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예수교장로회연합회 교회동역자협회  

특별기획

 
작성일 : 20-11-08 17:10  기사 출력하기 글쓴이에게 메일보내기
 

스트라스부르크의 칼빈_ 09


스트라스부르크의 칼빈_ 09
신출내기 신학자요 종교 개혁자인 요한 칼 빈은 제네바에서 2년 동안 교회의 개혁과 하나님 나라 건설을 위해서 모든 열정을 쏟았다. 그러나 칼빈은 엄청난 반대에 부딪히고 정치적으로 완전히 꺾이어 스트라스부르크로 피난의 길을 떠났다. 참으로 칼빈은 참담하고 억울한 패배의 쓴잔을 마시고 스트라스부르크로 왔다. 역사는 만약이란 것이 없다지만, 칼빈은 스트라스부르크의 피난 생활 때문에 도리어 장차 더 크고 더 위대한 종교 개혁자로 변신하는 발판을 굳히게 된다. 이 도시에서 칼빈은 놀라운 변화, 돈을 주고도 살 수 없는 영적인 체험, 그뿐 아니라 루터파들의 종교 개혁을 제대로 배우게 되었다. 그리고 인간적으로도 칼빈은 더욱 성숙하고, 신학적으로도 그는 더욱 확고한 개혁주의 신학을 확립하기에 이른다. 말하자면 엄청난 고난과 박해 그리고 처절한 절망이 도리어 칼빈에게는 더 큰 주님의 사역을 위한 준비라고 할 수 있겠다. 아마도 하나님께서 칼빈을 잠시 제네바를 떠나게 하시고 그로 하여금 장차 개혁 교회 설립을 위한 도약의 발판으로 칼빈을 스트라스부르크로 보낸 듯싶다. 바울이 말한 대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기쁘신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신다는 말씀을 생각해 볼만하다.(롬 8: 28)


종교 개혁의 안디옥 스트라스부르크

그러면 칼빈이 피난 갔던 스트라스부르크의 사회 분위기 그리고 교회의 분위기를 살펴보는 것도 칼빈의 스트라스부르크에서의 3년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듯싶다.
스트라스부르크는 오랫동안 중세의 제국 직할 자유 도시로서 종교, 문화, 산업의 중심 도시였다. 이 도시는 일찍이 독일의 마틴 루터가 종교 개혁을 시작한 지 불과 6년이 되는 1523년에 시의회에서 개혁을 결의했다. 스트라스부르크에 네 명의 개혁자가 똘똘 뭉쳐 복음주의 교회를 세우기 위해 애쓰고 있었다. 그중에 한 사람이 바로 마틴 부처였고 또 한 사람 야곱 스트륨이 마틴 부처의 개혁을 적극 뒷받침했다. 그래서 제네바와는 달리 스트라스부르크는 개혁 운동이 탄탄대로를 탔으며 실제로 이 지구상에 종교 개혁이 가능하도록 여러 조건이 잘 갖추어진 곳은 여기 외에는 없었다.
그 도시의 지도자들은 교회의 문제들을 진지하게 생각했을 뿐 아니라, 가톨릭에서 개혁 교회에로의 전환을 정치적으로 잘 해결해 줌으로서 크게 공헌을 한 셈이다. 그 결과 스트라스부르크의 위대한 시장 야곱 스트륨의 지도 아래 제국의 도시 가운데 종교개혁에 가장 앞장선 도시로 변화하게 되었다. 그 도시는 끊임없이 넘나드는 인문주의자들, 학문과 교양이 풍부한 시민들, 그리고 독일의 경건주의 전통, 라인강으로 유입되는 새로운 문명 등 참으로 종교 개혁의 도시로서의 기반시설이 확실히 구축된 셈이었다. 바로 이런 환경 속에 스트라스부르크의 종교 개혁자 마틴 부처가 나타난 것이다.


준비된 도시 스트라스부르크

그래서 흔히 역사가들은 스트라스부르크를 일컬어 “종교 개혁의 안디옥’’ 그리고 ‘‘서남부독일의 뷔텐베르크’’라고 불리울 만큼 개혁 운동의 중심지가 되었다. 당시는 시 당국에서 목사를 승인했는데 이미 마틴 부처는 성 아우레니우스 교회 담임 목사였고 그의 개혁의 동지 카피토는 성 베드로 교회의 담임 목사였다. 이 쌍두마차 격인 부처는 예배 규정을, 카피토는 신앙 문답을 만들어 시당국의 통과를 보았다. 그리하여 1529년에 스트라스부르크는 이미 로마 가톨릭 미사를 폐지하고 신교식의 종교 교육을 실천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스트라스부르크 당국은 세 개의 라틴어 학교를 세우고, 스트라스부르크 대학을 만들었다. 그리고 위대한 교육가 요한네스 스트륨(1507-1589)을 앞장세워 교육 제도를 개선했다.
피난처에서 칼빈은 더욱 목사답고 개혁자답게 성숙되었다

바로 이런 환경 속에 1538년 10월 칼빈은 스트라스부르크에 입성한 것이었다. 그리고 마틴 부처의 추천으로 칼빈은 성 니콜라스 교회에 목사로 부임하였다. 이 교회는 거의 전부가 불란서에서부터 신앙의 자유를 찾아 이곳까지 온 피난민들이었다. 칼빈은 종교 개혁의 새 예루살렘이라고 불리우는 스트라스부르크에서 부처와 멜랑히톤을 만나고 독일 종교 개혁을 배우게 되었다. 마틴 부처와 더불어 여러 종교 회의에 참석하면서 칼빈의 시야는 점점 넓어지고, 멜랑히톤과 교제함으로써루터의 종교개혁을 제대로 알게 되었다.
그러나 칼빈은 그들에게 끊임없이 배우면서도 그들에게 조언을 서슴치 않았을 뿐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어긋난다고 판단되면 가차 없이 비판했다. 칼빈은 스트라스부르크의 3년 동안은 주로 목회와 상담과 저술하는 데 몰두했다. 칼빈은 그곳에서 개혁의 견문을 넓히면서 동시에 보다 더 칼빈다운 칼빈이 될 수 있는 기반을 확실히 닦았다.
여기서 칼빈은 『로마서 주석』, 『기도서』, 『사돌레토추기경에게 보내는 서신』, 『성찬론』을 집필했고 『기독교강요』를 초판보다 세 배 정도로 증보하였다. 여기서 그는 이돌레테 더 뷰르와 결혼해서 가정을 이룬다. 하나님께서는 칼빈을 그의 도구로 쓰시기 위해서 스트라스부르크로 보내어 넓고, 깊게 그리고 높게 준비하게 하신 것이다.

글쓴이 프로필
글쓴이 : 정성구 목사 (총신대학교 명예교수 / 전 총신대학교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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