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예수교장로회연합회 교회동역자협회  

특별기획

 
작성일 : 20-06-30 19:20  기사 출력하기 글쓴이에게 메일보내기
 

칼빈이 활동한 16세기의 분위기


칼빈이 활동한 16세기의 분위기
시대가 영웅을 낳을 수도 있고 영웅이 시대를 만들어 갈 수도 있다. 칼빈의 경우는 이를 모두 아우르는 인물이라고 해도 좋을 듯 싶다. 하지만 칼빈에게는 영웅적 기질이 있는 것도 아니고 더더욱 세속적인 야심을 가진 자도 아니었다. 말하자면 하나님은 잘 준비된 한 사람 칼빈을 그의 영광과 교회를 새롭게 하는 데 도구로 쓰셨다는 표현이 맞을 것이다. 그러면 우선 16세기의 분위기를 먼저 생각해 보자. 어느 작가의 작품을 이해하는 데는 그 시대의 배경을 생각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하다. 그뿐만 아니라 역사적으로 잘 알려진 인물도 그 시대상을 살펴보면 더 정확히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구텐베르크의 인쇄술이
종교 개혁의 동력을 주었다

16세기는 르네상스 운동과 맞물리면서 성경의 근원으로 돌아가려는 관심이 고조되어 가고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사회적으로 교회적으로 시민의식이 깨어나기 시작했고 개력의 열망이 고조되었다. 성경이 평신도들에게 읽혀지기 시작함으로써 사제 중심의 교회에 평신도의 눈이 열려지게 되었다. 거기다가 독일의 마인쯔에서 구텐베르크가 인쇄술을 발명한 것은 종교 개혁의 뒷받침이 되었다. 사실 구텐베르크의 인쇄술은 오늘날의 인공위성 통신망, 컴퓨터 또는 인터넷보다 더 위력적인 혁신의 도구였다. 우선 성경이 부분적으로 번역되어 자기 나라 말로 출판됨으로 일반 대중들이 성경을 가까이 접하게 되었고 복음에 대한 갈증이 어느 정도 해소되기 시작했다. 그뿐만 아니라 천년의 세울 동안 묻어두었던 교부들의 원전이 인쇄되어 나옴으로써 교부 신학과 신앙이 부흥되기 시작했다. 종교 개혁은 달리 말하면 교부 신학의 부흥이자, 성경의 재발견이며 강단의 개혁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종교 개혁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른 개혁이다

여기에다 16세기의 개혁자는 옛날부터 내려온 수사학의 영향을 받아 논리적이고 학문적인 저술들을 집필해서 출판하기 시작했다. 기원전 4세기에 시작된 수사학은 어떻게 하면 말과 글을 논리적으로 써서 상대방을 설득시킬 수 있는지에 대한 학문으로서, 16세기 수사학의 부흥도 종교 개혁을 뒷받침하는 한 요인이 되었다. 칼빈은 앞서 루터와 그의 동지 개혁자들이 펼쳐온 개혁의 분의기와 역사적 정황과 문헌을 적절히 사용해서 교회 개혁의 체계적인 교리를 창출하게 된 것이다. 칼빈은 학문적으로 인격적으로 잘 준비된 인물이기도 하지만 자신의 시대를 꿰뚫어 보는 예민한 지성과 영성을 갖추었다고 볼 수 있다. 칼빈도 어떤 의미에서 그 시대의 아들이라고 할 수 있다. 만에 하나 칼빈이 한 세기 전에 나왔더라면 그는 이토록 놀라운 개혁주의 학자가 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16세기의 역사적, 사회적, 교회적 분위기에도 선배 종교 개혁자들의 우수한 작품들을 연구하는 중에 오직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만이 신학과 신앙과 생활의 유일한 법칙이라는 확고한 신념을 가졌다.
즉 오직 성경, 오직 믿음, 오직 은혜,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이라는 커다란 구조가 칼빈을 칼빈되게 한 요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미국의 웨스턴 신학교 학장이었고 대칼빈학자였던 존 헤셀링크(I. John Hesselink) 박사의 말과 같이 종교 개혁은 곧 하나님의 말씀을 따른 개혁(Reformed according to the Word of God)이라고 할 수 있다.

글쓴이 프로필
글쓴이 : 정성구 (총신대학교 명예교수 / 전 총신대학교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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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빈의 생애와 사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