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획
이근삼의 개혁주의적 문화신학 (3)
-아브라함 카이퍼의 신칼빈주의적 문화신학 수용-
<지난 호에 이어서>
Ⅰ. 현대신학 연구, 비판
1. 석사학위 논문, 불트만의 케리그마 신학 비판
이근삼이 정통개혁신학을 추구하면서도 미국에서 현대신학을 비판적으로 연구한 것은 주목할 만한 일이다.
1) 불트만의 역사적 예수와 케리그마적 그리스도의 분리
독일 루터교 신학자 루돌프 불트만(1884-1976)은 19세기 독일 복음주의 신학자 마르틴 캘러(Martin Kähler, 1835-1912)의 주장, 말하자면, 복음서는 부활한 그리스도에 대한 초대교회의 증언이지 결코 역사적 예수에 대한 전기가 아니라는 사상을 양식비평을 통하여 극단화시켰다. 캘러는 1896년 그의 저서 『소위 사실적(史)實的) 예수와 역사적 그리스도』(Der sogenannte historische Jesus und der geschichtliche Christus)에서 역사적 예수와 케리그마적 그리스도를 분리시켰다. 하지만 캘러는 19세기 자유주의 신학자와 후대의 양식사 비평가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역사적 예수와 케리그마적 그리스도 사이의 연속성을 부정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불트만은 캘러와는 다르게 역사적 비평을 양식사 비평에 따라 극단적으로 몰고 갔다. 19세기의 요한네스 바이스(Johannes Weiss), 알버트 슈바이처(Albert Schweitzer) 등이 수행한 하나님 나라에 대한 종말론적 해석, 반 브레데(Van Brede), 헤르만 궁켈(Herrman Gunkel), 유리우스 벨하우젠(Julius Wellhausen)의 양식사 비평, 키에르케고르(Sören Kierkegaard), 하이데거(Martin Heidegger) 등의 실존철학을 수용하면서 복음서를 후대 교회의 자기 이해에 기반한 다양한 신앙 양식의 산물, 곧 케리그마 단편의 모자이크로 해석했다.
불트만은 복음서가 현대인들에게 의미 있는 참된 케리그마가 되기 위해서는 철저히 비신화화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불트만은 예수의 역사성을 한 초점으로 모은 후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이 케리그마의 본질이라고 주장한다. 그것은 비신화화의 작업을 통하여 수행된다. 그리하여 불트만에 이르러 역사적 예수와 케리그마 그리스도 사이에 모든 연결 다리가 파괴되었다. 역사적 예수는 텅 빈 사실이라는 영지주의적 결과를 초래하게 되었다. 이것을 불트만은 “지성적 책임성”(intellektuelle Verantwortlichkeit)이라고 말했다.
2) 이근삼의 불트만 비판: 역사와 케리그마의 이원론
이근삼은 불트만의 비신화화(Entmythologisierung)가 역사적 예수의 역사성 배제를 초래한다고 지적한다: “불트만은… 신앙에서 모든 역사적 요소를 배제하였다. 따라서 불트만 사상 양식에서 케리그마는 거의 역사적 내용을 갖고 있지 않은 것처럼 보여졌다.” 불트만은 역사적 연구의 비평에서 기독교 신앙을 지키기 위하여 케리그마에 대한 실존적 결단의 차원으로 도피하고자 했다. 불트만의 실존론적 신학은 기독교신앙을 역사적 사실에서 실존적 결단의 영역으로 도피시키고자 하였다.
그 결과 불트만의 비신화론은 기독교 신앙의 역사적 사실 근거를 허물어뜨렸다고 이근삼은 예리하게 지적한다: “이와 같이 역사적 연구에서 신앙의 독립을 지키고자 한 그의 노력은 기독교의 역사적 내용들(예를 들면 예수 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 기적, 십자가에서의 죽음, 부활, 승천, 재림 등)을 모두 부정하거나 또는 일부 긍정하더라도… 단순히 그 실존적 의미만 추구하는… 결과를 낳았다.” 그리하여 불트만은 역사적 예수의 불가지론에 빠졌다.
이근삼은 불트만의 시도가 그의 제자, 캐제만(Ernst Käsemann), 보른캄(Günter Bornkamm), 푹스(Ernst Fuchs), 에벨링(Gerhard Ebeling), 콘젤만(Hans Konzelmann), 로빈슨(John Robinson), 예레미아스(Joachim Jeremias) 등 역사적 예수와의 연속성을 회복하고자 하는 후기 불트만 학파 학자들에 의하여 수정되었다고 서술한다.
이근삼은 후기 불트만 학파(the post Bultmann School)의 역사적 예수론이 케리그마의 역사적 예수와의 연속성을 인정했으나 여전히 불연속성에 있다고 비판을 시도한다: “이 모든 새로운 역사적 예수가들의 공통된 치명적인 약점은 그들의 연구방법론에 양식비평을 취함으로 성경적 그리스도를 만날 수 없다는 것이다.” 이근삼은 구속사란 한갓 실존적인 의미적 시간이 아니라 구체적인 역사요, 이 구속사는 성경을 통해서만 바로 알 수 있다고 피력한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나타난 하나님의 구속사는 오직 하나님 자신의 영감된 성문계시인 성경을 통해서만 바로 알 수 있다.” 이근삼은 정통개혁신학적 케리그마 이해를 제시한다. 좁은 의미에서 케리그마는 “사도적 설교”요, 넓은 의미의 케리그마는 “전 신약성경을 포괄한다.” 이근삼은 신약 복음서가 케리그마이며, 이 케리그마는 역사적 예수의 실재성을 포괄하고 있다고 정통신학의 입장에서 올바르게 제시하고 있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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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프로필 글쓴이 : 김영한 (기독교학술원장 / 숭실대 명예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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