한 수정판 ‘신정찬숑가’를 출간하였다.
장로교는 1940년 일제의 국체에 배치되는 내용을 금지하는 ‘장로회 지도요체’를 발표하였는데, 여기에는 찬송가의 검열과 수정도 포함하고 있었다. 1941년에는 장로교 전용 찬송가집인 ‘신편찬송가’ 중 금지할 찬송가를 공시하였다. 제54장 ‘만왕의 왕’은 천황을 현인신(現人神)으로 섬기는 일제에는 하나님이 만왕의 왕이라는 점이 허용될 수 없어 금지되었다. 제22장의 ‘십자가 군병 되어 예수를 쫓을 때’는 군사적 투쟁의 이미지가 반일과 관계되어 금지했다. 제245장 ‘예루살렘 금성아’는 예루살렘을 이상의 땅으로 생각할 때 일제의 식민지 지배에 부담이 되기 때문에 금지되었다. 206장 ‘피난처 있으니’는 곡조가 적국인 영국의 국가와 같아서 삭제시켰다. 1942년 장로교는 그동안 조선총독부의 허락을 받은 확정된 금지곡과 삭제 및 수정곡을 반영한 수정판 ‘신편찬송가’를 출간하였다. ‘신편찬송가’ 중 가사가 전체적으로 수정된 곡은 총 12곡이나 되었고, 곡 중 구절이 삭제된 곡은 9곡, 가사의 자구(字句)를 수정한 것은 41곡 등이다.
‘신정찬숑가’와 ‘신편찬송가’에서 구절이나 자구가 수정·삭제된 것을 살펴보면 그 특징은, 첫째, 하나님이나 예수님의 호칭인 ‘만왕의 왕’, ‘왕의 왕’, ‘만유의 주’, ‘만유의 주재’, ‘태평왕’ 등을 전부 ‘주’, ‘주님’, ‘하나님’으로 바꾸었다. 이는 일본 천황의 신성에 저촉되기 때문이었다. 둘째, ‘십자가 군병’은 ‘구주의 일꾼’으로, ‘치러 나가세’는 ‘달려 나가세’로 수정하였다. 군병이라는 투쟁적 용어가 일본에 저항하는 의식을 암시하였기 때문이었다. 셋째, ‘만민’은 ‘만인’으로, ‘만국’은 ‘모든’ 또는 ‘세상’으로, ‘백성’은 ‘사람’으로 수정하였다. 민(民)이 일본의 신민(臣民)이라는 개념에 배치되기 때문이었다. 넷째, ‘망할 세상’은 ‘모든 죄’로, ‘난리’는 ‘큰일’ 등으로 수정하였다. 기독교의 종말론적 세계관으로 일제 통치의 현 역사를 비판하는 말들은 삭제한 것이다.
장로교는 1943년에는 단순히 찬송가의 수정·금지가 아닌 일본적 기독교 정신에 적합한 새로운 찬송가집의 편찬을 결의하였다. 1943년 5월 ‘기독교신문’의 ‘신편찬송가’ 수정판 광고 내용을 보면,
“…권두에 ‘국가(일본 국가인 기미가요)’와 ‘우미유까바(일본을 위해 싸우다 죽게 해 달라는 내용)’, 기타 국정경절일에 부를 노래들과 ‘국민서가’를 실리어 특수한 집회 시마다 국민으로서의 필요한 본보기 되도록 하였사오니 전선 교우들은 많은 애용 하심을 바라나이다.”
라는 내용에서 찬송가 외에 일본 국가 등의 노래가 삽입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하나님께서 일본의 식민지로 나라를 빼앗겨 찬송도 마음대로 부를 수 없던 시기에 태어나게 하지 않으시고, 자유 대한민국에 태어나게 하심을 감사드릴 뿐이다.
“할렐루야 내 영혼아 여호와를 찬양하라. 나의 생전에 여호와를 찬양하며 나의 평생에 내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시 146: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