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의 발견
정의하려다 말고 문득 ‘행복’이라는 개념은 허구가 아닐까 싶어졌다. 행복, 사랑, 희망……. 실은 그 자체의 가치보다 미디어의 입맛에 맞게 추려진 이미지들의 집합에 더 가깝지 않나. 행복의 실체는 무엇일까.
아무튼, 오도카니 주어진 마음의 평화에 심박 수가 일정한 요즘이다. 실은 태생부터가 코어(core)에 ‘불안’이 있는 사람인지라 그것을 동력으로 살아왔었다. 그런데 그 자리에 ‘안정’이 들어서고 나니 무엇을 해야 할지, 방향을 어떻게 잡아야 할지 우왕좌왕하다 움직임을 멈춰 버렸다. 삼십 년 넘도록 나를 채찍질한 불안의 목소리가 희미해지자 별안간 슬럼프가 찾아온 것이다. 안정 때문에 맞게 된 그 사치스러운 슬럼프에 종지부를 찍은 것이 근간에 겪은 가족과 지인의 죽음이었다.
지난 이십 대를 돌이켜 보면 가슴이 답답하다. 그 치기와 어리석음, 우울하고 아득하기만 했던 날들. 내가 무엇을 하는지 내 욕망은 무엇인지 알지도 못한 채 덮어놓고 달리기만 했던 그 때. 지금이 그때보다 낫다고 확실히 말할 수 있는 건, 적어도 나에 대한 매뉴얼과 청사진이 분명하기 때문이리라.
그리고, 신앙.
신앙 있는 젊은이들이 그렇듯, 나 역시 신앙이 아니었다면 지금 어디서 뭘 하고 있을지 모를 일이다. 나의 정체성, 존재의 의미, 벌어진 시간의 틈에 새카맣게 자리한 공허의 심연, 권태, 숱하게 반복되는 무의미함과의 싸움… 이 골치 아프고 답도 없는 질문들이 튀어나올 때마다 나를 토닥이고 채찍질한 것이 바로 말씀과 그 말씀을 토양으로 가정을 세워 오신 부모님이었다. 건강한 가정, 건강한 신앙 덕분에 나는 이제 (무려) 마음의 평화를 스스로 조율할 수 있는 단계에 이른 것이다.
상황보다 더 큰 힘은 마음의 힘이다. 마음의 힘은 절대적인 안정에서 나온다. 그 안정은, 신에게 나를 전적으로 의탁함에서 비롯된다.
감사할 것들뿐이라고 생각한다면 확실히 삶은 그러해진다. 삶을 이루고 있는 것들은 거창한 이념이나 혼이 담긴 예술 같은 게 아니니까. 그냥, 아침에 눈을 떠 창문으로 들어오는 빛과 바람을 느끼고, 세심하게 고른 재료들로 음식을 짓고, 아끼는 사람들과 안부를 나누고, 먼지 탄 옷들을 빨고 집안 구석구석을 청소하는 일. 가끔 카페에 나가 글을 쓰고 쇼핑을 하고, 보고 싶었던 영화를 보고, 꾸역꾸역 업무를 같이 하다 친해진 사람과 수다를 떠는 일. 삶은 그런 것들로 구성되어 있으며 그 소소한 일들에서 즐거움을 느낀다면 그게 곧 행복이 아닐까.
그러니까 그 사소한 일들을 무사히 할 수 있음에 감사해지는 요즘이다. 나는 왜 이걸 가지지 못했고, 왜 이걸 할 수 없나 라고 생각하는 순간 지옥의 파노라마가 눈앞에 펼쳐진다. 적어도 신앙을 가진 사람이라면, ‘중생한 이성’의 지혜를 가졌다면 감사의 기준이 민간인(!)들보다는 훨씬 낮아야 하지 않겠는가. 부러 낮추어서가 아니라, 저절로 고개가 숙어지고 박수가 나오는 충만한 마음. 적어도 내 이름 석 자를 부끄러워하며 살지 않도록 해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는 뜨끈한 마음 말이다.
행복은, 하나님의 뜻과 우주와 자연 만물과 나의 마음이 일치된 상태가 아닐까. 어떠한 거스름 없이, 욕동과 불안도 없이 물결을 따라 흐르는 느긋한 조각배 같은. 그 행복을 좀 더 자주, 많이 누리는 사람은 아는 것과 믿는 것이 하나 된 신앙의 선배들이 아닐까 싶다. 주의 뜻에 순복하며 살아온 그들의 얼굴은 경직됨이 없고 온화하며 한없이 너그러웠음을 떠올려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