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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빈과 제네바 아카데미, 그 후_ 12
칼빈과 제네바 아카데미, 그 후_ 12
앞서 필자는 말하기를 개혁자 칼빈이 한 일 가운데 첫째는 개혁자로서 「기독교 강요」를 비롯해서 위대한 저작을 남긴 것이고, 둘째는 27년 동안 목회자로서 또는 설교자로서 살았던 것이다. 세 번째는 평생소원이던 제네바 아카데미 곧 제네바 대학을 세운 것이다. 제네바 대학은 달리 말하면 칼빈 대학이며, 개혁주의 대학이며, 기독 대학이며, 개혁주의 신학대학이 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이 제네바 아카데미를 가리켜서 요한 낙스는 말하기를 ‘‘사도시대 이후에 이 세상에서 가장 완전한 그리스도 학교’’라고 했다. 또 루터파 학자인 발레틴 안드레아는 칼빈 서거 50년인 1610년에 제네바를 가리키면서 “내가 사는 날 동안 기억하고 염원할 위대한 것을 보았다. 그러한 도덕의 정수는 기독교의 자랑스러운 훈장과도 같다”고 말했다.
제네바 대학은 칼빈대학이며 개혁주의 신학교
어쨌든 칼빈이 세운 제네바 아카데미는 제네바 최초의 대학이자 목회자와 교수 그리고 기독교의 지도자를 양성하는 기관이었다. 그리고 유럽 각국에서 교회 개혁의 의지를 불태우고 칼빈주의 사상을 배우려는 사람들이 몰려왔다. 제네바 대학에 온 칼빈이 기도한 대로 경건과 학문이 있는 대학으로서 명성을 떨쳤다. 제네바 대학의 신학 교육은 그냥 개혁 교회의 목회자 인재 양성만을 추구하지 않고, 인문주의적인 학문을 도구로 사용했다. 신학자와 목회자들은 철학과 문학, 예술, 학문의 전반을 섭렵하도록 한 후 든든한 기초 학문 위에서 신학을 수립하도록 했다. 제네바 아카데미는 칼빈이 지향하는 새로운 개혁 교회의 기초를 놓을 수 있는 목회자와 교수들을 철저히 교육시켜 놓았다. 왜냐하면 종교 개혁은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교회를 개혁하고 유지하기 위해서는 균형 잡히고 철저한 개혁주의 사상으로 훈련된 인물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칼빈에게 있어서 학문이란, 그 학문 자체는 진리가 아니지만 진리에 도달하 기 위한 도구로서, 하나님이 주신 이성과 일반 은총의 결과로 보았다. 또한 칼빈은 수사학(Rhetoric)을 강조했다. 왜냐하면 당시 로마 가톨릭주의와 자유주의와 이단들과 싸우기 위해서는 논쟁과 설득 그리고 논리적 토론에 능한 목회자들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제네바 대학은 국제적이었다
사실 제네바 아카데미를 졸업한 지도자들이 각기 자기 나라로 귀국해서 후일 칼빈 이후에 위대한 종교 개혁의 전도자가 되고 개혁 교회의 지도자가 되었다. 루터의 약점은 체계적이지 못하고 논리가 부족했다. 그러나 칼빈은 루터가 갖지 못한 조직력과 설득력 그리고 논리가 확실하였다. 그런 영향으로 제네바 아카데미 출신들은 뜨거운 개혁 신앙은 말할 것도 없고, 교회의 조직과 체계를 세우고 개혁주의 신앙을 증거하는 일에 앞장섰다. 루터는 세속 정부와 타협하고 협력함으로 그의 영향력은 독일과 북유럽에 영향을 끼치는 것에 그쳤다. 그러나 칼빈이 세운 제네바 아카데미 출신들은 전 유럽에 퍼져서 교회 개혁의 지 도자가 되었다. 그런데 이러한 칼빈주의 사상은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교육, 종교 등 삶의 전 영역에 골고루 영향을 미쳤다. 앞서 말한대로 제네바 아카데미의 학생들은 멀리는 스코틀랜드, 화란, 영국 그리고 헝가리 등에서도 왔고 가까이는 독일과 벨기에 그리고 프랑스와 스위스에서 몰려왔다. 제네바 아카데미는 신학의 센터이자 선교의 센터이기도 했다.
제네바 출신들이 세계를 변화시켰다
예컨대 스코틀랜드의 종교 개혁자 요한 낙스는 아카데미 출신은 아니지만 가장 칼빈과 가까이 지내면서 칼빈의 신학적 진수를 그대로 물려받았다. 영국의 교회 역사가 필립 샵은 말하기를 낙스는 칼빈보다 더 칼빈적이다. 왜냐하면 낙스는 네 살이나 아래인 칼빈에게 무릎을 꿇고 성경을 배웠다고 했다. 그런 까닭에 요한 낙스는 피의 여왕 메리를 꺾고 스코틀랜드의 장로교회를 만들었다.
한편 독일의 하이델베르그 요리 문답을 작성한 올리비아누스도 칼빈에게서 배운 제네바 아카데미 출신이었다. 올리비아누스가 칼빈의 아동 신앙 문답을 근거로 해서 만든 하이델베르그 요리 문답은 오늘날 세계 모든 개혁 교회의 신앙고백이다.
그리고 칼빈의 고국인 프랑스에는 휴그노파들이 개혁주의 신앙을 위해서 생명을 걸고 싸웠다. 칼빈은 1555년에서 1566년까지 제네바 대학에서 훈련받은 161명의 목사를 프랑스에 파송했다. 비록 1675년 가톨릭이 휴그노파 50만 명을 대학살한 결과 많은 휴그노가 화란과 독일 등지로 피난 갔지만 그들의 신앙은 모두 칼빈주의자였다.
또한 1618∼1619년 화란의 저 유명한 돌트총회(Dordt Synod)가 열렸을 때 총회의 의장은 유명한 신약학자 요한네스 보겔만 (Johannes Borgerman)이었다. 그도 역시 제네바 아카데미 출신이었다. 그 외에도 모든유럽 각국의 종교개혁의 지도자들은 거의 모두가 제네바 아카데미에서 공부한 사람들이었다. 사람을 교육시키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없다. 이것이 칼빈이 제네바 아카데미를 세운 목적이었다. 그래서 칼빈의 개혁주의 사상은 5대양 6대주에 크게 확산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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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프로필 글쓴이 : 정성구 목사 (총신대학교 명예교수 / 전 총신대학교 총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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