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예수교장로회연합회 교회동역자협회  

특별기획

 
작성일 : 20-08-18 10:22  기사 출력하기 글쓴이에게 메일보내기
 

하나님의 주권과 섭리로 본 칼빈의 삶_05


필자는 일생 동안 아침저녁으로 암송하는 성경 구절이 하나있다. 그것은 예레미야 10장 23절의 ‘‘여호와여 내가 알거니와 인생의 길이 자기에게 있지 아니하니 걸음을 지도함이 걷는 자에게 있지 아니하니이다”라는 말씀이 다. 예레미야는 인생의 걸음절이가 자기가 원하는대로 되는 것이 아니라 결국은 하나님의 섭리와 간섭, 하나님의 주권 가운데 움직인다는 뜻이다. 필자가 이 성경구절을 떠올리는 것은 요한칼빈의 일생이 결국 예레미야의 고백처럼 한걸음한걸음이 하나님의 섭리와 주권 가운데 움직였다고 말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준비한 사람 칼빈

칼빈의 일생을 살펴보면 자기가 계획하고 설교했던 것과 전혀 반대되거나 엉뚱한 방향으로 가버린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러나 그의 전생애를 정리해 보면 결국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섭리하셨음을 깨달게 된다. 칼빈은 1509년 7월 10일 파리에서 동북방 쪽으로 230리 떨어진 노욘(Noyon)에서 출생했다. 아버지는 제랄드 코빈이었는데 노동자 출신이었다가 자수성가하여 가톨릭교회에 중직을 맡게 되었다. 칼빈의 본래 성씨는 코빈이라고 했으나 나중에 칼빈으로 고쳤다. 지금 칼빈은 불란서 태생이므로 깔벵이라고 하지만 국제칼빈학회의 공식 명칭은 칼빈(Calvin)으로 확정지었다. 칼빈은 유년 시대부터 명석하고 비범한 소질이 많았다. 그래서 12살 때 교회에서 신부를 보좌하는 직책을 받아 머리를 깎고 소액이지만 정식 봉급을 받았다. 1523년 칼빈이 14세 때 그의 아버지의 뜻을 따라 파리의 말쇄 대학으로 가게 되었다. 오늘의 독자들이 그 나이에 무슨 신부 보좌가 되고 그 나이에 무슨 대학을 가느냐 하겠지만그 당시는 흔한 일이었다. 칼빈은 자기의 뜻과는 달리 아버지의 결정으로 말쇄대학으로 공부하러 갔지만 그 대학에서 당대에 걸출한 라틴어 교수인 꼬르디에(Mathurin Cordie r)를 만나게 되고 그래서 그는 고전어인 라틴어로 읽고, 쓰고, 말하는 데 천재적인 사람이 되었고 이것이 나중에 논적인 가톨릭주의자와 당시 칼빈을 반대하던 모든 이단과 자유주의자를 물리칠 수 있는 무기가 되었다. 그는 천부적인 라틴어 실력으로 교부들의 책들을 탐독하고 그것을 자유자제로 평가하고 변증하는 명수가 되었다.

하나님이 칼빈의 걸음을 인도하셨다

그 후 칼빈은 몽떼구(Montagu) 대학으로 옮겨 갔다. 이 대학은 르네상스의 최고의 학자 에라스무스가 다니던 학교이며 나중에 반동종교개혁자로서 개혁교회를 허물어 뜨리려고 광분했던 이그나티우스 로욜라(Ignatius Loyolla)가 다니던 대학이었다. 칼빈은 몽떼구 대학에서 주로 신부가 되는 정상적인 과정인 성경과 스콜라주의를 배웠다. 여기서 학문적 논쟁 기술을 배운 것이 후일 개혁주의 신앙을 지키는데 큰 밑천이 되었다. 이 학교에서 당대의 내노라하는 젊은 학자들과 교분하는 중에 윌리암 콥을 만난 것이 후일 칼빈이 종교 개혁자가 된 동기가 되었다.

1528년 칼빈은 또 다시 자기 뜻과는 전혀 상관없이 아버지의 명령으로 올레앙스(Orleans) 대학으로 옮기게 된다. 그 이유는 아버지는 교권자들과 충돌로 억울한 누명을 쓰자 아들을 법관으로 만들어서 자기 자신의 꿈을 실현하여 대리만족을 얻게 했다. 그리고 출세도 하고 싶었다. 칼빈은 올레앙스 대학에서 법학을 공부했고 이 대학은 이른바 르내상스 곧 인문주의 사상을 가장 잘 가르치는 학교였다. 이 학교는 법대가 명문이지만 당시 인문주의의 거장 에라스무스가 거기서 교수하고 있었다. 여기서 칼빈은 당대의 헬라어의 최고봉인 볼마르(Melchior Wolmare) 교수를 만나게 된다. 앞서도 말했지만 칼빈은 자기 의지로 자기 자신이 선택한 길이 아니었는데 결국 올레앙스 대학에서 헬라어에 도통하게 됨으로서 결국 그는 성경주석의 왕이 될 수 있었고, 장차 그의 후계자가 될 데오도르 베자를 만나게 된다. 그리고 칼빈은 그 스승 볼마르에서 헬라어만 배웠을 뿐 아니라 마틴 루터의 종교 개혁 원리를 체계적으로 배우게 되었다.

환란과 핍박이 오히려 새로운 역사를 만들었다

1531년 칼빈은 아버지의 갑작스런 별세로 법학 공부를 그만 두었다. 그 때는 법학 공부를 다 마치고 면허증만 받으면 되니까 칼빈은 좀 더 헬라어와 히브리어 연구에 주력했다. 결국 칼빈은 대학생활 8년을 전전하면서 자기의 뜻과는 달리 종교 개혁자로서 할 수 있는 자질과 무기를 잘 만들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런 까닭에 23세의나이로 세네카의 관용론에 관한 주석책을 출판하게 되었다. 사람은 누구에게 무엇을 배웠는가 하는 것은 그의 저작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칼빈은 이 책을 통해서 고전어에 통달하면서 당대의 인문주의에 깊은 영향을 받았다고 볼 수 있다.

칼빈이 세네카의 관용론(Seneca: De Clementia)을 쓴 후에 그의 위상도 달라지고 복음주의 설교가 루셀을 만나고 후일 파리 대 학 학장이던 니콜라스 콥(Nicholas Cop) 교수도 만났다. 콥의 학장 취임 연설이 칼빈의 사상이라는 것으로 인식되어 소로본느 대학 교수들의 비위를 사서 콥과 칼빈을 이단으로 몰았다. 칼빈은 체포를 피해서 다니다가 파리를 탈출하고 친구였던 두 틸레(Lonis du Tillet) 집에 은거하며 가명으로 생활하면서 친구 집에 있는 엄청난 도서를 보면서 여기서 그 위대한 명저 「기독교 강요」를 완성했다. 여기서 고난 중에 회심을 하고 완전히 개종한 듯하다.

그 후에 유랑 생활을 하다가 스트라스부르크로 가는 도중에 하룻밤 제네바의 호텔에 머물다가 개혁자 파렐을 만나서 자기의 뜻과는 상관없이 제네바에 주저앉아 개혁자의 길을 걸었다. 칼빈의 일생을 보면 결국 하나님의 섭리와 주권이 그를 사용했음을 깨닫게 한다.

글쓴이 프로필
글쓴이 : 정성구 (총신대학교 명예교수 / 전 총신대학교 총장)

고난을 통해서 전사가 된 칼빈
칼빈과 그 시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